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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궁중음식(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의 혼과 맥을 잇다, 황혜성장인
조선왕조 궁중음식(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의 혼과 맥을 잇다, 황혜성장인
(사진:덕담 박승우) 조선왕조 궁중음식의 혼을 되살려낸 황혜성선생.평생을 바쳐 궁중음식의 전통과 맥을 이어온 장인이다. 황혜성(黃慧性 본관은 평해 1920.7.5~2006.12.14)선생은 1920년 충청남도 천안에서 태어났다. 황선생은 처음부터 궁중음식에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충청도에서 유일한 여성고등교육기관이었던 공주고녀를 나온 후 일본으로 유학해 후쿠오카시 지쿠시 여자고등학교(筑紫高等女学校, 현재의 지쿠시 여학원 중학교・고등학교)를 졸업한다. 이후 어머니의 배려로 교토여자전문학교(京都女子専門学校, 현재의 교토 여자 대학)의 가사과에서 일본 음식과 서구식 영양학을 공부했다. 5년간의 일본유학을 끝낸 후 귀국하여 2년간 대동고녀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중 서울의 숙명여전에서 가사과 전임강사 자리를 제의해 1941년 숙명여전에서 영양학을 강의하기 시작한다. 이때 숙명여전 학장이었던 오다(小田)씨의 제안으로 궁중음식을 처음 접하게 된다. 일제치하였지만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계비인 순정효황후 윤씨(1894-1966)가 궁인들과 거주하고 있어 아직 궁중의 법도가 남아 있던 창덕궁 낙선재로 찾아가 윤씨가 가장 아꼈다는 주방상궁, 한희순상궁을 찾아가 1972년까지 30년간 궁중음식에 대해 가르침을 받는다. 1970년 황혜성(왼쪽 첫번째)과 한희순(왼쪽 두번째) 등 윤황후를 마지막까지 모신 궁인들(사진: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한상궁은 고종에 이어 순종, 순종비 윤황후를 모신 조선과 대한제국의 마지막 주방상궁으로 임금이 평소에 드시던 수라상부터 잔치음식, 제사음식까지 모든 궁중음식 조리법을 섭렵한 분이었다. 황선생은 상궁마마님이라 부르며 궁중음식의 재료부터 꾸밈새, 간 맞춤, 관련 용어 등 전 과정을 수기로 공책에 기록했다. 한희순 상궁의 제자, 황혜성에 관한 신문기사 (1968년 3월 5일)(사진: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그런데 그 가르침이란 것이 체계적이지도, 글로 된 것이 아니라 그저 눈동냥으로 익히는 것이어서 고충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한다. 당시는 대부분 상궁들의 기억을 통해서만 요리법이 전수되었고 일제의 식민지 사관으로 음식에 대한 생활사의 보존 필요성도 느끼지 못할 때인데 황선생은 이 때부터 왕실 음식의 전통을 이어 가기 위해 정형화, 규범화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던 것 같다. 황혜성 친필노트(사진: 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황선생은 그 후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비법에만 만족하지 않고 장서각과 규장각 등을 돌아다니며 궁중음식에 관한 옛 기록들을 찾아내 손수 체계화시켜 간다. 그래서 탄생한 궁중요리 이론서 책이 1957년 발간된 ‘이조궁정요리통고’이다. 이조궁정요리통고는 구중궁궐 깊숙이 숨겨져 있던 궁중음식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한국 음식 문화역사에 큰 의미가 있었다. 책의 발간은 우리 요리가 학문의 한 분야로, 한국 음식 문화의 새로운 장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황선생은 생전에 "궁중음식은 한국 식문화의 정수"라는 말로 이 책의 의미를 두었다. 이조궁정요리통고(사진: 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1971년 드디어 궁중음식은 국가무형문화재 제 38호로 지정 받게 된다. 황선생이 1943년 처음 기록하기 시작한 지 근 30년간의 혼신의 노력을 한 결과이다. 궁중음식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자 궁중음식의 전승과 보존, 그리고 전수를 위해 황선생은 1971년 궁중음식연구원을 설립한다. 긍중음식연구원(전경) (사진:재단법인 궁중음식연구원) 궁중음식연구원은 창립 25년을 맞아 1996년 처음 궁중음식을 전수받았던 낙선재와, 한상궁의 사저가 안동 별궁과 가까운 곳인 창덕궁 옆 종로구 원서동 한옥으로 이전해 궁중음식 전수 교육과 전시 등 활발한 활동한다. 윤황후가 거처했던 창덕궁 낙선재에 복원된 조선왕조 수라상(2014년)(사진: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원행을묘정리의궤(1795)에 기록된혜경궁 홍씨의 회갑상차림 재현모습 (2017년)(사진: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황선생은 1972년 문화재관리국 식생할 분야 문화재 전문위원을 하며 궁중음식을 계량화하고 조리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또한 후학 양성을 위해 교수로도 재직하며 관련 문헌을 조사하고 연구해 궁중음식 문화에 대한 학문적 노력에도 힘을 쏟았다. 또한 미국, 일본, 프랑스, 필리핀, 대만 등지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조선궁중음식을 전시하고 강습해 우리 음식문화를 세계에 전파하는데도 노력한다. 황선생은 대중매체를 통한 한국 궁중요리 전도사로 친숙한 분이기도 하다. “집념을 가지고 발로 뛰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모든 것을 꾸준히 기록해 두어라”, “음식은 생명에 대한 존중이다” 라고 강조한 황혜성선생. 그의 손길에서 사라진 조선왕조의 궁중음식은 영원한 한국의 위대한 살아있는 문화유산으로 남을 수 있었다. 한상궁에서 황선생으로 계보를 이어가던 무형문화재 38호 조선왕조 궁중음식 문화는 안타깝게도 2006년 12월 14일 오후 12시30분 서울의료원에서 향년 86세로 선생이 작고하면서 막을 내린다.황선생은 사후를 대비, 궁중음식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자녀들을 같은 길로 이끌어 그 맥을 이어 나가고 있다. 장녀 한복려씨가 무형문화재 궁중음식 기능 보유자로, 둘째 한복선씨, 셋째 한복진씨가 전수자로 대를 잇고 있다. (‘지화자’라는 궁중음식 한정식 음식점 운영) 황혜성선생은 숙명여자대학교, 한양대학교, 명지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였고, 성균관대학교 가정대 학장을 역임했으며 주요 저서로 1957년 스승인 한희순과 공동으로 저작한 ‘이조궁정요리통고’를 시작으로 10권의 궁중음식과 전통음식 전문서적과 다수의 논문을 남겼다. 저술‘이조궁정요리통고 (李朝宮廷料理通考)’ (1957년)‘한국요리백과사전’’한국의 미각’ (1976년)‘한국의 요리’ (1982년)‘한국음식’ ‘전통의 맛’ (1985년)‘한국의 식(韓國의 食)’ (1987년)‘한국의 전통 음식’ (1989)‘조선왕조 궁중 음식’ (1993)‘한국음식 대관-6권 궁중의 식생활’ (1997년)‘우리 음식 백 가지’( 1998년) 등 상훈대한민국 교육훈장 목련장 (1985년)문화훈장 보관장 (1990)
국가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 기능보유자, 이봉주(1926~)
국가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 기능보유자, 이봉주(1926~)
(유튜브 캡쳐) 1926년에 평북 정주군 덕언면 납청에서 출생인 이봉주선생은. 작업 도중 튄 불똥에 시력을 잃어 한쪽 눈을 쓰지 못하지만 그의 메질은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1948년 월남한 이후 지금까지 방짜유기와 더불어 살아온 선생은 고집스럽게 놋그릇의 전통 맹맥을 지키고 있는데 무형의 전통이 결코 저절로 이어져 오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산 증인이다. 유기의 생명은 금속과 불, 이 두 가지 인연이 오늘날 선생을 있게 했다.고향인 납청에선 정작 방짜유기 제작 기술을 배울 기회가 없었고 해방 후 22세 때인 1948년에 월남하여 서울 용산구 후암동에서 납청 방짜유기 공장을 크게 하던 탁창여 선생과의 인연으로 방짜 유기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선생은 탁창여 선생의 은혜를 기리고자 지금도 문경에 있는 선생의 공방, 납청방짜유기촌 마당 가운데에는 탁 선생의 공적비가 서 있다. 문경 납청방짜유기촌에는 모두 납청출신의 유기 장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1957년 구로동에 자신이 직접 ‘평부양대유기공장’을 설립하여 대장겸 점주 그리고 경영까지 하여 생산 기술자인 동시에 판매자까지 겸하게 되었다. 그러나 1950년대 말부터 생활문화가 변하면서 연탄을 집집마다 사용하게 되자 연탄가스에 쉽게 변색되는 유기는 심한 타격을 받게 된다. 계속되는 불경기로 선생의 공장도 문을 닫고 노동일을 하며 방황생활을 하다 1960년말 공방을 새로 시작한다. 1978년 경기도 안양 박달동에 진유공사를 세워 다시 양대유기를 제작했다. 1982년 전승공예대전에서 문화공보부장관상을 수상하고 1983년에는 국가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의 방짜유기 부문의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경북 문경에 ‘납청방짜유기 전수관’을 짓고 후진양성과 작품활동에 정진하고 있다. 지역 주민들과 함께 이곳을 유기마을로 키워가고 있다. 선생이 만든 대징은 직경 160cm, 무게 98kg의 세계 최대의 크기로 기네스북에도 올라 있다. 납청유기는 조시 부시 미국 대통령 방한 때 청와대 만찬에 사용되기도 했으며 세계 최대 타악기 회사인 질리안에 의해 그 기술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선생의 아들 이형근이 전수교육조교로 활동하며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유기장이란?놋쇠로 각종 기물을 만드는 기술을 가진 장인을 말한다. 우리나라 유기의 역사는 청동기시대부터 시작되었는데 이 시기는 인류 역사에 있어 최초로 합금술이 발명된 때이다. 신라시대에는 유기를 만드는 국가 전문기관인 “철유전(鐵鍮典)”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더욱 발달하여 얇고 광택이 아름다운 유기를 만들었으며 품질도 우수해 신라동(新羅銅), 고려동(高麗銅)이라 불리며 수출하였다. 유기는 제작기법에 따라 방짜와 주물, 반방짜 등으로 나뉘는데 가장 질이 좋은 것으로 알려진 방짜유기는 일명 양반쇠라고도 하며 북한의 납청유기가 가장 유명하다. 질 좋은 놋쇠는 전통적인 유기제작 방법인 방짜(方字)기법으로 제작했는데 이는 동(銅)과 석(錫)을 정확한 비율로 합금하여 두드려서 만드는 놋제품이다. 이 방짜유기는 금속조직을 늘여서 만드는 것이라 떨어뜨려도 찌그러질 뿐 깨지지 않아서 사람들이 매우 선호했다. 그러나 조선조 중엽에 이르러 수요가 늘어나자 손으로 두드려서 만드는 방짜기법 대신 손쉬운 주물기법으로도 제작하게 되었다. 주물유기는 방짜유기의 합금과는 달리 구리와 아연의 합금인 황동이나 기타 잡금속을 섞어 녹인 금속을 주형에 부어 대량으로 생산해낸 것이다. 정확한 합금비율로 만든 전통적인 방짜유기와 주물유기는 성분이 다소 다르지만 잡주물로 만든 유기까지를 포함해서 넓은 의미로 유기라고 알려져 왔다. 이렇게 잡금속을 섞어서 대량생산하던 합금쇠를 통쇠라고 했으며, 전통적인 놋쇠와는 엄격히 구분지어 사용하였다. 그 이유는 퉁쇠는 주물한 것이라 금속의 단면이 유연성이 적어 그릇을 떨어뜨리면 깨지기 쉽기 때문이다. 방짜 유기 제작으로 유명한 평북 납청은 조선시대부터 유기 제작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납청은 정주읍과 박천읍 사이에 있는 산간지방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내공업으로 유기업을 하여 생활했던 곳이다. 이 지방은 일찍이 유기제작이 크게 발전하여 각 지방에서 유기 도매상들이 모여들었으며, 일제초기까지만 해도 성시를 이루었던 곳이다. 납청에서는 방짜를 양대(良大)라고 불렀으며, 모든 생활기명이나 악기를 만들어 내었는데, 놋쇠의 질이 좋아 견고하고 소리도 맑고 파장이 길어 각광을 받았다. 현재는 국가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 이봉주 선생에 의해 방짜유기의 기술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예부터 음식을 담는 반상기로 쓰인 방짜유기는 독성이 없고 항균, 멸균 효과가 뛰어나며 농약 성분을 가려주는 역할을 한다. 방짜기술을 가진 나라는 열손가락에 꼽을 정도라고 한다. 더구나 그릇을 방짜기술로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다고 한다.(한국문화재단 문화유산이야기) (사진:납청방짜유기촌)
밀양 백중놀이 명인, 하보경(1906.8.24~1997.12.2)
밀양 백중놀이 명인, 하보경(1906.8.24~1997.12.2)
(사진:덕담 박승우) 밀양 백중놀이 중 북춤, 양반춤, 범부춤의 1인자인 하보경(河寶鏡)옹은 이동안, 박홍도 옹과 함께 현역 최고령 전통 예인 중 한 사람이었다. 경남 밀양에서 나고 자라며 하옹은 어린시절 큰북 치는 아버지를 보며 혼자 악기, 춤을 연습하곤 했다. 걸립패였던 아버지의 말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밀양백중놀이의 보본계(報本契)를 조직하여 경상도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녔다 한다. 그렇게 닦은 그의 북장단과 '휘쟁이춤'은 가히 일품이다. 경남 밀양 출신. 라는 친목단체인 농악단원이었던 부모 하성옥(河聖玉)•이삼선의 사이에서 태어나, 는 일에 열중하다가 20세 때 보본계의 정식회원이 되었다. 걸립농악단의 모갑(某甲)이면서 큰북을 치기 시작하여 가락과 춤동작을 나름대로 연구하여 독특한 맛을 보인다. (사진:유튜브화면 캡쳐) 40세인 1946년에 정한목을 대표로 하여 권재업(權再業)•김상용(金相容)•정일성 등 밀양민속놀이 연회에 뜻을 모은 오삼(五三)친목회를 구성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했다. 그 뒤 놀이 체계의 확립을 위해서 따로 모여 김덕조를 회장으로 ‘국악협회’를 조직하였다가 1967년 ‘민속보존협회’로 명칭을 바꾸어 본래의 취지를 살리며 민속놀이를 보존하고 조직적으로 연희하였다. 1980년 밀양백중놀이를 정립하여 대외적인 활동이 활발히 펼치기 시작하여 중요무형문화재 제 68호로 지정되었다. 1983년 밀양백중놀이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그는 스스로 창제해 낸 한국 전통의 양반춤을 넘겨 받을 사람이 적어 걱정이 많은 '조선한량'이었다. 현재 그의 대를 잇는 김상용•권재업•조병환(趙炳煥) 등이 있고 이수자인 박동영(朴東英)과 손자인 하용부(河龍富)가 있다. <수상>1980년•1981년•1982년 민속경연대회 경남 예선에서 최우수상 수상.1980년 제주도 민속경연대회 국무총리상.1981년 인천 경연대회 문화공보부장관상 수상.. <공연>미국 뉴욕•워싱턴•로스앤젤레스, 일본 동경 순회 공연. 1988년 올림픽 문화예술축제 ‘노스토이(Nostoi)’ 천상의 신 배역 공연.
여성 명창 최초로 판소리 다섯 마당을 모두 완창한 오정숙
여성 명창 최초로 판소리 다섯 마당을 모두 완창한 오정숙
(사진:덕담 박승우) 오정숙(吳貞淑, 1935년 6월 21일 ~ 2008년 7월 7일)은 대한민국의 판소리 명창이다.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오정숙씨는 전라좌도 농악패들이 손꼽는 유명한 상쇠였던 아버지 아래에서 자라나서 철들기도 전인 7세 때 정정열 명창의 수제자였던 이기권씨에게서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 후 14세 때 김연수 씨의 '우리창극단'에 입단하면서 스승을 만나게 되었다. 그녀가 23세 되던 해에는 만정 김소희를 만나 3년간 사사하면서 힘을 보태기도 하였다. 오정숙은 동초 김연수의 유일한 제자로 '동초제'를 모두 전수 받아 맥을 이었다. 흐지부지하거나 얼버무리는 것을 질색했던 스승의 성격대로 가사 전달이 확실하고 맺고 끊음이 분명한 것이 동초제이다. 그런 소리의 계승자답게 그녀는 구전되는 판소리 다섯 마당의 가사를 한 자도 빼놓지 않고 기억한다. 1972년에는 판소리 춘향가를 완창한 이후 해마다 흥보가, 심청가, 수궁가, 적벽가 순으로 판소리 역사상 여성 명창 최초로 판소리 다섯 마당을 모두 완창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Korean Traditional Music 유튜브화면 캡처) 1967년 무형문화재 김연수 후계자로 지정되었고 1982년 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1991년 5월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춘향가)’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1975년 제1회 전주대사습놀이 판소리부 장원, 1983년 제1회 남도문화제 대통령상 등을 수상하고, 1991년에는 인간문화재 5호(춘향가)로 지정되었다. 오정숙은 창극무대, 판소리 무대, 대학 강단 등 수 많은 활동을 통해 제자를 양성, 실질적으로 동초제를 전국적인 소리제로 올려 놓았다. 2005년 국립창극단 원로단원을 끝으로 국립창극단을 퇴직하였고 동시에 서울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한양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등 대학 출강을 모두 그만두고 전북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에 스승의 호를 딴 동초각(전수관)을 지어 후진을 양성에 힘을 쏟았다. 안타깝게도 2008년 7월 7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판소리 명창, 조상현
판소리 명창, 조상현
(사진:덕담 박승우) 조상현(趙相賢, 1939년 11월 7일 ∼ ) 대한민국의 판소리 명창이며 본관은 한양(漢陽). '보성소리'의 고향인 전남 보성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적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학습하여 오늘날 그의 넉살좋은 재담의 원천이 되었다. 13세 때부터 7년간 소리꾼 정응민선생에게 찾아가 소리꾼이 되겠다고 자청해 판소리(강산제)를 배웠다. 하루 10시간 이상의 혹독한 소리학습을 받고서 비로소 박유전-정재근-정응민으로 이어지는 '강산제'소리를 완벽하게 떼어냈다. 20세부터는 광주의 호남국악원에서 생활하며 박봉술 명창을 만나고 임방울 명창과도 교유하기도 하며, 한때는 명창 박녹주선생의 수양아들로서 3년간 독공도 쌓았다. 1974년 문공부 주최 제1회 전국판소리 명인명창대회(남원, 현재는 춘향국악대전)에서 1등을 차지했다. ‘심청가’에 장하며 웅대한 성량으로 촉망을 받았다. 국립창극단 단원, (사) 한국판소리보존회를 설립하고 이사장을 지냈다. 전남대학교 국악학과에서 전임강사, 대우교수 등을 지냈고 광주시립국극단 단장을 지냈다. 동양방송 공연장에서 만난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지대한 배려와 관심으로 전기를 맞았다. 국립창극단에서 모든 주역을 맡아 오며 정'재계 등 각계 최고위 지도층 인사들과 많은 교류를 했다.제자로는 염경애, 주소연, 박춘맹, 윤상호, 마미숙, 이숙영 등이 있다. 아직까지 대한민국 최고의 국창으로 활동과 후진양성에 힘을 쓰고 있다. 대표 작품으로 심청가(1976년, 오아시스레코드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