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주의 맛나는 음악 기행 주요 뉴스

트로트, 전통가요, 성인가요? '뽕짝'이라 부르자!
트로트, 전통가요, 성인가요? '뽕짝'이라 부르자!
(사진:kbs 홈페이지) 하나 :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전 일제 강점기. 한일합방이 되고나서 10년정도 흐른 후. 일본의 유행가인 ‘엔카’가 한반도에 상륙한다. 서울 무교동 부근의 대형주점이나 무도장에는 엔카를 부르는 일본 여가수들의 노래가 끊임없이 들려왔고 잘나가는 조선 사람(?) 들에게 엔카를 한 곡 정도 일본어로 멋지게 부르는 것은 일본의 실력자들과의 사교를 위한 준비사항이기도 했다. 엔카는 동양적인 음계를 특징으로 했으며 당시 신민요와 더불어 주류(主流)의 대중음악으로 자리 잡는다. 1960년 전후 미국 대중음악이 주한미군을 통해 전파되기 시작하자 (신중현을 비롯한 많은 밴드가 있었음) 다소 수그러지기도 했으나 여전히 대한민국에서는 꾸준한 인기를 누린다. 바로 '미스터 트로트'를 비롯래 요즘 방송을 도배하고 있는 ‘뽕짝’ 또는 ‘트로트’에 대한 이야기다. 물론 십여년 동안 아이돌 그룹이 부른 댄스뮤직에 식상한 반작용적인 측면도 많았다고 봐야한다. 둘 : ‘트로트’는 서양 댄스음악 장르 중 하나인 폭스 트로트(fox trot)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대부분의 트로트 노래는 ‘폭스 트로트’ 리듬과 거의 관련성이 없다. 누구는 말달리는 소리와 느낌을 4분의 4박자로 옮긴 리듬이라고 하는데 이 또한 전혀 근거가 없다. 그래서 오늘의 대중문화평론은 바로 ‘뽕짝’ 과 ‘트로트’에 대한 불편한 진실이다. 뽕짝은 송대관이 부른 ‘네박자’ 란 노래처럼 ‘꿍짜작 꿍짝~~’의 리듬이 반복되면서 ‘뽕짜작 뽕짝~’ 처럼 들린다고 해서 불려졌고 일종의 의성어(擬聲語)에 가깝다. 셋 : 먼저 엔카에 대해 알아보면 한자어로 연가(演歌)이다. 메이지(明治) 시대 이후 유행하기 시작한 일본 대중음악인데 일본의 전통민요인 창가(唱歌)가 서양음악과 결합되어 나타난 새로운 양식이었다. 그 음악들의 대표적인 노래를 국내음악에서 찾는다면 ‘목포의 눈물’ ‘동백 아가씨’등을 들 수 있는데 그 출발점은 바로 서양악기인 기타를 통해 대부분의 반주가 유사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목포의 눈물’ 전주에서 들려오는 띵끼딩 딩딩~디리리리 띵띵~뽕짜작 뽕짝~~기타소리가 연상될 것이다. 넷 : 이 음악들의 장르에 대해서 특별한 호칭이 있지는 않았다. 1960년대 중반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를 왜색(倭色)가요라는 이유로 방송금지 시켰는데 (당시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반일 감정이 극에 달하자 정치적인 해법으로 왜색가요를 금지곡으로 지정했음. 故 박정희대통령이 생전에 이 노래를 가장 즐겨 불렀다고 함), 그때 격이 낮고 속된 언어... ‘비속어(卑俗語)스런 뽕짝’이라는 말도 사용을 자제하면서 ‘유행가’라는 통칭의 명사를 쓰게 된다. 이 단어들이 혼용되다가 80년대 중반이후 KBS 가요무대를 중심으로 ‘전통가요’라는 호칭을 쓰기 시작하는데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한편으로 ‘성인가요’라고 부르자는 주장도 있었다. 다섯 : ‘뽕짝’은 우리나라에서도 변화를 겪게 되는데 바로 1940년 전후로 시작된 태 평양전쟁의 참전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감격시대’ ‘무너진 사랑탑’ ‘럭키서울’ 등 빠른 행진곡풍의 노래들의 주류의 음악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해방 후부터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다시 예전의 리듬으로 복귀하는데 ‘단장의 미아리 고개’ ‘가거라 삼팔선’ ‘꿈에 본 내고향’ 등 고향 이별 아픔 등을 주제로 한 감성적인 노래들이 많은 인기를 얻었다. 여섯 : 이후 60년대에는 이미자, 조미미, 배 호 등과 70년을 전후해서는 남진 나훈아, 70년대 중후반에는 하춘화, 최헌, 윤수일 80년대 초반에는 조용필, 김수희 80년대 중반부터는 현철, 송대관, 태진아, 설운도, 최진희, 심수봉, 주현미 등등. 뽕짝가수들이 큰 인기를 얻으며 발전하게 된다. ‘뽕짝’은 익숙한 멜로디와 편안히 따라부르기 쉬운 스타일로 더욱 더 발전되는데 고학력 그리고 대도시의 젊은층 보다는 유행에 덜 민감한 지방이나 중장년의 사랑을 많이 받게 되었다. 그러한 결과를 대변하는 것이 속칭 ‘쌍쌍파티’로 대표되는 ‘뽕짝 메들리’의 탄생이었다. 일곱 : 21세기에 들어서자 ‘뽕짝’에 대해 새로운 경향들이 나타났는데 그 대표적인 가수는 장윤정(어머나)과 박상철(무조건) 그리고 박현빈(곤드레 만드레)이었다. 가사 가 저급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비극적이지 않고 신나고 화려했으며 과거의 리듬에서 탈피하기 시작한다. 후리고 꺽고 ~ 하는 창법의 노래지만 일반의 대중음악과 별 차이가 없어졌기에 요즘에 ‘뽕짝’은 ‘올드 패션’의 노래장르를 설명하는 단어로 서서히 바뀌어 가고 있다. 여덟 : 뽕짝에 대해서는 양면의 평가가 있다. 80년대 중반부터 방송사를 비롯한 신문의 문화면을 중심으로 트로트의 일본색에 대해 논쟁한 이른바 ‘뽕짝 논쟁’이 일어났는데 트로트의 뿌리는 엔카이고 지나치게 퇴폐적이고 건강하지 못하다는 비판이었다. 한마디로 일본스럽다는 이유였는데 공교롭게도 시기적으로 80년대 초중반, 그동안 역사적인 비하인드 스토리를 발설하기 곤란했던 친일행적자들의 면면이 서서히 밝혀지기 시작한 이유도 이 논쟁을 거들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젋은 세대들에게는 신파적인 소재가 비판이 되기도 했으며 예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세련된 조용필류 대중가요의 등장이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아홉 : 한편, 뽕짝을 우리 역사와 우리 문화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인데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 대한민국의 근현대사와 함께 대중들은 이 노래들을 따라 불렀다. 그러나 아쉬운 부분은 음악인 또한 문학인이나 미술인 그리고 종교인과 마찬 가지로 친일(親日)행적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는데 이 또한 우리나라 역사의 일부가 아닌가 싶다. 사랑, 고향, 부모, 가족, 전쟁, 슬픔, 기쁨, 만남, 이별, 눈물 등 우리네들의 삶이 노래 속에 분명 담겨있었다. 그리고 음악장르를 나누기 매우 어려운 문제가 있는데 ‘송장식의 왜불러’ ‘송대관의 해뜰날’ ‘조용필의 그겨울의 찻집’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 같은 노래를 뽕짝으로 분류할 수 있느냐의 논쟁이다. 실제로 불가능한 구분이다. 그러나 상당수의 대중가요를 비롯하여 예술가곡 그리고 역사가 오래된 중고등학교의 교가들이 일본 작품을 표절한 수많은 사례들은 한편으로 쓴웃음을 짓게 만든다. 열 : 뽕짝이냐 트로트냐의 문제가 OX문제는 아니지만 한 가지를 고르라면 뽕짝을 골라야한다고 생각한다. 여러 반론이 있을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논리는 과연 트로트라는 표현이 왈츠, 블루스, 탱고, 맘보, 고고, 보사노바, 차차차, 디스코, 펑키 처럼 하나의 리듬으로 분류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중요한 팩트는 ‘트로트’란 단어 자체의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비록 비속어로 사용을 자제하자는 여러 의견이 있었으나 ‘뽕짝’이 순우리말이고 가장 순수하고 솔직한 표현이기 때문에 한 번 더 강조해서 이 주장을 하는 것이다. (사진: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회) 열하나 : 과연 남북의 대중가요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북한에는 뽕짝 리듬의 노래가 있을까? 결론적으로 북한에는 엔카 리듬과 유사한 노래, 즉 뽕짝 리듬의 노래는 없다. 예전에 필자가 MBC예술단 단장으로 북한 평양예술단과의 남북예술 합동공연을 할 당시 남북의 가수들이 함께 부르는 노래로 ‘김정구 선생의 눈물젖은 두만강’을 제안 했는데 평양예술단 단장이 이 노래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 이유는 해방후 엔카풍 의 노래들을 모두 금지시켰고 또한 태평양전쟁 참전(參戰)을 독려하는 공연에 참가해서 노래를 불렀던 모든 대중가수들에게 활동금지 명령을 내렸기에 ‘눈물젖은 두만강’은 북한에서 잊혀진 노래가 되었다. 물론 북한 체제가 갖고 있는 폐쇄성이 다양한 인간정서의 표현에는 장애요소로 작용했을 것이다. 열둘 : 트로트나 뽕짝이 일본 문화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그 형식안에 우리의 것을 담으면 우리의 것이 된다는 그런 생각을 이젠 좀 더 많이 해도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출처가 불분명한 ‘트로트’란 외래어 대신에 순우리말로 정겨움도 더해 지는 ‘뽕짝’이란 표현을 사용하기를 권한다. 이젠 일본에서 전파된 엔카류의 뽕짝보다 K-pop의 위력이 전 세계적으로 더 대단하고 근사하지 않은가. 끝으로 노래방에서 당신의 18번은? 열셋 : 유네스코 지정 세계무형유산인 일본 전통공연 예술 가부키 (歌舞技). 일본의 어느 가문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가부키중에서 가장 인기있는 작품 18개를 선정했고 그 중에서도 18번째 작품이 가장 인기가 높다고 한다. 그런데 이 18번째 작품에는 최고 수준의 가창력과 춤사위와 기교가 필요하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모든 것을 통달하거나 뛰어난 사람에게 18번이란 번호를 부여한다. 특히 야구에서도 그런 현상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보통 에이스급 투수가 등번호 1번을 다는 경우가 많은데 일본의 경우는 18번을 등번호로 부여하는 전통이 있다. 마쓰자카, 이라부, 다르빗슈 등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투수 대부분도 등번호가 18번이었다. 이왕이면 ‘18번’ 대신에 '애창곡'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은데... 여러분들의 생각은?
20세기의 디바들 '이난영, 마리아 칼라스, 에디트 피아프',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다
20세기의 디바들 '이난영, 마리아 칼라스, 에디트 피아프',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다
19세기 말엽, ‘투란도트’ ‘라보엠’ ‘나비부인’ 등으로 유명한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에는 멋진 3곡의 아리아가 있다. '오묘한 조화' '별은 빛나건만' 그리고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그런데 이 아리아처럼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다’ 간 최고의 소프라노가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 칼라스'다. 난 남에게 해로움을 주지 않았고불쌍한 사람들도 남몰래 도와줬어요.항상 믿음 속에서 살며 성인(聖人)들 앞에 정성을 다해 기도드렸고언제나 제단 앞에 고운 꽃을 바쳤습니다.성모님을 위해 보석도 바치고 하늘 높이 거룩한 노래도 불렀건만.하느님은 왜 고통받는 나를 홀로 내버려 두시나요. 그녀는 미국으로 이민 온 가난한 그리스 이민자 부부의 딸로 1923년 뉴욕에서 출생했다. 그런데 못생기고 뚱뚱한 아기가 태어나자 그녀의 어머니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고 4개월이 지난 후에야 아이의 존재를 인정했으며 그녀는 10대 후반엔 고도근시에 100kg에 육박하는 거구였다고 한다. 마리아 칼라스는 고향으로 돌아가 음악학교에 다녔는데 부모들은 이미 이혼했고 그녀의 엄마는 칼라스에게 계속 생활비를 요구했을 정도로 지긋지긋한 젊은 시절을 보낸다. 노래만 잘했던 칼라스, 외모 콤플렉스로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얻지 못하자 ‘목숨 걸고 다이어트’를 결심한다. '로마의 휴일'에 나온 '오드리 햅번' 사진을 걸어놓고 다이어트를 했는데 2년 사이에 30kg의 감량을 성공적으로 해내고 드디어 국제 노래 콩쿨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고 각종 경제적 혜택을 받아가며 노래에 매진한다. 그리고 수많은 오페라의 여주인공으로 승승장구하게 된다. 늘씬한 체구에 선명한 이목구비와 드라마틱한 멋진 노래. 그녀는 경제적으로 든든한 스폰서 '메네기니'와 결혼하며 최고의 스타로 오르게 되고 돈과 사랑을 모두 얻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오페라 공연에서 그녀를 보고 사랑에 빠진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선박 왕 '오나시스'였다. 그는 칼라스와 메네기니 부부를 자신의 유람선에 초청해 3주간 항해를 했는데 거기서 부적절한 애정사건이 발생한다. 유부남과 유부녀의 사랑. 칼라스는 수 십 명의 기자들을 모아 놓고 이혼을 발표하고 또한 당시로는 최고의 화제가 될만한 오나시스와의 동거를 시작하면서 결혼을 발표하려 했는데 얼마 안되는 짧 은 시간속에 세기적인 ‘운명의 장난’이 동시에 진행된다. 마국 케네디 대통령 암살 이후 미망인 '재클린 캐네디'와 전격적으로 결혼을 발표하는 오나시스. 이렇게 사랑게임은 허무하게 끝난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고 했던가? 이로부터 남은 생애를 우울증으로 고생하다가 파리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심장쇼크사 한다.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다’ 간 마리아 칼라스. 20세기에 가장 많이 팔린 오페라 음반 베스트 20 가운데 13편에 자신의 목소리를 담았지만 결국 비참하게 삶을 마감한다. (마리아 칼라스와 에디트 피아프) “그녀의 키는 5피트밖에 안되었다.” 한 여가수의 죽음을 두고 프랑스의 대표적인 신문인 ‘르 몽드’의 머릿기사로 올라온 제목이다. 1950년대 가장 돈을 많이 번 가수 3위에 올라있는 가수, 프랑스어를 국제적 음악언어로 승화시켰다는 최고의 평가를 받는 '에디트 피아프(작은 새를 뜻하는 프랑스 은어) 아버지는 거리의 곡예사, 어머니는 3류 가수, 경제적으로 힘들게 살았던 부모는 딸을 알콜중독자 외할머니에게 맡겨 키웠고 다시 창녀촌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살아가는 친할머니에게 맡기는데 설상가상으로 가족 대부분이 알콜 중독자였으며 본인도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영양실조에 걸려 보낸다. 그래서 ‘에디트 피아프’는 연약하고 작은 체구를 갖게 된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아버지는 군대에 징집되었고 3살된 딸을 친할머니에게 맡겼고 이때 악성 결막염에 걸려 5년 동안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며 실명의 위기에 놓였지만 할머니의 지극정성 덕분에 기적적으로 시력을 회복한다. 그리고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의 이곳저곳을 다니며 카바레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그녀가 청중들 앞에서 처음 부른 노래는 프랑스 국가(國歌) ‘라 마르세예즈’라고 전해진다. 심금을 울리는 목소리 그리고 애절함. ‘에디트 피아프’는 15세부터 노래를 불러 먹고 사는 문제를 조금씩 해결하지만 16세에 결혼을 하고 18세에 2살된 딸을 수막염으로 잃게 되는 엄마로서의 아픔도 겪는다. 그러나 차츰차츰 그녀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하는데 음반발매가 연이어서 성공을 거두고 미국의 ‘에드 셜리반 쇼’ 출연과 ‘카네기 홀’ 공연으로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가장 대표적인 샹송 가수로 우뚝 선다. 정상에 오른 '에디트 피아프'는 권투선수와의 사랑 그리고 배우 겸 가수 '이브 몽땅'과의 사랑으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지만 우울증과 술과 마약으로 쇠약해진 그녀는 간암으로 48세에 쓸쓸히 사망한다. 복싱 미들급 세계 챔피온 ‘마르셀 세르당’과의 불같은 사랑. 그러나 세 아이를 둔 유부남과의 사랑이었다. 그는 ‘에디트 피아프’를 만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오다가 추락사고로 사망하게 되고 이 사건을 계기로 ‘불후의 명곡’이 탄생하는데 바로 ‘사랑의 찬가’(L’Hymne a l’Amour) 다. 이보다 더 지독한 사랑노래는 없을 것 같다. 저 파란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땅이 꺼져도당신이 절 사랑하신다면 상관없어요 당신이 원하시면 이 세상 끝까지 가겠어요.머리도 금발로 물들이고 재물을 훔쳐서 라도 가겠어요.당신이 하라시면 제 조국이라도 팔고 친구들도 배신하겠어요.당신이 숨져 제게서 멀어진다 해도하늘에서는 문제될게 없겠지요하느님은 사랑하는 이들이 함께있도록 해주시니까요 (중략) 우리나라에도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다간 인기 정상의 가수가 있었으니 바로 '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이다. 하루에 밥 한 끼도 제대로 못 먹을 정도로 가난한 삶을 이겨내고자 막간가수로 활동하다가 음반제작자에게 실력을 인정받아 중앙무대로 등장하고 이어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당시에 ‘이난영’은 보기 드문 서구형 미인이었고 수많은 남성들은 그녀의 곱고 맑은 목소리를 폭발적으로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수많은 남성들을 관심을 외면한 채 이미 해방전 뮤지컬 ‘로마오와 쥴리엣’을 프로듀싱하기도 했던 엘리트 음악가 '김해송'과 결혼을 하지만 한국전쟁 당시 김해송이 월북하고 이난영은 혼자 자식들을 키운다. 미국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김시스터즈’의 엄마가 바로 이난영이고 아버지의 성을 따라 김(金)시스터즈가 된 것이다. 그런데 당시 최고의 인기가수로서 ‘무너진 사랑탑’ ‘애수의 소야곡’ ‘이별의 부산 정거장’ 등을 불렀던 '남인수'가 이혼하게 되고 두 사람이 목포와 진주를 오가며 사실혼 관계로 살게 되자 '이승만 대통령'이 두 사람에게 연애금지령을 내리고 결국 불같은 3년간의 사랑은 남인수의 병사(病死)로 끝난다. 그녀도 췌장암과 약물중독으로 쇼크사하는데 그녀의 시신을 아무도 돌보지 않아 한동안 경기도 파주 용대리의 무연고 묘역에 잠들어 있기도 했다. 이난영을 추모하는 노래비는 목포 유달산 앞에, 남인수 추모 노래비는 진주 진양호에 각각 세워져 있다. 대한민국 대중가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곡인 대중가요의 고전 ‘목포의 눈물’이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부두의 새악시 아롱젖은 옷자락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어느 누가 그녀들의 불행한 최후를 예상했겠는가. 그러나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건 레코딩 기술의 발전으로 그녀들의 주옥같은 목소리는 수십 년의 시간을 넘어서 존재한다. 사진과 필름으로 남겨진 ‘그레타 가르보’나 ‘비비안 리’ 그리고 '오드리 햅번'의 모습처럼...
음유시인 조동진 추억하며 ‘제비꽃’을 가슴으로 듣다
음유시인 조동진 추억하며 ‘제비꽃’을 가슴으로 듣다
(유튜브 화면 캡쳐) 3년전 이맘때 정확히 8월 28일, 음유시인(吟遊詩人) 조동진(1947.9.3~2017.8.28)이 세상을 떠났다. 포크뮤직의 진정한 자연주의자였고 창작주의자였던 그는 70세가 넘어서도 꾸준히 창작과 공연활동을 이어왔으며 특히 아쉬운 것은 사망 얼마 후에 예정되어 있던 공연 《지금 아니면 또 언제 올지 모를 하나의 공연 : 조동진 꿈의 작업 2017》의 준비 기간이었기 때문에 그 공연명이 자꾸 죽음과 연상되어 떠오르기도 했다. 1947년에 경상남도 고성에서 영화감독의 아들로 태어난 조동진은 서울 신설동에 있는 대광고를 졸업하고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하지만 곧 중퇴를 하고 미8군 무대에서 재즈 록 밴드 ‘쉐그린’의 보컬과 기타를 맡아 데뷔한다. 그리고 1979년 매우 조동진스러운 앨범이 발표되는데 바로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이름을 올린 〈행복한 사람〉이다. 울고 있나요. 당신은 울고 있나요. 아 그러나 당신은 행복한 사람. 아직도 남은 별 찾을 수 있는 그렇게 아름다운 두 눈이 있으니~~ 외로운가요. 당신은 외로운가요. 아 그러나 당신은 행복한 사람. 아직도 바람결 느낄 수 있는 그렇게 아름다운 그 마음 있으니~ 조동진은 ‘동아기획’(들국화, 김현식, 푸른하늘, 박학기, 한동준, 빛과 소금, 봄여름가을겨울 등의 음반제작사)에서 주로 활동을 하는데 동아기획의 ‘김영’사장은 조동진을 맏형으로 하여 수많은 언더그라운드 포크밴드를 양지(陽地)에서 활동하게 지원을 하게 되고 1980년대 포크뮤직의 전성기를 이룬다. 그리고 1982년 3집앨범 〈제비꽃〉이 세상에 나오는데 어느 대중음악평론가는 이 곡을 만들고 또 부른 조동진을 향해 "아픈 영혼에 행복을 주던 얼굴 없는 가수"라고 평가했다. 故 조동진은 생전에 “아직 찬 기운이 남아 있는 봄바람 속에 흔들리고 있는 그 꽃을 발견한 반가움과 함께 애처로운 생각도 들고 마치 꿈 많은 젊음의 절망감을 보는 것 같다"고 이 시의 제목을 '제비꽃'이라 붙인 이유를 애기했다. 그리고 그 제비꽃의 여성 이미지는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 가운데〉의 여주인공인 ‘니나 붓슈만’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내가 처음 너를 만났을 때 너는 작은 소녀였고 머리엔 제비꽃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멀리 새처럼 날으고 싶어~~내가 다시 너를 만났을 때 너는 많이 야위었고 이마엔 땀방울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작은 일에도 눈물이 나와~~내가 마지막 너를 보았을 때 너는 아주 평화롭고 창너머 먼 눈길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한밤중에도 깨어있고 싶어~~ 그밖에도 조동진은 〈작은 배〉 ‘배가 있었네 작은 배가 있었네. 아주 작은 배가 있었네 배가 있었네. 작은 배가 있었네. 작은 배로는 멀리 떠날 수 없네 ~~’. 〈나뭇잎 사이로〉 ‘나뭇잎 사이로 파란 가로등 그 불빛 아래로 너의 야윈 얼굴. 지붕들 사이로 좁다란 하늘. 여름은 벌써 가 버렸나. 거리엔 어느새 서늘한 바람~~’의 명곡을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故 조동진은 사망하기 전 2016년에 앨범 〈나무가 되어〉를 발표하는데 그 중에 〈천사〉 라는 곡은 마치 그의 ‘자전적 수필’처럼 다가온다. ‘그댄 어쩌면 천사 였을지도~~ 비 오는 저녁 고인 빗물로 내려와 그댄 어쩌면 천사였을지도~~ 기다란 방을 지나 빈 가슴으로 다가와 창 너머 어두운 풍경~~눈 앞에 펼쳐진 어지러운 세상 그 속에 다시 설 때 까지 날 지켜준 천사(天使)~~’ 필자가 예전에 M본부에서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를 나훈아와 조동진 두 가수의 특집으로 제작한 적이 있었다. 47년생 동갑내기인 두 가수는 가고자하는 음악의 방향이 서로 달랐지만 오히려 역발상의 아이디어가 잘 맞아떨어졌던 프로그램이었다.전반 30분은 조동진 스페셜, 그리고 후반 30분은 나훈아 스페셜로 진행하기로 했는데 리허설을 하다가 갑자기 ‘나훈아’가 대한민국 최고 포크가수 조동진씨의 노래를 한곡 불러도 되겠나면서 생방송 중에 즉흥적으로 간단한 기타반주로 보면대에 올려진 악보를 보며 〈작은배〉를 나훈아 스타일(꺽고 후리고...)로 불러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기도 했다. 음악활동을 하고 있는 조동익과 조동희는 조동진의 친동생이기도 하고 조동진의 추모공연 등의 수많은 문화이벤트는 장필순과 한동준에 의해 기획된다. 그리고 재작년에 《지금 아니면 또 언제 올지 모를 하나의 공연 : 조동진 꿈의작업 2017》은 취소되지 않고 그대로 무대에 올려졌다. 주인공 한명만 빠졌다. 당시에 조동진을 따랐던 후배들이 선배에 대한 존경심을 담은 추모공연으로 막을 올리고 그리고 막을 내렸다. 조동진은 제비꽃처럼 우리들 마음속에 ‘언제나 깨어있는’ 노래시인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행복한 사람’의 모습으로...
뮤지컬 ‘에비타’, 70년전의 아르헨티나와 오늘의 대한민국
뮤지컬 ‘에비타’, 70년전의 아르헨티나와 오늘의 대한민국
에비타. 오늘은 한때 아르헨티나의 국모(國母)로 추앙받던 '에바 페론'의 별칭인 'EVITA'의 뮤지컬 이야기로서 주요 출연자는 '대통령:후안 페론' '영부인:에바 페론' '이야기꾼:체 게바라'이다. 참고로 Evita는 ‘Little Eva’의 아르헨티나식 줄임말이다. 1952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담배연기 가득찬 어느 영화관. 갑자기 영화상영이 중단되고 '에바 페론'의 서거가 발표되는데 수많은 국민들은 슬퍼하고 그 모습은 어린시절 에바 페론의 부친장례식과 오버랩 되고 다시 그녀의 장례식 모습으로 이어진다. 근현대사에서 가장 극적인 신분상승의 신데렐라 스토리. 15세때 연예인의 꿈을 꾸며 고향을 떠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상경하지만 겨우 클럽댄서로 일하게 되는 그녀. 성공을 위해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 남자들을 그 수단으로 활용하고 결국 모델과 성우 그리고 배우를 거쳐 방송계로 진출한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쿠테타로 연이은 정국불안이 계속되었고 이때 '후안 페론'이 국민적 지지를 받게 되지만 그 상승세는 예측하지 못했던 전국적인 큰 지진으로 묻혀진다. 바로 그때 '후안페론'은 기금모금 이벤트에 유명 인사를 초청하는데 거기서 두 사람의 만남이 우연히 이루어지고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아르헨티나 현대사의 순간순간들. 1920년대 봉건적인 체제를 유지했지만 세계 4대 경제 강국이었던 아르헨티나는 미국 대공황의 영향으로 극심한 빈부격차와 노사갈등을 겪게 된다. 당시 군인출신 노동부장관이었던 '후안 페론'은 반정부활동으로 감옥에 가고 시위 노동자의 석방은 총체적인 난국을 풀어가는 열쇠였는데 이때 '에바 페론'의 라디오 연설이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정치범 후안 페론이 감옥에서 풀려나고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린다. 연이은 희소식이 들려오는데 후안페론이 대통령 당선되고 곧이어 에바 페론은 26세에 영부인이 된다. 그리고 그녀는 대통령 영부인이란 지위를 이용해 파퓰리즘 정책의 선봉에 선다. 가난한 국민들을 위한 재단설립, 여성인권신장을 위한 사회운동, 유럽외교의 상징적 인물, 복지노동성 장관 취임 그리고 부통령으로 추대. 그러나 그녀에게는 이런 조롱이 언제나 따라다녔다. '거룩한 악녀(惡女)이자 천박한 성녀(聖女)'. 열정적으로 경제적 하위층과 어린이들을 위해 헌신했던 영부인 에비타는 수차례 유산을 겪기도 하고 암세포가 점점 퍼지면서 공무수행 중 쓰러진다. 가상의 상상 속에서는 이야기꾼으로 등장하는 '체 게바라‘ (의사출신으로 제국주의 배척의 혁명가)와 왈츠를 추는데 마치 죽음을 암시하듯 지나건 사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고 마치 예언처럼 그녀의 자서전 ‘내삶의 이유’에서 나온 사건들이 하나둘씩 포개진다. (사진:malvern-theatres) 지난 수년간 세상 밖으로 밝혀지진 않게 꼭꼭 감춰놨지만 소녀시절의 성폭행과 그리고 삼류 창녀로 살아온 그녀의 인생을 아르헨티나의 경제적 사회적 기득권자들은 잔인할 정도로 조롱한다. 병원에서 돌아온 그녀는 국민 앞에서 노래로 마지막 연설을 하는데 이 노래가 바로 Don't cry for me Argentina.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 난 이렇게 변화를 가져와야 했어요. 밑바닥 인생으로 나를 내버려둘 수는 없었어요. 난 자유를 선택했고 새로운 세계를 경험했답니다.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 지금까지의 힘든 나날 속에서도 우리들은 그 약속들을 지켜왔습니다~~. 국민들의 추모열기 속에서 그녀는 33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작사가 ‘팀라이스’ ‘작곡가 엔드류 로이드 웨버’, 두 천재 음악가는 의기투합하여 이 작품을 뮤지컬로 만들고 이후 이 이야기는 영화로도 제작된다. 비하인드 스토리, 영화의 주인공으로 '마돈나'가 낙점 되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20년동안 영화제작을 준비하면서 언제나 에바 페론 역의 1순위는 ‘메릴 스트립’ 이었다고 한다. 1947년에는 스페인의 철권 독재자 '프랑코'가 에바 페론에게 스페인 최고훈장인 '이사벨라 십자훈장'을 수여했는데 모든 각료와 언론이 반대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그러나 젊은 미녀 에비타에게 반한 프랑코가 강력하게 추진하여 수여했다고도 한다. 그녀는 퍼스트레이디로서 엄청나게 화려한 삶을 살았지만 정치인과 기업가들의 부인들로 구성된 사교모임에서 회원 가입을 거부당해 한동안 갈등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그 사교모임의 회장은 대통령영부인이 한다는 조항이 만들어 지고 그녀는 회장이 되지만 짧은 가방끈과 떳떳하지 못했던 그녀의 지난 인생은 늘 스트레스였다고 한다. 하지만 '크리스찬 디오르' 같은 유럽의 디자이너들이 가장 선호하는 모델이었으며 그래서 옷과 구두 장신구 보석등을 가장 먼저 착용하는 호사를 누렸다고 한다. 미국이 개입한 군부 쿠테타에 의해'후안 페론정부는 순식간에 무너지는데 에바 페론이 사망하고 미국은 그녀의 흔적을 지우려고 그녀의 시체를 이탈리아에 16년이나 숨겼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의 시신은 고향의 허름한 공동묘지로 돌아가게 된다. 70년전의 아르헨티나와 오늘의 대한민국. 단순하게 비교하기에는 많은 차이점들이 존재하지만 미국이라는 나라의 존재와 더불어 권력의 중심에 서 있었던 한 여성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너무나 닮은 점이 많다. ‘대한민국이여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의 논리전개는 가능할 것인가.
이것도 노래야! ' 가곡 ‘명태’의 황당한 탄생비화
이것도 노래야! ' 가곡 ‘명태’의 황당한 탄생비화
(유튜브 캡쳐) "이것도 노래야?" "집어 치워!" "이거 코미디에요. 코미디". 20여년의 세월이 지나 캐비넷에 처박힌 휴지조각에서 대박으로 화려하게 변신한 가곡이 있었으니 바로 '명태'의 이야기다. 오늘은 우리나라 가곡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볼까 하는데 M 방송사에서 ‘가을맞이 가곡의 밤’을 수차례 맡았었는데 그러다보니 가곡에 대해 많은 애정도 갖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여기저기 불만 담긴 아쉬운 마음도 생겼다. 긍정적으로 보면 우리의 정서를 잘 갖고 있는 문화유산이고 부정적으로 보면 일본 가곡의 표절 퍼레이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친일파' 같은 편가르기가 아니고 그냥 복제품 수준의 가곡은 참으로 많다. 마치 역사가 100년이 넘는다고 자랑하는 학교들의 교가는 상당부분 일본의 유명 고등학교 교가와 비슷비슷한데 아마 전수 조사를 해보면 끔찍할 것이다. 가곡 또는 예술가곡은 유명 시인의 멋진 시에 곡을 만든 그런 형태의 노래로 독일어로는 리트(Lied)라고 한다. '괴테'나 '밀러' 등이 지은 시에 '슈베르트' '슈만' 등이 음률을 달아 멋진 노래로 만든 것이다. '명태' 이곡은 부르기 어려운 노래다. 부를 수는 있어도 그 맛과 드라마틱한 느낌을 故 '오현명'선생 만큼 표현하기가 절대로 쉽지 않기에 '명태'는 수많은 바리톤 가수 들의 희망이자 ‘넘을 수 없는 '벽'이다. 그래서 출연섭외가 너무 힘들었는데 이유는 아무리 잘 불러봐야 흔한 말로 중간밖에 못가기 때문이다. 노랫말도 해학이 넘치고 '권주가'로도 손색이 없는 대한민국 대표 가곡으로 육군 종군작가였고 서울대 국문과 교수를 역임했던 작사자 '양명문'님의 시를 보면 검푸른 바다 바다 밑에서 줄지어 떼지어 찬물을 호흡하고, 길이나 대구리가 클대로 컸을 때 내 사랑하는 짝들과 노상 꼬리치고 춤추며 밀려다니다가... 어떤 어진 어부의 그물에 걸리어 살기 좋다던 원산 구경이나 한 후 이집트의 왕처럼 미이라가 됐을 때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 늦게 시를 쓰다가 소주를 마실 때 카아~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짜악 짜악 찢어지어 내몸은 없어질지라도 내 이름만 남아 있으리라 명태~~라고 으허허허허허~~이세상에 남아 있으리라. 이 시에 한국전쟁 당시 국군장교였던 '변훈'님이 곡을 붙여 가곡으로 만드는데당시에는 생소한 형식 그리고 돌연변이 같은 음악으로 지독한 혹평을 받는다. 또한故 오현명선생(1924년 출생) 역시 국군정훈음악대에 있을때 '변훈'으로부터 이곡을 받아 몇번 불렀는데 엄청난 혹평을 받는다. 작곡가 '변훈'은 하도 낙담해서 직업을 바꿨고 28년간 포르투갈 대사 등 외교관으로 변신한다. 1952년에 당시에 음악평론 의 대가였던 이성삼선생이 연합신문에 '이것도 노래라고 발표를 하나...' 혹평한 얘기는 유명하다. 이곡의 악보는 약20여년간 캐비닛에 묻혀 있다가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대학생들과 함께 한 음악회에서 ‘오현명’에 의해 ‘번외곡’으로 다시 불리우게 되고 거기서 대박이 난다. 기존의 형식을 뛰어 넘은 신선한 가사와 멜로디에 젊은층들이 열렬히 환호했고 그때부터 '명태'는 언제나 빼놓을 수 없는 우리 가곡의 중요 레퍼토리로 자리매김한다. 음악 평론가 서우석선생이 문예중앙 80년 겨울호에서 극찬을 하는데 그래서 80년대부터 소위 인기가곡으로 빵! 터지게 된다. (사진: 한국소방안전원 웹진) 이젠 지구 온난화현상으로 인해 동해에서 명태가 거의 안 잡힌다. 봄에 잡으면 춘태, 가을에 잡으면 추태, 그물로 잡으면 망태, 낚시로 잡으면 조태, 새끼 명태는 노가리, 갓 잡은 살아있는 명태는 생태, 얼린 명태는 동태, 일반 건조하면 북어, 반쯤 말리면 코다리, 얼렸다 녹였다 반복해서 말리면 황태. 첼로의 묵직한 스윙이 바닷속의 명태가 이리저리 떼지어 헤엄치는 모습을 표현하는 전주로 시작하는 가곡 '명태'. '명태'에 참으로 많은 이름이 따라 다닌다. 한국인의 밥상에 가장 많이 올렸던 생선임을 증명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