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쾌대의 시류난마 주요 뉴스

가을 저녁(밤) 秋夕, 제례(祭禮)가 아닌 차례(茶禮)로...
가을 저녁(밤) 秋夕, 제례(祭禮)가 아닌 차례(茶禮)로...
며칠 후면 추석 秋夕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가 한가위 둥근 달에까지 전염되어 올해 달빛은 왠지 나이 드신 부모님의 병색이 완연한 낯빛처럼 안쓰럽고 안타까울 것만 같다. 추석을 문자 그대로 풀면 '가을 저녁(밤)'인데 참으로 운치가 느껴지는 말이다. 한가위 밝은 달이 휘영청 뜨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명절로 삼아 기념을 했을까? 다들 저녁밥 차려 먹고 밖으로 나왔을 것이고 한 해 농사를 끝냈으니 한시름 놓게 된 마음은 꽉 찬 달만큼이나 여유와 안도감으로 차고도 넘쳤을 것이다. 농사를 혼자서 지은 게 아닐 터이니 모내기부터 김매기를 거쳐 추수까지 함께 더불어 작업을 했던 마을 사람들은 기쁨을 나누기에 더할 나위 없는 동료들이었을 것이다. 힘든 일을 같이해 본 사람들은 알게 된다. 그 일을 하는 동안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위안이 되고 격려가 되는지를…. 하늘엔 밝은 달이 떠 있고, 땅에서는 사람들이 서로서로 손을 잡고 강강술래를 돌며 술을 나눠 마시고, 음식을 같이 나누고, 서로에게 고마운 마음을 아낌없이 한데 모았을 것이다. 추석은 그래서 진정한 대동단결의 한마당이다. 생산 시스템이 협업을 기초로 하는 농업구조에서 이러한 축제는 강력한 에너지를 가지고 개인들을 결속시켜 다시 생산성 확장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만들었을 것이다. 기계 문명의 산업화를 거쳐 디지털이 주도하는 정보화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은 자신의 스마트폰을 영토 삼아 랜선을 통해 타인과의 제휴와 협력을 이루며 살고 있지만 점점 고립되며 고독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추석에는 또한 차례(茶禮)를 지낸다. 조상신을 받드는 제례(祭禮)와는 다른 성격의 의식(儀式)이다. 문자에서도 드러나듯이 원래 온갖 음식들 다 상에 올려 거창하게 준비하는 의식이 아니라 차 한잔 따르고 부담 없이 고인을 추념하거나 불가에서처럼 앞에 앉아 마주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절차가 니었을까? 집 안에 위패라도 있고 사당이라도 갖춘 집이라면 시시때때로 차를 올리고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처럼 간단히 고개 숙여 선조들의 정신과 업적을 복기하며 그 뜻을 새겼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서민들은 비싼 차를 마련할 돈이 없어서 숭늉 한 그릇 혹은 조촐한 박주(薄酒) 한 사발 올려놓고 그리했을지도 모른다. 간단히 말해서 차 한잔 올려놓고 죽은 자에게든 산 자에게든 예를 갖췄다는 것이고 그렇게 한 까닭은 배우겠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어떻게 살아야 하고 또한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물었을 것이다. 찻잔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호호 불어가며 또렷한 시야를 확보하고, 찻그릇에서 배어 나오는 다향(茶香)을 음미하며 인생의 향기를 지니길 소망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차례는 그래서 깨달음의 예식이다. 후대로 넘어오면서 사대부 집안이 가문의 위엄을 자랑하기 위해 산해진미를 갖추고 으스대기 위한 향연으로 본질이 바뀌게 된 것이라면, 그리고 그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양반을 동경하던 서민들이 빚을 내서라도 따라 하겠다고 가랑이 찢어지는 줄 모르고 허례허식에 빠지고 말았다면, 향기로운 차가 그 맛을 잃고 변질한 것만큼이나 안타까운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를 지나고 있는 오늘날에도 우리는 여전히 추석에는 차례를 지내고 있다. 하지만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를 거쳐 정보화 사회로 들어가고 있는 지금, 우리 주변에는 명절인데도 대동단결할 동료가 없다. 농사를 지을 때 가장 최소한의 노동 단위이자 가장 믿을 수 있는 집단이었던 가족마저도 해체되고 말았다. 이제는 1인 가구가 전체 가구의 27.2%(520만 3,000가구/1,956만 가구)를 차지하며 1위를 차지하면서 이제는 가족도 곁에 없는 시대이다. 또한 따뜻한 차 한잔 앞에 두고 지혜를 구하기는커녕 바쁜 아침 출근길에 아메리카노 한 잔으로 졸린 눈과 지친 몸을 추스르며 허겁지겁 어디론가 자신도 모르는 곳으로 달려가기에 바쁜 시대이다. (모처럼의 연휴를 맞아 자기를 돌아보며 성찰할 시간도 없이 막히는 고속도로에서 밀려오는 짜증과 졸음에 고함치지 않는 게 다행인 시절인데, 올해는 그마저도 막히고야 말았으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오늘 하늘에 걸린 달은 어떻게 보면 참 공허하고 을씨년스럽기도 하다. 컴퓨터 바탕에 깔린 스크린 세이버의 화면처럼 생명력도 없고 바람도 안 불고 귀뚜라미 소리도 안 들리고 현실보다 더 화려해 보이지만 정감은 하나도 안 느껴지는 그런 가을밤의 풍경이다. 명절은 뜻깊은 무엇인가를 기념하는 날이라고 하는데 코로나 시대를 지나며 답답하고 불안한 하루하루를 지나고 있는 지금, 우리가 기념해야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내일은 집 앞 공원에라도 나가 좀 걸으면서 곰곰이 생각을 해봐야겠다.
새로운 기원 전(BC, Before Corona)과 기원 후
새로운 기원 전(BC, Before Corona)과 기원 후
한때 유머 게시판에 올라왔던 글이 하나 있다. 미국 초등학교 시험에 B.C와 A.D의 약자를 물어보는 문제가 출제됐는데 한 학생이 B.C는 Before Christ라고 쉽게 답을 적었지만 A.D는 도저히 정답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을 거듭하던 그 아이가 적은 최종 답변은 'After Death'(그리스도의 죽음 이후)였다고 한다. (정답은 라틴어 Anno Domini, 영어 번역은 In the year of the Lord로 그리스도의 해(年) 정도가 되겠다) 구세주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사건을 기준으로 그 전과 후가 나뉘어 시대가 구분되었듯이 이제 코로나바이러스가 인류를 위협하며 새로운 시대의 기원이 열리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미 많은 사람이 질병에 걸려 사망하거나 병상에 누워 사투를 벌이고 있고 우리는 자신도 혹시 확진되지 않을까 두려움에 사로잡혀 지내고 있다. 어제 정부가 발표한 사회적 거리 두기 단계도 '2.5 수위'로 격상되면서 홍수가 넘실거리며 언제 범람할지 모르는 제방의 처지 마냥 우리는 불안감과 무력감마저 느끼고 있기도 하다. 그야말로 곳곳에 죽음의 기운이 만연하며 <신체적-정신적-사회적 사망 사태>와 그 이후(After Death)의 변화된 세상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돼버린 것이다. 격변기를 지나면서 '과연 어떤 세상이 도래할 것인가'에 대한 전망도 중요하지만 '과연 어떤 시대(Era)가 저물어 가는가'에 대한 질문 역시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기는 서양사의 분류법에 따르면 '근·현대'라고 명명할 수 있고 그 이전에는 '중세'가 지속하고 있었다는 정설을 모두 알고 있다. 각 시대에는 세상을 지배하는 정신, 혹은 가치가 공기처럼 퍼져 있으며 후대에 이를 정리해서 개념화하고 역사의 교훈을 얻으려고 한다. 중세를 지배하던 정신적 가치는(물론 서양의 역사이지만) <절대 신의 뜻(섭리)> 라고 말할 수 있으며 천 년이란 시간 동안 켜켜이 쌓인 부작용들에 대한 반동으로 <인간의 자유(의지)>가 아니었을까? 정신적으로 종교 혁명이 코로나바이러스처럼 유럽을 뒤덮었고 활자의 발명을 필두로 한 과학 기술의 산업 혁명을 통해 인간이 이성 理性을 대면하게 되면서 신은 점점 인간에게서 언택트(Untact)한 존재가 되었다. 신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인간은 이제 부모에게서 독립한 자식처럼 세상에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껏 자유를 만끽하며 잠재적인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기계를 발명하고 공장을 세우고 도시를 이루며 시장 market에서 자신이 보유한 가치와 타인의 그것을 교환하며 경제 활동을 이어나가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진 인간은 여세를 몰아 이성의 힘을 빌려 의료와 교육 체계를 발전시키며 더 오래 살고 더 보람있게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이성이 인간을 미개한 동굴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등불이 될 수는 있어도 야만적인 욕망의 늪에서 구출해 주는 밧줄이 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 말이다. 자유시장 경제주의는 엄격한 아버지와 같은 절대 신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애로운 어머니와 같은 자연이 지니고 있는 자원을 마음껏 끌어다가 상상을 초월한 물질적 풍요로움을 창출했다. 하지만 내면에 숨길 수 없이 자리 잡고 있는 탐욕으로 인해 빈익빈 부익부의 정의롭지 못한 결과를 초래했고 자원을 제공하는 자연마저 훼손하며 점점 파멸을 향한 기차에 올라타는 위험을 자초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서사의 어쩌면 마지막 종착역이 될 수도 있는 결말이 바로 코로나 사태가 아닐까? 중세의 시작을 생각해 보면 거기에 자애로움과 희생과 헌신이라는 귀하고 값진 가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천 년이란 시간이 흐르면서 물이 고여 썩듯이 그 가치가 점점 인간을 위협하고 착취하는 괴물로 변질하였으며 인간은 그에 저항하여 새로운 가치를 세워 역사를 이끌어 왔다. 이제 신성불가침의 인간의 당당한 자유 의지와 정의로운 평등 의식,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교환 가치 등이 예전의 괴물의 자식처럼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는가. 앞으로 우리는 무한 리필처럼 제공되던 자유가 상당 부분 제한되기도 하고 공익을 위해 어느 정도 불평등한 조치가 취해지는 현상들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언제 어디서든 자유롭게 왕래하며(물론 돈이 있다면) 물자와 서비스를 교환하며 부를 축적하는 행위들도 고장이 난 기계처럼 원활하지 못한 채 버벅거리는 일들도 겪게 될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는 무척이나 강하고 질겨서 현재로서는 아직 확실한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앞으로 또 얼마나 그에 못지않은 아니 더욱 강력한 무엇인가가 인간이 만든 질서를 무너뜨리기 위해 창궐할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는 예전에 중세를 넘어 근현대의 시대를 열었고 가까이 보면 두 번의 세계 대전을 지나며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며 한 단계 높은 가치를 생산해 낸 사실이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인간이 지닌 이성의 힘을 믿지만 같은 인간이 지닌 탐욕의 위력을 거부한다.아울러 엄청난 혼돈이 주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또한 그걸 딛고 다시 새로운 길을 만들어 냈던 역사를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은 나에게 기원전이 끝나고 기원후(After Desire)가 열리는 세상이 아닐까 한다.
길고 긴 장마가 끝나고
길고 긴 장마가 끝나고
길고도 지루했던 장마가 마침내 소멸했다.이번 장마는 무려 54일 동안 지속했고 역대 최장 기간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장마 기간이 길어진 이유는 기후변화에 따른 결과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기상청 통보관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동시베리아 쪽의 불균질한 기온 상승으로 해당 지역에 공기덩어리가 생겨 공기 흐름을 방해하고 있다. 이로 인해 공기의 흐름이 바뀌어 북극 쪽의 선선한 공기가 한반도로 내려왔다”라고 말했다. 이어 “이렇게 내려온 공기 때문에 장마전선이 북쪽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한반도에 정체돼 장마가 길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서 동시베리아 쪽의 기온이 불균질하게 상승한 이유는 바로 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한반도 북쪽의 차가운 공기가 위로 올라가야 하는데 정체되어 버티고 있으니 남태평양 고기압이 위로 올라가지 못한 채 애꿎은 비만 줄기차게 뿌려대고 말았다. 이러한 연관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기후위기 전북비상행동’이라는 곳에서는 ‘#이_비의_이름은_장마가_아니라_기후위기입니다’라는 문구를 담은 이미지를 SNS 등 온라인에 올리며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지겨운 장마의 원인도 환경의 파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면 끔찍한 장마의 피해 역시 인간의 욕심이 부른 인재(人災)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서울여대 생명환경공학과 이창석 교수의 기고 기사인 <장마 피해는 훼손된 '국토 생태계의 민낯'>를 읽다 보면 정말 많은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산에서 흘러내리기 시작한 빗물이 계곡을 거쳐 도심의 토양과 하수구를 지나 강으로 유입되어 바다로 흘러나가기까지 국토의 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자행된 수많은 장애물을 지나야 하는 과정이 눈물겹다.(http://m.ecomedia.co.kr/news/newsview.php?ncode=1065572829766212) 태양광 발전이나 4대강 사업이 이번 장마 피해와 어떤 연관성을 놓고 여·야가 공방을 벌이는 모습을 보면서 전문가들의 명확한 검증을 통해 행정 기관에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여 시행하기를 촉구하고 싶다. 정치라는 영역이 권력 투쟁의 전쟁터가 아니라 사회 각계각층 간 갈등을 풀어내는 예술이라는 전제하에 정치가들이 본연의 모습에 충실한 태도로 사태의 해결에 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는 뜻이다. 아울러 골프장을 비롯한 각종 국토 레저 시설의 설립과 관리에 더욱 합리적인 예산과 인력을 투입하여 환경을 파괴하는 행위가 아니라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행정을 이룩하길 바란다. 나 자신을 포함하여 우리는 모두 열심히 일하고 편안하게 쉬면서 즐길 권리가 있음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라는 어느 영화의 명대사처럼 혹시 내가 누리는 즐거움으로 인하여 힘없고 약한 사람들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염두에 두는 자세가 더 멋진 일일 것이다. 지금까지 주절주절 어찌 보면 식상하고 뻔한 이야기를 지루한 장맛비처럼 늘어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민망함에 조금 부끄럽기도 하다. 필자가 얘기하고 싶었던 것은 결국 '문명(文明)이라는 것을 피할 수 없다면 정말 지혜롭게 이뤄나가야 한다'라는 메시지이다. 걸어서 다니기에 불편했던 인간은 가축을 타고 이동하다가 바퀴가 달린 탈 것을 발명하고 기계를 이용하여 자동차까지 만들어 내는 쾌거를 이룩했다. 이 엄연한 문명의 발전이라는 역사를 부정하고 다시 과거로 회귀하자는 주장은 공허한 외침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자동차를 만들면서 그저 빨리 가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가속기만 달아 놓고 브레이크를 설치하지 않았다면 어처구니없는 일이라고 비웃을 것이 틀림없다. 인간은 더욱 편리하고 쾌적한 환경을 인공적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을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저 혼자만 잘 먹고 잘살기 위해 타인과 환경을 파괴하며 공멸해서는 안 된다는 자각을 지닌 존재이다. 그것은 마치 온난전선과 한랭전선이 만나 장마를 만들어 비를 내리는 것과 같이 욕망과 이성이 서로 부딪히며 역사의 발전을 이뤄내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장마가 그동안 질서를 이뤘던 공기가 만드는 힘의 균형이 무너지며 예기치 못했던 결과를 초래한 사실을 거울삼아, 우리도 혹시 어느 한 편으로 치우쳐 맹목적으로 달려가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기를 기대해 본다.
소설보다 소설 같은 시대, 소설 쓰시네!
소설보다 소설 같은 시대, 소설 쓰시네!
소설을 하나 쓴다고 생각해 보자. 소설 속 주인공은 엄마와 중학생 아들이며 배경은 아들이 공부는 안 하고 나쁜 짓만 하고 다녀서 엄마의 속을 썩이고 있는 상황이다. 어느 날 아들 녀석이 술을 진탕 처먹고 새벽에 집으로 기어들어 오다가 거실에서 잠 못 자며 기다리던 엄마에게 딱 걸리고 말았다. 인사불성이 되어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아들내미의 꼴을 보다 못한 엄마가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이 망할 놈의 자식, 애미가 제 명에 못 살겠으니 나가서 죽어 버려!" 분을 참지 못한 엄마는 고함을 치고 나서 그만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고 놀란 아들이 구급대원을 불러 실신한 엄마를 병원으로 실어 날랐다. 병상에 누워 잠든 엄마의 모습을 지켜보던 아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참회의 감정이 북받쳐 오르더니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병실을 떠났다. 지금까지 자신이 저질렀던 불효막심한 언행들이 떠오르며 자책감에 괴로워하던 아들은 엄마가 자신에게 바랐던 염원대로 한강으로 가서 투신하여 그만 뒈져버리고 말았다. 이 황당무계한 결말의 소설은 비극인가, 아니면 희극인가?나는 조심스럽게 '총체적 난극'이라고 칭하고 싶을 뿐이다. 앞서 '난국'이란 표현 대신에 '난극'이라고 의도적으로 표기한 이유는 일종의 수사법(레토릭)이라고 이해해 주시길 바란다. 앞서 희'극'과 비'극'이란 단어가 나왔으니 재미와 의미를 포섭하기 위해 이미 있던 용어인 (총체적) ‘난국’을 ‘난극’ 비틀어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강조하려고 하는 글쟁이의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가와 같이 글 짓는 일을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이들은 목수가 나무를 가지고 작업을 하듯 요리사가 물과 불로 음식을 만들듯 언어를 가지고 논다. '가지고 논다'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글을 짓는 데 있어서 흑백논리 같은 편협한 사고에서 벗어나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는 점을 일깨워주는 소명이 있다는 뜻이다. 소설에서 작가적 상상력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독자들이 그 상상력의 날개에 올라타서 새로운 세상을 구경하고 경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이란 장르는 팩트를 공정하게 전달하는 기자들의 뉴스 기사와 다르고 내각의 책임자인 장관과 민의를 대표하는 국회의원들이 국정감사에서 질의와 응답을 하는 논쟁과도 다른 것이다. 지난주에 법무부 장관을 불러다 놓고 법사위원 중 한 명이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는데 듣다 못한 장관이 "소설 쓰시네"라며 일침을 놓았다. 장관으로선 있지도 않은 사실을 끌어다가 논증의 근거로 삼으려는 질의자의 태도가 심히 못마땅했을 터이고 국회의원의 처지에선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답변자의 태도에 발끈할 수도 있었다고 본다. 여기까지야 지금껏 늘상 봐왔던 국정감사장의 인신공격성 감정싸움의 흔한 풍경이었는데 느닷없이 소설가 협회에서 성명을 발표하면서 희극인지 비극인지 모를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협회는 "한 나라 법무부 장관이 소설을 '거짓말 나부랭이' 정도로 취급하는 현실 앞에서 ‘문학을 융성시키는 일은 참 험난하겠다는 생각을 했다’라며 자신들이 상처를 입었다"라고 주장했다. 많은 사람이 이 성명을 전해 듣고 씁쓸한 기분이 들며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왜냐하면 '소설(을) 쓰다'라는 수사적 표현은 이미 언중들에게 '지어내 말하거나 거짓말을 하다'라는 뜻으로 통용이 되어 굳어져서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도 관용구로 등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지의 소치라고 한다면 부끄러운 일이고 피해 의식의 산물이라고 한다면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언어를 가지고 즐겁게 놀아야 할 사람들이 뭔가 모를 덫에 걸려 상상력이 거세되고 창작자로서 지녀야 할 마음의 여유마저 상실한 듯하여 보는 입장에서 짠하기도 하고 서글퍼지기도 했다. 그건 마치 이 글의 첫 부분에서 인용한 이야기에 나오는 '비장한 마음을 지닌 채 한강으로 투신해 버린 아들 녀석'을 바라보는 독자의 소감과도 같은 느낌이라고 말하고 싶다. 동시대의 희로애락을 다루며 대중들과 함께 호흡하며 존경과 사랑을 받던 소설이란 문학 장르가 점점 과거의 명성과 지위를 잃고 뒷방 늙은이처럼 쭈글쭈글해지는 현상을 목도하게 된다. TV와 영화가 등장하며 자리를 내주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디지털 미디어의 영상 콘텐츠 등에 영향력을 뺏기면서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취미란에 <독서>라고 기재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사흘을 3일이 아닌 4일이라고 착각하는 언중들은 A4 한 장도 안 되는 길이의 텍스트를 스마트폰 기기에서 읽어 내리는 일도 버겁고 거추장스럽게 여기게 되었다. 그뿐인가, 없는 일을 있는 것처럼 그럴듯하게 꾸며서 흥미를 자극하는 상상력으로 치자면 소위 말하는 '기레기'들께서 그 능력과 소양을 마음껏 유감없이 발휘하는 현상도 어렵지 않게 보게 된다. 자본이 언어를 대신해서 최고의 권력으로 군림하는 시대에서 <한국고용정보원>이 발표한 '한국에서 가장 소득이 낮은 직업' 9위에 속한 소설가들은 이제 자부심도 함께 바닥으로 처박히게 된 것일까? 법무부 장관의 발언에 "놀라움을 넘어 자괴감을 느낀다"라느니,"소설가들의 인격을 짓밟는 행위"라는 듣기 민망하고 옹색한 논평 대신에 "장관님께서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요즘은 기자들께서 소설가들보다 더 실감 나게 이야기를 잘 만드시고 계시니 다음부터는 차라리 '기사 쓰시네~'라는 표현으로 바꿔 보시는 게 좋겠다“라는 자신만만한 레토릭으로 받아칠 수는 없었을까? 천박하고 졸렬함이 넘실대며 우리들의 언어를 훼손하고 손상시키는 세태에 맞서 통렬한 한 방을 먹이는 여유 따위는 이제 문단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사치가 돼버린 것일까? 소설을 좋아하고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정신 못 차리고 방황하며 일탈하는 아들 녀석을 바라보는 엄마의 심정으로 한마디 하고 싶을 따름이다. "괜히 무게 잡고 그 자리에 계시지 말고, 그냥 조용히 물러나 어디 가서 묫자리 알아보시라"라고. (그렇다고 진짜로 어디 가서 뒈지지는 마시고)
애도, Make your choice!
애도, Make your choice!
서울 시장이 죽었다. 자연사가 아닌 급작스러운 자살 뉴스에 시민들은 혼란과 당혹감에 빠지고 말았다. 수년 동안 지속해서 성추행을 당했다며 경찰에 고소한 피해자가 있었기에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망자를 두둔하려는 측과 비난하려는 측이 서로 팽팽하게 대립하며 설전을 벌이고 있다. 개인의 죽음 앞에서 그의 정치적 과업에 대한 평가와 애도를 표하는 방식이 극명하게 갈리고 있는 지금, 나는 과연 어떤 식으로 입장표명을 해야 할지 난감하다. 여권의 대선주자라고 하는데 나는 그를 후보로서 선호하거나 지지하는 편은 아니다. 서울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2년 전인 지난 지방 선거에서 그에게 비록 한 표를 행사했지만, 그건 내가 지지하는 정당의 대표로 그가 출마했기 때문이었다. 조금 길게 보자면 지난 2016년 겨울, 적폐 청산을 위한 대통령 탄핵 집회에서 길거리 연설을 하는 그를 직접 지켜본 적이 있었다. 당시 대중 연설에는 능하지 못해 보이는 그의 모습 때문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조금 안쓰러운 느낌마저 받았다. 그가 서울 시장의 자리에서 단호하게 시민의 편에 서서 광장을 열어주고 화장실 등 편의 시설을 개방해 준 덕분에 기본적인 호감과 감사를 지니고 있었지만 말이다. '시민운동 1세대'로 시민 단체의 전성시대를 주도하며 이 땅의 풀뿌리 민주화의 초석을 다졌다는 평가나, '권인숙 성고문 사건'을 비롯해 인권(특히 여성 인권)을 수호하는 인권 변호사의 면모들은 그저 말로만 전해들은 이야기라서 피부에 와서 닿는 감흥이 나에겐 없다. 그렇다고 해서 고인이 위선적인 모습으로 피해 여성을 괴롭히며 가해를 가했다는 주장에도 선뜻 허탈감이나 배신감에 치를 떨고 싶은 마음도 일어나지 않는다. 사건은 이제 막 고소 접수가 되었고 향후 법정 공방을 통해 실제로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진위가 가려질 것이기에 비난해야 한다면 그 이후로 보류하며 지켜보고 싶을 따름이다. 굳이 사법절차가 아니더라도 사안의 중대성을 고려하면 이후 어떤 형태로든지 진실을 밝히기 위한 행위들이 멈추지 않고 지속될 것으로 생각한다. 결국 세간의 설왕설래에 휘둘리지 않고 내 안의 심정을 바탕으로 조촐하게 망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면 되는 일인데 왜 이리 마음 한편이 찜찜하고 불편한 기분이 드는 것일까? 그건 바로 세간에서 떠들어 대는 사람들의 세 치 혀가 칼날과도 같은 비수가 되어 허공으로 날아가 누군가의 가슴에 꽂히는 일들을 목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극 영화 등에 보면 전쟁터에서 양국이 대치하며 진을 펴고 있다가 화살이며 화염 포며 총을 난사하며 아수라장이 펼쳐지는 장면을 보게 된다. 시대가 바뀌면서 전쟁터는 이제 온라인으로 장소가 바뀌었고 그곳에서 원색적인 비난과 협박과 근거 없는 흑색선전과 가짜 뉴스들이 판을 치고 있다. 그냥 온라인 게임처럼 킬링타임용으로 즐기다가 로그아웃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좋을 텐데 마치 실제로 길거리에서 치고받는 폭력 행위처럼 사람들이 서로 상처를 받는다. 그 꼴이 보기 싫다고 하여 외면하면 그만일 텐데 사람들과 더불어 숨 쉬며 살아가는 세상이라 그럴 수도 없고 이제 더는 '정.알.못'이나 '정치 혐오론자'로 살지는 않기로 결심했기에 그마저도 길이 막혔다. 누구도 내게 견해를 밝히라고 강요하지는 않지만 내 안에서 올라오는 음성이 '그래도 뭔가 네 의견을 말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압박을 가하는 듯하여 가슴이 답답하기까지 하다. 그 음성을 번역해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명령과도 같은 말이다. "Make your choice!" (선택을 하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도 모르게 그만 피식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이 유명한 대사는 헐리웃 영화 등에서 악당들이 자주 하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다리를 갖고 뭍으로 나가고 싶다는 인어공주에게 바다의 악녀 '우르줄라' Ursula가 목소리를 담보로 계약을 하자며 밀어붙였던 말이고 ‘배트맨, 다크 나이트’에서 희대의 악당 조커가 시민이 탄 배와 죄수들이 탄 배에 각각 폭탄을 설치하고 상대방의 배를 먼저 폭파하지 않으면 모두 죽을 것이라고 협박을 하며 강요했던 전략이기도 했다. 멀리 보자면, 예수라는 사내가 광야에서 40일 동안의 금식을 통해 자신에게 부여된 신의 소명을 인식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사탄이 찾아와 그의 귓속에 속삭였던 말도 결국은 '(나에게 무릎을 꿇고 세상의 권세를 얻을지 말지를) 선택하라!'였다. 필자는 최근에 지방 출장 공연을 업으로 삼고 있는 음악 밴드의 리더로부터 아주 기묘한 애도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 들을 수 있었다. 시골 어느 마을에 노인대학 졸업식이 있었고 인구가 거의 없는 그곳에서 일 년 중 가장 성대한(?) 졸업식 행사가 기획되어 그 밴드는 초청 공연을 의뢰받아 새벽부터 세 시간 넘게 운전을 해서 내려갔다고 한다. 그런데 하필 행사 당일 아침에 노인대학 수료생 중 한 분이셨던 할머니께서 집 앞 노천에서 변사체로 발견되는 바람에 마음에 도착하니 분위기가 뒤숭숭한 상황이었다. 자연 사고사인지 타살인지 밝히려는 경찰의 탐문 수사에 협조하기 위해 마을 회관에 모여 계시던 노인들은 착잡하기 이를 데 없는 무거운 분위기에서 수군수군하며 심경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말소리가 점점 커지고 다들 자신들의 생각을 거침없이 쏟아지게 되면서 갑자기 어느 한 분께서 기가 막힌 멘트를 날리시고 말았다. "아니 그 할망구는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니고 왜 하필이면 오늘 뒈지고 말았데?" 그 말을 듣고 있던 밴드의 리더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어서 그저 헛기침만 하고 말았다면서 그때의 난감한 심정을 담담하게 들려주는 것이었다. 결국 마을 이장님께서 멀리서 손님을 부른 마당에 행사를 취소할 수는 없으니 당일 행사는 예정대로 진행하고 다음 날 아침에 상가에 문상하러 가는 것으로 결론을 내려서 밴드는 행사비를 받고 귀경했다는 말과 함께. "저는 그분들의 마음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어요. 이번 행사가 취소되면 내년을 기약해야 하는데 그때에는 거기 모이신 분 중에 어느 한 분도 확실하게 살아계실 거란 보장이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그분들은 그날 흥겹게 노래하고 춤추며 놀았고 아마 다음날엔 상갓집에 가셔서 진심으로 고인의 명복을 빌며 애통해하셨을 게 틀림없습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흑백 논리로 무장하고 적인지 아군인지 태도를 분명하게 밝히기 어려운 일도 벌어지게 마련이다. 사람은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서울 시장의 자리에서 돌연 불의의 객이 된 고인에게 어떤 자세로 애도를 표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나는 차라리 어느 한 편에 서서 애도의 행렬에 참여하는 대신에 애도하는 일을 멈추고 그저 그 행렬의 끝에 어떤 묘지가 나타나는지, 그리고 그 무덤의 묘비명에 어떤 말들이 새겨지는지 마지막까지 지켜보며 그에 맞춰 고인에 대한 예의를 갖추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