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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있는 가족을 그리며 외롭게 사망한 비운의 천재화가 이중섭
일본에 있는 가족을 그리며 외롭게 사망한 비운의 천재화가 이중섭
가장 한국적인, 현대적 비운의 천재화가 이중섭(李仲燮, 1916.9.16~1956.9.6) (사진:제주특별자치도) 호는 대향(大鄕). 1916 년 9 월 16일 평안남도 평원군 생. 외가가 있는 평양의 종로보통학교에서 수학. 오산고등보통학교에서 예일대학교 출신의 미술교사 임용련(任用璉)의 지도로 일본 도쿄문화학원(분카학원, 文化學院) 미술과 입학, 재학 중인 1937년 일본의 자유 미협전에 출품하여 각광을 받으며 1940년에는 미술창작가협회전에서 협회상을 수상하고 1943년에도 역시 같은 협회전에서는 태양상(太陽賞)을 수상했다. 분카학원을 졸업하던 무렵 일본인 여성 야마모토[山本方子]와 1945년 원산에서 결혼하여 이 사이에 2남을 두었다. 1946년 원산사범학교에 미술 교사 부임. 북한 땅이 공산 치하가 되자 자유로운 창작 활동에 많은 제한을 받았다. 친구인 시인 구상(具常)의 시집 ‘응향(凝香)’의 표지화를 그려 두 사람이 같이 공산주의 당국으로부터 탄압을 받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유엔군이 북진하면서 그는 자유를 찾아 원산을 탈출, 부산을 거쳐 제주도에 도착하였다. 생활고로 인해 다시 제주도에서 부산으로 돌아왔다. 이 무렵 부인과 두 아들은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으며 이중섭은 홀로 남아 부산•통영 등지로 전전하였다. 1953년 일본에 가서 가족들을 만났으나 며칠 만에 다시 귀국하였다. 이후 줄곧 가족과의 재회를 염원하다 1956년 정신이상과 영양실조로 그의 나이 40세에 적십자병원 외롭게 사망했다. (사진:제주특별자치도) 이중섭은 가장 한국적인 작가인 동시에 가장 현대적인 작가로 평가 받는 화가이다.그의 작풍은 야수파적인 강렬한 색감과 선묘 위주의 독특한 조형 등 서구적인 표현이지만 향토적인 숨소리와 꿈을 표현하여 한국적이면서도 웅장하고 무한한 세계를 내포하고 있다. 그의 작품의 소재는 주로 소, 닭, 어린이, 가족 등 일상성을 띠고 있으면서 시정이 넘치는 것들이다. '소', '흰 소', '투계', '집 떠나는 가족', 그리고 담뱃갑 속의 은지에 눌러 그린 수많은 은지화들이 대표작들로 남아 있다. 흰소(부분),1955,종이에 유채,29× 41cm,홍익대학교박물관 소장 그의 예술세계를 이루는 기반은 철저하게 자신의 삶으로부터 연유하고 있다. 생활고 속에서 처자마저 일본에 보내고 전국을 떠돌며 외롭게 제작한 고통의 산물들이었던 그의 작품은 1970년대에 이르러서 새롭게 조명과 재평가를 받게 된다. 생전의 많은 인간적인 에피소드와 강한 개성이 담긴 작품들로 인해, 그의 삶과 예술은 이제 대중적으로 거의 신화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생전 인간적인 에피소드와 개성 강한 작품으로 1970년대에 이르러 갖가지 회고전과 재평가 작업이 활발하게 일어나 1972년 현대화랑에서의 유작전과 화집 발간, 평전(評傳)의 간행, 일대기를 다룬 영화•연극 등이 상연되었으며 많은 작가론이 발표되었다. 또한 2016년에는 이중섭 탄생 100주년을 맞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중섭 백년의 신화’라는 전시를 통해 그의 작품세계가 재조명 되었다. 현재 제주도 서귀포 명동로•이중섭 거리는 서귀포를 소개로 많은 작품을 남긴 비운의 천재 이중섭 화백의 기념 미술관이 있다. 비운의 천재화가 이중섭의 사랑하는 가족들과 짧은 봄날 같은 행복했던 추억이 있는 서귀포 시절을 그린다. 1996년 이중섭거리 지정, 2002년 이중섭 미술관 개관, 2009년 주민자치특성화사업으로 도심 공간 야외갤러리 조성, 2009년 이중섭 미술관 창작스튜디오가 개관되어 상설 전시공간이 있다. 이중섭 예술제, 거리 공연 개최, 서귀포문화예술시장 개최 등 정기 비정기적 문화예술행사가 많은 곳으로 문화예술이 살아 숨쉬는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제주의 핫 스팟이다. 생애 일정(국립현대미술관 자료) 식민지, 전쟁, 분단 등으로 얼룩진 한국의 근대사를 관통하면서도 이중섭은 끈질기게 ‘예술가’로서의 삶을 고집했다. 일제 강점기에도 민족의 상징인 ‘소’를 서슴없이 그렸고 한없이 암울한 현실을 자조하는 그림을 남기기도 했다. 가난한 피란시절에도 가족과 행복한 시절을 보내며 순진무구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가 하면 전쟁 후에는 강렬한 의지와 자신감으로 힘찬 황소 작품들을 쏟아내었다. 그는 무엇보다 자신의 감정표현에 충실한 ‘정직한 화공’이 되고자 했고 한국의 전통미감이 발현된 ‘민족의 화가’가 되기를 소원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진 후 사기로 인한 빚에 시달렸고 경제적 생활고 속에서 ‘거식증’을 동반한 정신적 질환으로 불행한 말년을 보내야 했다. 결국 쓸쓸하고 애잔한 작품들을 뒤로 한 채 홀로 세상을 떠났다. 1916 – 1950 평원, 평양, 정주, 도쿄, 원산1936년 일본 도쿄의 제국미술학교를 거쳐 1937년– 1941년 ‘문화학원’에서 유학했는데 문화학원은 당시 일본에서도 가장 자유로운 분위기의 사립학교였다. 문화학원의 선배들도 적극 참여했던 ‘자유미술가협회’에서 작품 발표를 시작해서 일본의 주요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으며 협회의 회원 자격을 얻기도 했다. 1943년 태평양전쟁이 극단으로 치달았을 때 가족들이 있던 원산으로 귀국, 1945년 5월 해방 직전 문화학원의 후배였던 야마모토 마사코와 원산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950 – 1953 서귀포, 부산1950년 12월 원산 폭격을 피해 어머니는 남겨둔 채 아내 및 두 아들과 함께 부산으로 피란 내려온다. 이 때 그 이전까지 제작한 작품을 모두 어머니 품에 남겨놓고 오는 바람에 이중섭의 1950 년 이전 작품은 극히 드물다. 피란지 부산이 너무 비좁았던 관계로 1951 년 제주도로 거처를 옮기는데 여기서 약 1년간 가족들과 가난하지만 행복한 피란생활을 한다. 1951년 12월 부산으로 돌아와 피란촌을 전전하며 가난한 생활을 이어간다. 1952년 7월 아내와 두 아들이 일본으로 돌아가서 홀로 남은 가운데 작품 활동과 전시회 참가, 잡지 삽화나 도서 표지화 그리기 등을 계속한다. 그러나 부산에서 제작된 수많은 작품이 대 화재로 불타서 대부분 없어진 것으로 전한다. 이중섭의 은지화은지화는 이중섭이 창안한 새로운 기법의 작품이다. 양담배를 싸는 종이에 입혀진 은박을 새기거나 긁고 그 위에 물감을 바른 후 닦아내면 긁힌 부분에만 물감자국이 남게 된다. 그렇게 해서 깊이 패인 선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드로잉이 완성되는데, 평면이면서도 층위가 생길 뿐 아니라 반짝이는 표면효과도 특징적이어서 매우 매력적인 작품이 된다. (사진:국립현대미술관) 이러한 기법은 고려청자의 상감기법이나 철제은입사 기법을 연상시킨다.이중섭은 상당히 오랜 기간 약 300 점의 은지화를 제작했다는 증언이 있는데 그 중 일부가 전시장에 진열되었다. 제주도 서귀포 시절 행복했던 가족들의 모습을 추억하는 것에서부터 비극적인 사회 상황과 자신의 처참한 현실을 암시하는 내용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장면들이 예리한 칼로 새겨져 있다. 이중섭은 이 은지화들이 후에 ‘벽화’를 그리는 밑그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거대한 벽화를 그려서 예술이 공공장소에서 많은 이에게 향유되는 꿈에 부풀곤 했다. 1953 – 54 통영전쟁이 끝날 무렵부터 전쟁 직후 1954년 6월경까지 월남한 공예가 유강렬(1920~76)의 주선으로 통영 나전칠기전습소에서 강사로 재직하면서 비교적 안정적인 환경에서 의욕적인 작품활동을 계속했다. 아름다운 통영의 풍경을 그린 유화작품이나 유명한 ‘소’ 연작들이 이 때 제작되었다.이중섭의 개인전이 최초로 열리기도 했고 ‘4인전’에 참여하는 등 본격적으로 화가의 경력을 쌓아갔다 1955 대구1955년 1월 있었던 서울 전시에 이어 5월 대구의 미국공보원 화랑에서도 개인전을 개최한다. 절친했던 시인 구상(1919 – 2004)의 도움으로 마련된 이 전시회는 서울에서보다 더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가장의 역할을 해내지 못한 채 예술을 한답시고 공밥을 얻어먹고 무슨 대단한 예술가가 될 것처럼 세상을 속였다고 자책하며 거식증을 동반한 정신적인 질환에 시달렸다. 대구 외곽 왜관에 있던 구상의 집에서 머무르며 요양생활과 작품제작을 계속했다. 가족들과는 떨어진 가운데 홀로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다. 누상동, 상수동 등 지인의 집에서 기숙하며 1955년 1월에 미도파화랑에서 열리는 개인전을 준비하는데 몰두했다. 일본의 아내가 일본에서 책을 사다 한국에 판매하여 그 차익으로 수익을 내는 사업을 했으나 중간 업자가 돈을 떼먹는 바람에 극심한 빚에 시달리게 된다. 이 빚을 갚고 일본에 있는 가족들과 만나기 위해 개인전으로 통해 작품을 팔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이 전시에서 작품은 약 20 점이나 팔렸으나 수금이 되지 않아 곤경에 빠지기 시작한다. 1956 서울(정릉)병원을 전전하던 이중섭은 1955년 12월경부터 서울의 정릉에서 화가 한묵(1914 – ), 소설가박연희(1918 – 2008), 시인 조영암(1920 – ?) 등과 함께 생활했다. 이 때 문예지의 삽화를 그리기도 하고 ‘돌아오지 않는 강’ 연작을 포함한 마지막 작품들을 남겼다. 그러나 거식증으로 인한 영양실조, 간장염 등으로 인해 다시 병원생활을 하다가 1956년 9월 6일 적십자병원에서 무연고자로 생을 마감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서울 망우리공원에 묘소와 묘비를 마련했다.
한국 미술품 경매의 신기록을 쓰고 있는 수화 김환기화백
한국 미술품 경매의 신기록을 쓰고 있는 수화 김환기화백
김환기(1913.4.3~1974.7.25)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 미술품 경매의 신기록을 쓰고 있는 김환기화백은 동양의 직관과 서양의 논리를 결합하여 한국적 특성과 현대성을 동시에 표현한 한국의 대표적 현대화가이다. 김화기의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수화(樹話),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면 읍동리에서 태어났다. 1936년 일본대학 미술과를 졸업했는데 대학재학 시절에 아방가르드 미술연구소를 만들고 신미술 운동에 참여하는 등 초창기 한국 추상미술운동에서 선도적 역할을 했다. 광복 후에는 서울대와 홍익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모더니즘 운동을 전개하였고 1956년에는 파리로 건너가 3년간 서구미술을 체험했다. 1965년에 상파울루 비엔날레의 커미셔너로 출국하였다가 미국에 들렀다가 그대로 미국에 정착하여 사망할 때까지 뉴욕에서 작품활동을 했다. 그의 작품경향을 시기별로 나누어 보면 초기의 수업시대는 일본에 소개되기 시작한 새로운 추상미술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광복 이후부터 파리로 건너가기까지의 시기는 달과 산과 구름과 학 등 한국적 소재의 발견으로 일관되었다. 미국에 건너가기까지는 이러한 주제가 더욱 요약되고 심화되어 항아리와 달을 닮은 형태가 화면을 채운다든지 하나의 긴 수평선으로 상징되는 강 등으로 압축된 작품이 나타난다. 미국으로 건너가 사망할 때까지 약 10년간의 시기는 그때까지와는 커다란 변화를 보여 점과 선이 무수히 반복되어 추상공간의 무한대를 나타낸 그림을 그렸다. 오랜 외국 생활에도 불구하고 한국적인 미감을 간직한 그의 화폭에는 자연의 생성진화에 담아낸 우주적인 시적 세계가 들어 있다. 그의 작품에서 주조색인 청색은 넓이, 커다란 공간, '고요의 메아리'를 환기시키며 메마름이 없고 작가의 손에 의해 가꾸어져 그의 생명의 흔적이 담겨진 청색이다. 그가 죽기 1년 전에 적은 다음의 글은 그의 작품세계를 가장 잘 대변하고 있다. “예술은 미학적, 철학적, 혹은 문학적 학설이 아니다. 예술은 하늘과 산 그리고 돌처럼 존재하는 것이다.” 그의 대표작품으로 론도, 산, 산월(山月), 야상곡(夜想曲),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등이 있다. 그의 작품 중 론도는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535호로 등록되기도 하였다. 2019년 11월 23일 김환기의 1971년작 작품 'Universe 5-IV-71#200'은 크리스티 홍콩 경매서 한화 132억 3600만원 (8800만 홍콩달러)에 낙찰되었고 한국 미술품 중 최초로 한화 100억을 넘긴 작품이 되었다. 김환기의 작품 세계를 미술계에서는 다음과 같이 나누어 정리하고 있다.(대구미술관)일본 동경 시대(1933-37)와 서울 시대(1937-56)작가는 1930년대 초기 일본 유학시기에 입체파, 미래파 등 서구 전위 미술 경향을 진취적으로 시도했으며 여러 실험과정을 통해 전위적 화풍을 지속하였다. 197년부터 1956년까지 서울 시기의 작품들은 여러 문인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서 깨닫게 된 우리 고유의 미의식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이 시기는 바다, 산, 달, 매화, 구름, 나무, 항아리 등의 자연과 전통을 근간으로 한 소재들을 화면의 중심 모티브로 하되, 한국의 고유한 서정의 세계를 밀도 있고, 풍요로운 색채로 구현하였다. 파리 시대(1956―59)와 서울 시대(1959-63)김환기가 파리에 도착했을 당시 파리의 미술계는 엥포르멜 경향이나 추상 작품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작가는 서울 시기와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를 담은 자연 소재와 색채를 어어 가고자 했으며 곡선이나 선에 대한 실험을 지속했다. 파리에서 작가는 그곳의 풍경을 스케치하거나 문화를 체득했지만, 고국을 떠나 있으면서 더욱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고, 예술가로서 고유한 정신과 노래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파리 시기에 주로 항아리, 영원 관념의 매개인 십장생, 매화 등의 소재들을 분할된 평면 속에 재배치하여 담아낸 추상 정물 작품들을 작업했고 두 번째 서울 시기의 작품들은 산, 달, 구름 등 한국의 자연 소재들을 모티프로 했지만 형태를 단순화하여 간결한 추상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1963년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면서 출품한 작품의 경향 또한 달을 주요 모티브로 푸른 색채가 주조를 이루는 두터운 질감의 반추상 작품들이었다. 자연풍경을 형상화한 서정적인 작품들을 통해 국제무대에 한국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자 했던 예술 의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뉴욕시대(1963-74)작가는 뉴욕에 정착하여 예술 세계의 정수를 보여주는 점화 양식의 추상 회화를 발전시켰다. 뉴욕시기의 초반, 1964년에서 1965년으로 넘어가면서 화면에 자연의 모티프는 사라지고 순수한 색면과 색점, 색선의 단순한 추상적 구성으로 진행되었다. 또한 작가가 이전까지 진행했던 두터운 질감이 사라지고 물감을 얇게 펴 발라 번짐 효과를 이용한 제작 기법을 시작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스케치, 과슈 작업, 십자구도의 유화, 종이나 신문지 유화 작품과 같이 다양한 매재의 작품들을 소개하고 이를 통해 1970년 첫 점화가 나오기까지의 끊임없는 조형적 실험과 물성 연구의 회화적 방법론을 살펴 볼 수 있도록 했다. 1970년대의 전면점화는 유화 물감이라는 서구적 재료를 사용하면서도 한국화에서의 먹의 번짐을 연상시키는 자연스러운 번짐과 스밈, 농담의 조절, 겹침의 기법을 통해 서정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독자적인 조형양식이다. 대형 화면 위에 색점을 찍고, 그 주변을 네모로 둘러싸는 기본 단위가 반복적으로 이루어져 화면을 가득 채우고, 수많은 점 단위들이 무리를 이루거나 회전하면서 전체적인 질서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1913 한국에서 출생1933 니혼대학 예술과 미술부 입학, 도쿄1934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 조직에 참여하여 후지다 쓰구하루, 도고 세이지에게 지도 받음1935, 36 ‘이과회’에서 수상, 도쿄1936~38 ‘신시대양화전’, ‘자유미술가협회’, ‘백만전’, ‘구실회’ 참여, 도쿄1937 제1회 개인전, 아마기화랑, 도쿄. 서울로 귀국1946~49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교수 역임1948 유영국, 이규상 등과 ‘신사실파’ 조직1952~55/59~63 홍익대학교 교수와 학장 역임1956 제5회 개인전, 동화화랑, 서울. 파리에 도착1959 서울로 귀국1960 유네스코 국제조형예술협회 한국본부 회장1963 제7회 상파울로 비엔날레 명예상 수상, 상파울로. 뉴욕에 도착1964 J.D. 록펠러Ⅲ 재단에서 수여하는 지원금 수혜, 뉴욕1965 제8회 상파울로 비엔날레 특별실에 초대되어 제18회 개인전, 상파울로1970 한국일보 주최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 대상 수상1974 제25회 개인전, 루이지애나. 뉴욕에서 별세(향년 61세) 영원한 노래 1957 Oil on canvas_162x130 ‘영원한 노래’는 1957년 제작된 것으로 이 시기에는 항아리, 영원 관념의 매개인 십장생, 매화 등의 소재로 작업했다. 파리 시기 작가는 한국의 고유한 정서를 작품 속에 표현하고자 했으며 이 작품은 하나의 화면에 다양한 십장생의 소재를 분할된 평면 속에 간결하게 재배치하여 제작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 시기부터 작품의 색채는 화면 가득 푸른색의 경향을 볼 수 되는데 작가에게 푸른색은 한국의 자연 빛깔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고향의 하늘과 바다의 색채, 푸른 도자기를 의미한다.
조선왕조 궁중음식(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의 혼과 맥을 잇다, 황혜성장인
조선왕조 궁중음식(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의 혼과 맥을 잇다, 황혜성장인
(사진:덕담 박승우) 조선왕조 궁중음식의 혼을 되살려낸 황혜성선생.평생을 바쳐 궁중음식의 전통과 맥을 이어온 장인이다. 황혜성(黃慧性 본관은 평해 1920.7.5~2006.12.14)선생은 1920년 충청남도 천안에서 태어났다. 황선생은 처음부터 궁중음식에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충청도에서 유일한 여성고등교육기관이었던 공주고녀를 나온 후 일본으로 유학해 후쿠오카시 지쿠시 여자고등학교(筑紫高等女学校, 현재의 지쿠시 여학원 중학교・고등학교)를 졸업한다. 이후 어머니의 배려로 교토여자전문학교(京都女子専門学校, 현재의 교토 여자 대학)의 가사과에서 일본 음식과 서구식 영양학을 공부했다. 5년간의 일본유학을 끝낸 후 귀국하여 2년간 대동고녀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중 서울의 숙명여전에서 가사과 전임강사 자리를 제의해 1941년 숙명여전에서 영양학을 강의하기 시작한다. 이때 숙명여전 학장이었던 오다(小田)씨의 제안으로 궁중음식을 처음 접하게 된다. 일제치하였지만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계비인 순정효황후 윤씨(1894-1966)가 궁인들과 거주하고 있어 아직 궁중의 법도가 남아 있던 창덕궁 낙선재로 찾아가 윤씨가 가장 아꼈다는 주방상궁, 한희순상궁을 찾아가 1972년까지 30년간 궁중음식에 대해 가르침을 받는다. 1970년 황혜성(왼쪽 첫번째)과 한희순(왼쪽 두번째) 등 윤황후를 마지막까지 모신 궁인들(사진: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한상궁은 고종에 이어 순종, 순종비 윤황후를 모신 조선과 대한제국의 마지막 주방상궁으로 임금이 평소에 드시던 수라상부터 잔치음식, 제사음식까지 모든 궁중음식 조리법을 섭렵한 분이었다. 황선생은 상궁마마님이라 부르며 궁중음식의 재료부터 꾸밈새, 간 맞춤, 관련 용어 등 전 과정을 수기로 공책에 기록했다. 한희순 상궁의 제자, 황혜성에 관한 신문기사 (1968년 3월 5일)(사진: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그런데 그 가르침이란 것이 체계적이지도, 글로 된 것이 아니라 그저 눈동냥으로 익히는 것이어서 고충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한다. 당시는 대부분 상궁들의 기억을 통해서만 요리법이 전수되었고 일제의 식민지 사관으로 음식에 대한 생활사의 보존 필요성도 느끼지 못할 때인데 황선생은 이 때부터 왕실 음식의 전통을 이어 가기 위해 정형화, 규범화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던 것 같다. 황혜성 친필노트(사진: 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황선생은 그 후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비법에만 만족하지 않고 장서각과 규장각 등을 돌아다니며 궁중음식에 관한 옛 기록들을 찾아내 손수 체계화시켜 간다. 그래서 탄생한 궁중요리 이론서 책이 1957년 발간된 ‘이조궁정요리통고’이다. 이조궁정요리통고는 구중궁궐 깊숙이 숨겨져 있던 궁중음식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한국 음식 문화역사에 큰 의미가 있었다. 책의 발간은 우리 요리가 학문의 한 분야로, 한국 음식 문화의 새로운 장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황선생은 생전에 "궁중음식은 한국 식문화의 정수"라는 말로 이 책의 의미를 두었다. 이조궁정요리통고(사진: 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1971년 드디어 궁중음식은 국가무형문화재 제 38호로 지정 받게 된다. 황선생이 1943년 처음 기록하기 시작한 지 근 30년간의 혼신의 노력을 한 결과이다. 궁중음식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자 궁중음식의 전승과 보존, 그리고 전수를 위해 황선생은 1971년 궁중음식연구원을 설립한다. 긍중음식연구원(전경) (사진:재단법인 궁중음식연구원) 궁중음식연구원은 창립 25년을 맞아 1996년 처음 궁중음식을 전수받았던 낙선재와, 한상궁의 사저가 안동 별궁과 가까운 곳인 창덕궁 옆 종로구 원서동 한옥으로 이전해 궁중음식 전수 교육과 전시 등 활발한 활동한다. 윤황후가 거처했던 창덕궁 낙선재에 복원된 조선왕조 수라상(2014년)(사진: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원행을묘정리의궤(1795)에 기록된혜경궁 홍씨의 회갑상차림 재현모습 (2017년)(사진: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황선생은 1972년 문화재관리국 식생할 분야 문화재 전문위원을 하며 궁중음식을 계량화하고 조리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또한 후학 양성을 위해 교수로도 재직하며 관련 문헌을 조사하고 연구해 궁중음식 문화에 대한 학문적 노력에도 힘을 쏟았다. 또한 미국, 일본, 프랑스, 필리핀, 대만 등지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조선궁중음식을 전시하고 강습해 우리 음식문화를 세계에 전파하는데도 노력한다. 황선생은 대중매체를 통한 한국 궁중요리 전도사로 친숙한 분이기도 하다. “집념을 가지고 발로 뛰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모든 것을 꾸준히 기록해 두어라”, “음식은 생명에 대한 존중이다” 라고 강조한 황혜성선생. 그의 손길에서 사라진 조선왕조의 궁중음식은 영원한 한국의 위대한 살아있는 문화유산으로 남을 수 있었다. 한상궁에서 황선생으로 계보를 이어가던 무형문화재 38호 조선왕조 궁중음식 문화는 안타깝게도 2006년 12월 14일 오후 12시30분 서울의료원에서 향년 86세로 선생이 작고하면서 막을 내린다.황선생은 사후를 대비, 궁중음식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자녀들을 같은 길로 이끌어 그 맥을 이어 나가고 있다. 장녀 한복려씨가 무형문화재 궁중음식 기능 보유자로, 둘째 한복선씨, 셋째 한복진씨가 전수자로 대를 잇고 있다. (‘지화자’라는 궁중음식 한정식 음식점 운영) 황혜성선생은 숙명여자대학교, 한양대학교, 명지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였고, 성균관대학교 가정대 학장을 역임했으며 주요 저서로 1957년 스승인 한희순과 공동으로 저작한 ‘이조궁정요리통고’를 시작으로 10권의 궁중음식과 전통음식 전문서적과 다수의 논문을 남겼다. 저술‘이조궁정요리통고 (李朝宮廷料理通考)’ (1957년)‘한국요리백과사전’’한국의 미각’ (1976년)‘한국의 요리’ (1982년)‘한국음식’ ‘전통의 맛’ (1985년)‘한국의 식(韓國의 食)’ (1987년)‘한국의 전통 음식’ (1989)‘조선왕조 궁중 음식’ (1993)‘한국음식 대관-6권 궁중의 식생활’ (1997년)‘우리 음식 백 가지’( 1998년) 등 상훈대한민국 교육훈장 목련장 (1985년)문화훈장 보관장 (1990)
국가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 기능보유자, 이봉주(1926~)
국가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 기능보유자, 이봉주(1926~)
(유튜브 캡쳐) 1926년에 평북 정주군 덕언면 납청에서 출생인 이봉주선생은. 작업 도중 튄 불똥에 시력을 잃어 한쪽 눈을 쓰지 못하지만 그의 메질은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1948년 월남한 이후 지금까지 방짜유기와 더불어 살아온 선생은 고집스럽게 놋그릇의 전통 맹맥을 지키고 있는데 무형의 전통이 결코 저절로 이어져 오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산 증인이다. 유기의 생명은 금속과 불, 이 두 가지 인연이 오늘날 선생을 있게 했다.고향인 납청에선 정작 방짜유기 제작 기술을 배울 기회가 없었고 해방 후 22세 때인 1948년에 월남하여 서울 용산구 후암동에서 납청 방짜유기 공장을 크게 하던 탁창여 선생과의 인연으로 방짜 유기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선생은 탁창여 선생의 은혜를 기리고자 지금도 문경에 있는 선생의 공방, 납청방짜유기촌 마당 가운데에는 탁 선생의 공적비가 서 있다. 문경 납청방짜유기촌에는 모두 납청출신의 유기 장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1957년 구로동에 자신이 직접 ‘평부양대유기공장’을 설립하여 대장겸 점주 그리고 경영까지 하여 생산 기술자인 동시에 판매자까지 겸하게 되었다. 그러나 1950년대 말부터 생활문화가 변하면서 연탄을 집집마다 사용하게 되자 연탄가스에 쉽게 변색되는 유기는 심한 타격을 받게 된다. 계속되는 불경기로 선생의 공장도 문을 닫고 노동일을 하며 방황생활을 하다 1960년말 공방을 새로 시작한다. 1978년 경기도 안양 박달동에 진유공사를 세워 다시 양대유기를 제작했다. 1982년 전승공예대전에서 문화공보부장관상을 수상하고 1983년에는 국가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의 방짜유기 부문의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경북 문경에 ‘납청방짜유기 전수관’을 짓고 후진양성과 작품활동에 정진하고 있다. 지역 주민들과 함께 이곳을 유기마을로 키워가고 있다. 선생이 만든 대징은 직경 160cm, 무게 98kg의 세계 최대의 크기로 기네스북에도 올라 있다. 납청유기는 조시 부시 미국 대통령 방한 때 청와대 만찬에 사용되기도 했으며 세계 최대 타악기 회사인 질리안에 의해 그 기술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선생의 아들 이형근이 전수교육조교로 활동하며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유기장이란?놋쇠로 각종 기물을 만드는 기술을 가진 장인을 말한다. 우리나라 유기의 역사는 청동기시대부터 시작되었는데 이 시기는 인류 역사에 있어 최초로 합금술이 발명된 때이다. 신라시대에는 유기를 만드는 국가 전문기관인 “철유전(鐵鍮典)”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더욱 발달하여 얇고 광택이 아름다운 유기를 만들었으며 품질도 우수해 신라동(新羅銅), 고려동(高麗銅)이라 불리며 수출하였다. 유기는 제작기법에 따라 방짜와 주물, 반방짜 등으로 나뉘는데 가장 질이 좋은 것으로 알려진 방짜유기는 일명 양반쇠라고도 하며 북한의 납청유기가 가장 유명하다. 질 좋은 놋쇠는 전통적인 유기제작 방법인 방짜(方字)기법으로 제작했는데 이는 동(銅)과 석(錫)을 정확한 비율로 합금하여 두드려서 만드는 놋제품이다. 이 방짜유기는 금속조직을 늘여서 만드는 것이라 떨어뜨려도 찌그러질 뿐 깨지지 않아서 사람들이 매우 선호했다. 그러나 조선조 중엽에 이르러 수요가 늘어나자 손으로 두드려서 만드는 방짜기법 대신 손쉬운 주물기법으로도 제작하게 되었다. 주물유기는 방짜유기의 합금과는 달리 구리와 아연의 합금인 황동이나 기타 잡금속을 섞어 녹인 금속을 주형에 부어 대량으로 생산해낸 것이다. 정확한 합금비율로 만든 전통적인 방짜유기와 주물유기는 성분이 다소 다르지만 잡주물로 만든 유기까지를 포함해서 넓은 의미로 유기라고 알려져 왔다. 이렇게 잡금속을 섞어서 대량생산하던 합금쇠를 통쇠라고 했으며, 전통적인 놋쇠와는 엄격히 구분지어 사용하였다. 그 이유는 퉁쇠는 주물한 것이라 금속의 단면이 유연성이 적어 그릇을 떨어뜨리면 깨지기 쉽기 때문이다. 방짜 유기 제작으로 유명한 평북 납청은 조선시대부터 유기 제작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납청은 정주읍과 박천읍 사이에 있는 산간지방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내공업으로 유기업을 하여 생활했던 곳이다. 이 지방은 일찍이 유기제작이 크게 발전하여 각 지방에서 유기 도매상들이 모여들었으며, 일제초기까지만 해도 성시를 이루었던 곳이다. 납청에서는 방짜를 양대(良大)라고 불렀으며, 모든 생활기명이나 악기를 만들어 내었는데, 놋쇠의 질이 좋아 견고하고 소리도 맑고 파장이 길어 각광을 받았다. 현재는 국가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 이봉주 선생에 의해 방짜유기의 기술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예부터 음식을 담는 반상기로 쓰인 방짜유기는 독성이 없고 항균, 멸균 효과가 뛰어나며 농약 성분을 가려주는 역할을 한다. 방짜기술을 가진 나라는 열손가락에 꼽을 정도라고 한다. 더구나 그릇을 방짜기술로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다고 한다.(한국문화재단 문화유산이야기) (사진:납청방짜유기촌)
밀양 백중놀이 명인, 하보경(1906.8.24~1997.12.2)
밀양 백중놀이 명인, 하보경(1906.8.24~1997.12.2)
(사진:덕담 박승우) 밀양 백중놀이 중 북춤, 양반춤, 범부춤의 1인자인 하보경(河寶鏡)옹은 이동안, 박홍도 옹과 함께 현역 최고령 전통 예인 중 한 사람이었다. 경남 밀양에서 나고 자라며 하옹은 어린시절 큰북 치는 아버지를 보며 혼자 악기, 춤을 연습하곤 했다. 걸립패였던 아버지의 말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밀양백중놀이의 보본계(報本契)를 조직하여 경상도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녔다 한다. 그렇게 닦은 그의 북장단과 '휘쟁이춤'은 가히 일품이다. 경남 밀양 출신. 라는 친목단체인 농악단원이었던 부모 하성옥(河聖玉)•이삼선의 사이에서 태어나, 는 일에 열중하다가 20세 때 보본계의 정식회원이 되었다. 걸립농악단의 모갑(某甲)이면서 큰북을 치기 시작하여 가락과 춤동작을 나름대로 연구하여 독특한 맛을 보인다. (사진:유튜브화면 캡쳐) 40세인 1946년에 정한목을 대표로 하여 권재업(權再業)•김상용(金相容)•정일성 등 밀양민속놀이 연회에 뜻을 모은 오삼(五三)친목회를 구성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했다. 그 뒤 놀이 체계의 확립을 위해서 따로 모여 김덕조를 회장으로 ‘국악협회’를 조직하였다가 1967년 ‘민속보존협회’로 명칭을 바꾸어 본래의 취지를 살리며 민속놀이를 보존하고 조직적으로 연희하였다. 1980년 밀양백중놀이를 정립하여 대외적인 활동이 활발히 펼치기 시작하여 중요무형문화재 제 68호로 지정되었다. 1983년 밀양백중놀이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그는 스스로 창제해 낸 한국 전통의 양반춤을 넘겨 받을 사람이 적어 걱정이 많은 '조선한량'이었다. 현재 그의 대를 잇는 김상용•권재업•조병환(趙炳煥) 등이 있고 이수자인 박동영(朴東英)과 손자인 하용부(河龍富)가 있다. <수상>1980년•1981년•1982년 민속경연대회 경남 예선에서 최우수상 수상.1980년 제주도 민속경연대회 국무총리상.1981년 인천 경연대회 문화공보부장관상 수상.. <공연>미국 뉴욕•워싱턴•로스앤젤레스, 일본 동경 순회 공연. 1988년 올림픽 문화예술축제 ‘노스토이(Nostoi)’ 천상의 신 배역 공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