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쾌대의 시류난마 주요 뉴스

가을 저녁(밤) 秋夕, 제례(祭禮)가 아닌 차례(茶禮)로...
가을 저녁(밤) 秋夕, 제례(祭禮)가 아닌 차례(茶禮)로...
며칠 후면 추석 秋夕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가 한가위 둥근 달에까지 전염되어 올해 달빛은 왠지 나이 드신 부모님의 병색이 완연한 낯빛처럼 안쓰럽고 안타까울 것만 같다. 추석을 문자 그대로 풀면 '가을 저녁(밤)'인데 참으로 운치가 느껴지는 말이다. 한가위 밝은 달이 휘영청 뜨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명절로 삼아 기념을 했을까? 다들 저녁밥 차려 먹고 밖으로 나왔을 것이고 한 해 농사를 끝냈으니 한시름 놓게 된 마음은 꽉 찬 달만큼이나 여유와 안도감으로 차고도 넘쳤을 것이다. 농사를 혼자서 지은 게 아닐 터이니 모내기부터 김매기를 거쳐 추수까지 함께 더불어 작업을 했던 마을 사람들은 기쁨을 나누기에 더할 나위 없는 동료들이었을 것이다. 힘든 일을 같이해 본 사람들은 알게 된다. 그 일을 하는 동안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위안이 되고 격려가 되는지를…. 하늘엔 밝은 달이 떠 있고, 땅에서는 사람들이 서로서로 손을 잡고 강강술래를 돌며 술을 나눠 마시고, 음식을 같이 나누고, 서로에게 고마운 마음을 아낌없이 한데 모았을 것이다. 추석은 그래서 진정한 대동단결의 한마당이다. 생산 시스템이 협업을 기초로 하는 농업구조에서 이러한 축제는 강력한 에너지를 가지고 개인들을 결속시켜 다시 생산성 확장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만들었을 것이다. 기계 문명의 산업화를 거쳐 디지털이 주도하는 정보화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은 자신의 스마트폰을 영토 삼아 랜선을 통해 타인과의 제휴와 협력을 이루며 살고 있지만 점점 고립되며 고독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추석에는 또한 차례(茶禮)를 지낸다. 조상신을 받드는 제례(祭禮)와는 다른 성격의 의식(儀式)이다. 문자에서도 드러나듯이 원래 온갖 음식들 다 상에 올려 거창하게 준비하는 의식이 아니라 차 한잔 따르고 부담 없이 고인을 추념하거나 불가에서처럼 앞에 앉아 마주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절차가 니었을까? 집 안에 위패라도 있고 사당이라도 갖춘 집이라면 시시때때로 차를 올리고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처럼 간단히 고개 숙여 선조들의 정신과 업적을 복기하며 그 뜻을 새겼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서민들은 비싼 차를 마련할 돈이 없어서 숭늉 한 그릇 혹은 조촐한 박주(薄酒) 한 사발 올려놓고 그리했을지도 모른다. 간단히 말해서 차 한잔 올려놓고 죽은 자에게든 산 자에게든 예를 갖췄다는 것이고 그렇게 한 까닭은 배우겠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어떻게 살아야 하고 또한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물었을 것이다. 찻잔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호호 불어가며 또렷한 시야를 확보하고, 찻그릇에서 배어 나오는 다향(茶香)을 음미하며 인생의 향기를 지니길 소망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차례는 그래서 깨달음의 예식이다. 후대로 넘어오면서 사대부 집안이 가문의 위엄을 자랑하기 위해 산해진미를 갖추고 으스대기 위한 향연으로 본질이 바뀌게 된 것이라면, 그리고 그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양반을 동경하던 서민들이 빚을 내서라도 따라 하겠다고 가랑이 찢어지는 줄 모르고 허례허식에 빠지고 말았다면, 향기로운 차가 그 맛을 잃고 변질한 것만큼이나 안타까운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를 지나고 있는 오늘날에도 우리는 여전히 추석에는 차례를 지내고 있다. 하지만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를 거쳐 정보화 사회로 들어가고 있는 지금, 우리 주변에는 명절인데도 대동단결할 동료가 없다. 농사를 지을 때 가장 최소한의 노동 단위이자 가장 믿을 수 있는 집단이었던 가족마저도 해체되고 말았다. 이제는 1인 가구가 전체 가구의 27.2%(520만 3,000가구/1,956만 가구)를 차지하며 1위를 차지하면서 이제는 가족도 곁에 없는 시대이다. 또한 따뜻한 차 한잔 앞에 두고 지혜를 구하기는커녕 바쁜 아침 출근길에 아메리카노 한 잔으로 졸린 눈과 지친 몸을 추스르며 허겁지겁 어디론가 자신도 모르는 곳으로 달려가기에 바쁜 시대이다. (모처럼의 연휴를 맞아 자기를 돌아보며 성찰할 시간도 없이 막히는 고속도로에서 밀려오는 짜증과 졸음에 고함치지 않는 게 다행인 시절인데, 올해는 그마저도 막히고야 말았으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오늘 하늘에 걸린 달은 어떻게 보면 참 공허하고 을씨년스럽기도 하다. 컴퓨터 바탕에 깔린 스크린 세이버의 화면처럼 생명력도 없고 바람도 안 불고 귀뚜라미 소리도 안 들리고 현실보다 더 화려해 보이지만 정감은 하나도 안 느껴지는 그런 가을밤의 풍경이다. 명절은 뜻깊은 무엇인가를 기념하는 날이라고 하는데 코로나 시대를 지나며 답답하고 불안한 하루하루를 지나고 있는 지금, 우리가 기념해야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내일은 집 앞 공원에라도 나가 좀 걸으면서 곰곰이 생각을 해봐야겠다.
새로운 기원 전(BC, Before Corona)과 기원 후
새로운 기원 전(BC, Before Corona)과 기원 후
한때 유머 게시판에 올라왔던 글이 하나 있다. 미국 초등학교 시험에 B.C와 A.D의 약자를 물어보는 문제가 출제됐는데 한 학생이 B.C는 Before Christ라고 쉽게 답을 적었지만 A.D는 도저히 정답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을 거듭하던 그 아이가 적은 최종 답변은 'After Death'(그리스도의 죽음 이후)였다고 한다. (정답은 라틴어 Anno Domini, 영어 번역은 In the year of the Lord로 그리스도의 해(年) 정도가 되겠다) 구세주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사건을 기준으로 그 전과 후가 나뉘어 시대가 구분되었듯이 이제 코로나바이러스가 인류를 위협하며 새로운 시대의 기원이 열리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미 많은 사람이 질병에 걸려 사망하거나 병상에 누워 사투를 벌이고 있고 우리는 자신도 혹시 확진되지 않을까 두려움에 사로잡혀 지내고 있다. 어제 정부가 발표한 사회적 거리 두기 단계도 '2.5 수위'로 격상되면서 홍수가 넘실거리며 언제 범람할지 모르는 제방의 처지 마냥 우리는 불안감과 무력감마저 느끼고 있기도 하다. 그야말로 곳곳에 죽음의 기운이 만연하며 <신체적-정신적-사회적 사망 사태>와 그 이후(After Death)의 변화된 세상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돼버린 것이다. 격변기를 지나면서 '과연 어떤 세상이 도래할 것인가'에 대한 전망도 중요하지만 '과연 어떤 시대(Era)가 저물어 가는가'에 대한 질문 역시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기는 서양사의 분류법에 따르면 '근·현대'라고 명명할 수 있고 그 이전에는 '중세'가 지속하고 있었다는 정설을 모두 알고 있다. 각 시대에는 세상을 지배하는 정신, 혹은 가치가 공기처럼 퍼져 있으며 후대에 이를 정리해서 개념화하고 역사의 교훈을 얻으려고 한다. 중세를 지배하던 정신적 가치는(물론 서양의 역사이지만) <절대 신의 뜻(섭리)> 라고 말할 수 있으며 천 년이란 시간 동안 켜켜이 쌓인 부작용들에 대한 반동으로 <인간의 자유(의지)>가 아니었을까? 정신적으로 종교 혁명이 코로나바이러스처럼 유럽을 뒤덮었고 활자의 발명을 필두로 한 과학 기술의 산업 혁명을 통해 인간이 이성 理性을 대면하게 되면서 신은 점점 인간에게서 언택트(Untact)한 존재가 되었다. 신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인간은 이제 부모에게서 독립한 자식처럼 세상에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껏 자유를 만끽하며 잠재적인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기계를 발명하고 공장을 세우고 도시를 이루며 시장 market에서 자신이 보유한 가치와 타인의 그것을 교환하며 경제 활동을 이어나가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진 인간은 여세를 몰아 이성의 힘을 빌려 의료와 교육 체계를 발전시키며 더 오래 살고 더 보람있게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이성이 인간을 미개한 동굴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등불이 될 수는 있어도 야만적인 욕망의 늪에서 구출해 주는 밧줄이 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 말이다. 자유시장 경제주의는 엄격한 아버지와 같은 절대 신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애로운 어머니와 같은 자연이 지니고 있는 자원을 마음껏 끌어다가 상상을 초월한 물질적 풍요로움을 창출했다. 하지만 내면에 숨길 수 없이 자리 잡고 있는 탐욕으로 인해 빈익빈 부익부의 정의롭지 못한 결과를 초래했고 자원을 제공하는 자연마저 훼손하며 점점 파멸을 향한 기차에 올라타는 위험을 자초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서사의 어쩌면 마지막 종착역이 될 수도 있는 결말이 바로 코로나 사태가 아닐까? 중세의 시작을 생각해 보면 거기에 자애로움과 희생과 헌신이라는 귀하고 값진 가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천 년이란 시간이 흐르면서 물이 고여 썩듯이 그 가치가 점점 인간을 위협하고 착취하는 괴물로 변질하였으며 인간은 그에 저항하여 새로운 가치를 세워 역사를 이끌어 왔다. 이제 신성불가침의 인간의 당당한 자유 의지와 정의로운 평등 의식,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교환 가치 등이 예전의 괴물의 자식처럼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는가. 앞으로 우리는 무한 리필처럼 제공되던 자유가 상당 부분 제한되기도 하고 공익을 위해 어느 정도 불평등한 조치가 취해지는 현상들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언제 어디서든 자유롭게 왕래하며(물론 돈이 있다면) 물자와 서비스를 교환하며 부를 축적하는 행위들도 고장이 난 기계처럼 원활하지 못한 채 버벅거리는 일들도 겪게 될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는 무척이나 강하고 질겨서 현재로서는 아직 확실한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앞으로 또 얼마나 그에 못지않은 아니 더욱 강력한 무엇인가가 인간이 만든 질서를 무너뜨리기 위해 창궐할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는 예전에 중세를 넘어 근현대의 시대를 열었고 가까이 보면 두 번의 세계 대전을 지나며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며 한 단계 높은 가치를 생산해 낸 사실이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인간이 지닌 이성의 힘을 믿지만 같은 인간이 지닌 탐욕의 위력을 거부한다.아울러 엄청난 혼돈이 주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또한 그걸 딛고 다시 새로운 길을 만들어 냈던 역사를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은 나에게 기원전이 끝나고 기원후(After Desire)가 열리는 세상이 아닐까 한다.
애도, Make your choice!
애도, Make your choice!
서울 시장이 죽었다. 자연사가 아닌 급작스러운 자살 뉴스에 시민들은 혼란과 당혹감에 빠지고 말았다. 수년 동안 지속해서 성추행을 당했다며 경찰에 고소한 피해자가 있었기에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망자를 두둔하려는 측과 비난하려는 측이 서로 팽팽하게 대립하며 설전을 벌이고 있다. 개인의 죽음 앞에서 그의 정치적 과업에 대한 평가와 애도를 표하는 방식이 극명하게 갈리고 있는 지금, 나는 과연 어떤 식으로 입장표명을 해야 할지 난감하다. 여권의 대선주자라고 하는데 나는 그를 후보로서 선호하거나 지지하는 편은 아니다. 서울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2년 전인 지난 지방 선거에서 그에게 비록 한 표를 행사했지만, 그건 내가 지지하는 정당의 대표로 그가 출마했기 때문이었다. 조금 길게 보자면 지난 2016년 겨울, 적폐 청산을 위한 대통령 탄핵 집회에서 길거리 연설을 하는 그를 직접 지켜본 적이 있었다. 당시 대중 연설에는 능하지 못해 보이는 그의 모습 때문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조금 안쓰러운 느낌마저 받았다. 그가 서울 시장의 자리에서 단호하게 시민의 편에 서서 광장을 열어주고 화장실 등 편의 시설을 개방해 준 덕분에 기본적인 호감과 감사를 지니고 있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