실시간 이성남의 문화잡기기사 조선시대 애체(靉靆)2020/07/10 조선시대 안경을 애체(靉靆)라 했다. 근대에는 안경 낀 사람들이 절반은 된다. 그럼 언제부터 안경에 대한 기록이 있었고 누가 최초로 안경을 쓰게 되었을까? '애체'라는 표기는 중국어 표기를 인용한 것으로서 국내 현존하는 안경중 가장 오래된 것은 임진왜란 당시 통신사였던 김성일이다. 홍대용(1731~1783)이 중국에서 쓰고 들어와 유행 시켰다. 삐라의 어원 미군이 태평양 전쟁때 뿌린 빌(bill)2020/07/02 삐라가 처음 실시한 것은 고대 이집트에서 도망간 노예를 잡아 달라며 거리에 뿌린 문서를 세계 최초의 삐라로 친다. 이 파피루스 전단은 대영 박물관에 전시 되어있다. 종교 개혁이 한창이던 16세기 독일애서 위선적인 교황을 풍자하는 그림 전단이 곳곳에 뿌려졌다. 한반도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뿌려졌다.상대방의 귀순이나 항복하라는 삐라를 대대적으로 살포했다. 종로5가 약국들의 효시, 보령약국2020/06/22 서울미래유산으로 종로거리에 함께 명맥을 유지하던 종로서적.무과수제과.단성사 보신주단 등은 역사속으로 기억되고 종로 5가에서는 오래된 보령약국, 1958년에 개업했으니 60년이 넘었다. 북한산성 ‘숙종의 길’2020/06/09 대서문에서 시작해서 중성문, 행궁터, 동장대, 대동문을 다녀왔다. 숙종은 북한산성을 축조한 다음해 1712년 4월 10일, 훗날 영조가 되는 (영잉군 19세)과 함께 북한산으로 行幸(행행, 임금이 궁궐 밖으로 거동하는 일)하였다. 창덕궁에서 숭례문을 통해 홍제교 구파발을 걸쳐 북한산성 대서문으로 들어섰다. 숙종의 길은 평탄하다 때문에 숙종의 걱정은 현장에서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內城인 중성문을 쌓도록 지시 한다. 중성문은 북한산성이 축조된 뒤 1714년에 완공된다. 그 옆 시구문, 수문은 중성문 옆에 만들었지만 을축년 대홍수 때 사라졌다. 폐하, "한집에 살게 해 주세요"2020/06/04 동십자각 건너 안국동 방향 골목으로 들어서면 사간동 법륜사 옆에 두가헌음식점 건물은 고종의 후궁 ‘광화당 이씨’ 와 ‘삼축당 김씨’가 살던 곳이다. 1923년 순종이 아버지의 후궁을 궁궐 밖으로 내보내면서 지어준 집이다. 두 사람은 같은 세수간 나인(內人)으로서 고종의 승은(承恩)을 입은 뒤에도 사이가 변하지 않아 고종이 승하(昇遐)한 뒤 순종에게 한집에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하여 두 후궁은 이곳에서 1.4 후퇴를 제외하고 50년을 살았다. 처음 1 2 3 4 5 6 7 8 9 10 다음 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