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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 랜드마크 홍주성, 홍성의 역사가 녹아있는 천년 여행길
홍성 랜드마크 홍주성, 홍성의 역사가 녹아있는 천년 여행길
오래 전 서해안 고속도로가 생기기 전에는 처가가 있는 보령(대천)을 가려면 꼭 홍성시내를 거쳐 지나가야 했다. 30여년이 지난 최근에 들렀음에도 불구하고 홍성은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언제부턴가 지방자치단체들은 앞다투어 관광 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홍주성 천년여행길도 그렇게 개발이 되었으리라. 이 길을 가지 않았다면 홍성이 천 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고장이라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또한 김좌진, 한용운, 고려 말의 명장 최영 장군, 사육신 성삼문 등 뛰어난 역사적 인물들이 이 고장 출신이었다는 것도 모를 뻔 했다. 여행은 이런 무지를 깨우쳐 주기에 늘 걷고 또 걷는다. 고려시대에 운주로 불리기 시작한 이후 홍주로, 그리고 일제강점기때 홍주군과 결성군이 합쳐져 오늘의 홍성이 되었다고 한다. 홍성을 말할 때 홍성의 중심지에 위치한 홍주성을 빼놓을 수 없는 랜드마크이다. 이 홍주성을 키포인트로 하는 홍주성 천년여행길은 홍성의 천년 역사가 그대로 스며있는 수학의 길이다. 외지인들은 보통 홍성역이나 홍성버스터미널로 도착하기에 여기를 출발점으로 잡으면 된다. 필자는 홍성역에 도착해 온전한 코스는 다시 걷기로 하고 오늘은 두어 시간 정도 지도를 보고 중요 거점만 맛보기로 한다. 역에서 나오니 저 앞에 작은 봉우리와 성벽 같은 모습이 어슴프레 보이는 걸 보니 그 방향으로 걸어 내려간다. 홍성역 앞 광장에는 최영, 성삼문, 한용운, 김좌진 등 이 지역 출신 역사적 인물들의 조형물이 있어 홍성이 유서 깊은 고장임을 느끼게 한다. 홍성역에서 내려가는 길에는 홍성의 역사를 알려주는 안내판들이 있어 읽으면서 살살 내려간다. 역앞 도로가 끝나는 사거리 우측에 홍성관광안내소가 있어 홍주성 천년여행길 안내 자료와 지도를 받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한다. 버스터미널을 지나 처음 마주하게 되는 것이 독립운동가 백야 김좌진장군 동상이다. 한 손으로는 칼을 쥐고 다른 한 손은 곧게 들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모습은 그 날의 기상을 느낄 수 있게 한다. 동상 옆에는 김좌진장군의 검이 있는 작은 조각물도 전시되어 있다. 백야 장군은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에 가장 큰 승리를 안겨주었던 청산리 전투를 지휘했던 만주벌 호랑이 장군으로 불리었다. 홍성군 결성면에는 백야 장군의 생가와 백야기념관, 그리고 사당인 백야사와 백야 공원이 있어 나중에 한 번 다시 가보려 한다. 백야 장군상을 뒤로 하고 길을 건너면 바로 홍성전통시장 초입이다. 1943년에 문을 연 홍성전통시장은 약 75년의 역사를 자랑하는데 이 시장에는 홍성장터보물 10가지가 숨어있다. 대교리 석불, 홍성대장간의 모루와 나무통, 부의함, 보신알(곤계란), 재봉틀, 뿅뿅다리, 홍성시장벽화, 꽃상여, 되(됫박), 돈궤 등이 그것으로 게스트 하우스이자 장터 사랑방인 '문전성시'라는 이름의 카페 앞 지도를 보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사진:홍성관광 홈페이지) 천수만의 해산물과 내포평야의 농산물이 넘쳐나 홍주성 안에 여느 읍성과 다르게 장터가 형성되었는데 그게 바로 홍성전통시장의 시작이다. 160여년의 전통이 이어지고 사통팔달의 홍성시장은 상설장과 1일과 6일에 서는 오일장이 있다. 홍성 오일장은 인근의 천수만에서 잡은 신선한 해산물, 내포평야의 농산물이 어우러지는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는 풍요의 장을 살살 걷다 보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여기저기 둘러보는 재미가 있고 또 주전부리 할 것도 많아 눈과 입이 즐거운 우리 어머니, 아버지의 장이다. 넉넉한 인심과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로 장이 서는 날에는 귀까지 즐거워 지는 행복한 풍경을 주는 맑은 품이다. (사진:홍성관광 홈페이지) 10개 보물은 정해진 시간이 있어 다 찾아보기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시장 안에 있는 보물은 다 둘러볼 요량이다. 먼저 철물점 골목으로 들어서면 홍성대장간(충남도 무형문화재 제160호)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3대에 걸쳐 100년의 세월을 이어오고 있다는 대장간에는 달궈진 쇳덩이를 올려 두드리는 받침대인 모루와 그 옆에 다듬어진 쇳덩이 푹 담가 식히는 나무물통이 명물이다. 일제 때부터 낡은 목조의 장옥 건물에서 60여년을 넘게 이어오는 대승철물점에는 그 당시부터 사용하던 돈괘와 주판이 명물이다. (사진:홍성관광 홈페이지) 시장을 장남 코끼리 다리 만지듯 대강 돌아보고 나오면 눈앞에 작은 개천이 흐르는데 홍성천이다. 홍성천에는 복개한 도로와 버스 등이 다니는 철골 다리도 있지만 또 다른 보물인 뿅뿅다리가 옛 정을 느끼게 한다. 옛날 공사장에서 이동할 때 설치해 놓았던 구멍 송송 뚫린 철판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뿅뿅다리인가 혼자 생각해 본다. 정겨운 다리를 건너 다시 홍주성 천년길을 찾아 나선다. (사진::홍성관광 홈페이지) 전통시장과는 다른 도시적 분위기의 홍성의 명동을 걸어 가다 처음 마주치는 역사물이 조양문이다. 조양문(朝陽門)은 홍주읍성 4대문 중 하나로 홍주성의 동문으로 서문인 경의문, 남문은 문루가 없는 홍예문, 북문인 망화문의 문액은 흥선대원군이 친필로 하사하였으나 망실되었다. 조양문은 1906년에 을사늑약에 반대한 홍주의병과 일본군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북문은 역대 목사들이 문루에서 사형수의 처형을 감시하기도 하였는데 동학운동(1894) 때는 수백 명의 동학군이 여기에서 처형되었다. 고종 광무 10년(1906) 항일의병이 일어나 일본군과 홍주성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그 때의 흔적이 조양문 곳곳에 남아있다. 일본인들에 의하여 서문과 북문은 파괴되어 없어지고 조양문 또한 파괴되었으나 부분적인 보수로 퇴락되었던 것을 1975년 문루를 해체 복원하여 옛 모습을 찾게 되었다. 조양문을 지나 홍주성 입구에 서면 옛 홍주성 전투 안내판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홍주성전투는 1906년 5월 홍주성에서 의병과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1905년 일제에 의해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정산에 은둔하고 있던 전 참판 민종식은 5월 11일 홍산에서 의병의 기치를 들었다. 이곳을 중심으로 서천•남포•보령•청양 등지의 의병을 규합한 민종식 부대는 서부지방의 중심지인 홍주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때 부대 병력은 1,000여명으로 그 중 신식 소총과 화승총 등 화기류로 무장한 병력이 500여명, 창검과 활 등을 소지한 병력이 200여명, 나머지는 비무장이었다. 5월 19일 오후 홍주에 도착하여 홍주성 서남쪽 남산에 진을 치고 공격을 시작하였다. 당시 홍주성에는 일본군 헌병부대와 거류민 등이 남문 성벽에 의거하여 항전하였다. 이에 의병부대는 맹렬한 사격을 가하면서 남문을 집중 공격했고 남문을 지키던 일본군 헌병과 거류민들은 마침내 의병의 공격 기세를 당해 낼 수 없게 되자 북문을 열고 덕산으로 패주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패한 소규모 부대에 의한 산발적인 공격을 했으나 탈환에 실패하고 출혈이 계속되자 대규모 병력을 파견해 홍주성을 공격하게 된다. 이에 조선주차군 사령관은 서울에 주둔중인 보병 제60연대의 제1대대장 다나카 소좌를 지대장으로 하는 2개 중대의 지대를 편성하여 27일 홍주로 급파하였다. 5월 29일 홍주성 동쪽 천변리에 도착한 일본군은 홍주성 서쪽 홍주-결성간의 도로를 봉쇄하여 퇴로를 차단하고 북문과 동문으로 성을 공격하여 성 안의 의병을 포위, 섬멸하는 계획을 세웠다. 일본군은 이러한 계획 아래 성의 남문과 서문에 기관총 사격을 수 차례 실시하여 의병의 주력을 성의 남서쪽으로 집중시킨 다음, 5월 31일 새벽 성에 대한 총공격을 시작했다. 우세한 화력을 앞세워 동문과 북문으로 일본군이 밀려들자 의병들은 대로를 차단하고 시가전을 전개하였으나 사상자가 급증하였으므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날이 새기 전에 성을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성 안으로 돌입한 다나카 지대는 헌병과 경찰이 성문을 감시하는 가운데 성 안을 수색하여 의병을 색출했다. 이 전투로 일본군은 10여명이 사살된 반면 의병은 82명의 전사자를 내고 145명이 포로가 되는 손실을 입었다. 신돌석, 정용기 부대의 의병활동과 더불어 3대 전투의병의 하나로 꼽힌다. (문화콘텐츠닷컴 발췌 편집) 홍주읍성의 역사는 파란만장하다. 나말여초에 처음 성을 쌓은 홍주읍성은 왕건과 견휜이 후삼국 쟁패의 운명을 건 운주성 전투가 있었던 곳이며 광해군과 임진왜란, 이몽학의 난, 천주교 박해, 홍주의병, 동학농민운동 등 격동 세월의 부침을 그대로 껴안고 있는 역사의 땅이다. 현재의 홍주읍성은 1870년의 홍주목사 한응필이 대대적으로 수축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지봉 이수광, 우암 송시열, 대원군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러나 동학농민운동과 홍주성 전투 등을 거치며 일제에 의해 홍주관아 건물이 철거되고 일본식 건물이 지어지면서 관아 건물과 성벽 등이 크게 훼손되어 지금은 조양문, 홍주아문, 안회당(동헌), 여하정만이 남아 있다. 2011년 홍주성역사관을 개관해 홍주읍성의 복원모형과 홍성의 위인에 대해 전시되어 있다. 안내문을 읽고 성에 대한 대강의 이해를 하고 성안으로 들어서니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홍주옥이다. 이 옥사는 공주와 더불어 천주교 2대 순교성지로 불린다고 한다. 조선 후기의 홍주 옥은 순교자들이 순교를 준비하던 의미 있는 장소이다. 내포지역의 개방성으로 인해 천주교신자가 가장 많았던 지역으로 홍주는 충청도 전영장이 배치되었던 천주교도의 처형장이 되어 순교자가 많았으며 1792년(정조16) 홍주 옥에서 얼어 죽은 원시장을 비롯하여 신유박해 때 6명, 을해박해 때 1명, 기해․병오박해 때 6명, 병인박해 때 117명 등이 이곳에서 순교했다. 지난 2009년 홍주성 복원에 따른 계획에 의해 이전 건물이 철거되고 공터로 남아있는 자리에 옛 홍주성의 관아 등을 하나 둘 복원했다. 홍주 옥은 천주교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1791∼1870년대) 홍주관아로 끌려온 천주교 신자들이 갖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 굳게 신앙을 증거한 곳이다. 이곳 홍주 옥에 수감되어 꿋꿋하게 순교의 길로 나아갔던 것이다. 현재 천주교 순례길이 조성되면서 많은 천주교신자들의 순례가 이어지고 있다. 홍주성 옥에서 나와 왼편으로 보면 우물이 있다. 이 우물은 2005년 홍주성 복원계획에 따라 대전지검 홍성지청과 대전법원 홍성지청이 월산리로 이전하면서 폐공되었다가 지난 2012년 역사공원 조성에 따라 복원했다. 과거에는 ‘재판소 물’로 불리던 이 우물은 옛부터 물맛이 좋고 병을 치유한다는 소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애용했다고 한다. 이 샘물에 대한 기록은 세종실록, 동국여지승람에도 나온다. ‘세종실록지리지’ 149권에는 “홍주읍성 안에 샘이 하나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도 마르지 아니한다”고 기록돼 있다. 또 1481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홍주읍성 안에 3개 우물이 있으며 그 중 하나는 1872년 제작된 ‘홍주지도’에도 같은 모습이 확인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물을 지나 왼편 언덕 위로 보이는 홍화문 방향으로 오르다 보면 오른쪽으로 탑 같은 게 눈길을 끈다. 바로 병오항일의병기념비이다. 병오항일의병기념비는 ‘애도지비’자리였는데 항일의병 당시 죽은 관군과 일본군을 애도하기 위해 1907년 김윤식이 시를 짓고 이완용이 글을 쓴 비석이었으나 해방 후 이 비석을 없애고 의병기념비를 세웠다. 1905년 을사늑약에 저항해 1906년 항일의병이 일어나 당시 관군과 일본군을 물리치고 홍주성을 탈환했지만 결국 함락당하고 말았다. 그 옆으로는 홍주성 사찰부재가 자리잡고 있다. 조선초기에 억불승유정책을 시행하면서 많은 사찰 소유의 토지와 노비가 몰수되었다는데 홍주성 주변의 사찰부재들도 홍주성 관아와 성벽을 쌓을 때 사용되었다고 한다. 현재 홍주성 성벽을 살펴보면 미륵사탑의 일부로 보이는 유물을 발견되는데 당시 중앙이나 지방의 관청을 신축 하거나 중건할 때 폐사지의 기와를 이용한 사례들 흔적이라고 한다. 사찰부재 옆으로 보면 현대식 건물이 보이는데 2011년 5월에 개관한 홍주성역사관이다. (사진:홍성군) 홍주성역사관은 지상1층, 지하 2층의 건물로 전시홀로 내려가면 1871년도 규장각 지도를 참고해 만든 홍주성복원모형도가 있어 당시 홍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홍성은 많은 역사적 인물을 배출한 고장답게 최영, 성삼문, 김복한, 이설, 한용운, 김좌진 등에 대해 소개 전시도 있다. 홍주성하면 빼놓을 수 없는 홍주의병과 홍성의 독립운동 등을 전시공간을 차지해 조선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홍성인들의 나라사랑의 정신을 느낄 수 있게 했다. 역사관을 나와 오른쪽 홍화문 방향으로 오른다. 홍주성에는 동서남북의 4대문이 있었지만 서문과 북문은 소실되어 터만 남아 있고 동문인 조양문만 온전히 남아 있으며 남문인 홍화문은 지난 2013년 12월 복원해 현재 모습을 갖추고 있다. 홍화문을 나서면 눈앞에 홍성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왼편 성곽을 따라 걷는데 이제서야 홍주성이라는 느낌을 갖게 하는 웅장한 모습을 보여 준다. 서해의 관문이자 홍주목의 치소(治所, 어떤 지역의 행정 사무를 맡아보는 기관이 있는 곳)를 둘러쌓은 홍주성은 1772m에 달했으나 현재는 810여m의 성벽만 남아있다. 홍주목의 36동에 이르렀던 관아 건물이 일제에 의해 훼손되어 현재는 조양문, 홍주아문, 안회당, 여하정만 남아 있다. 홍주성이 정확히 언제 축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초기 왜구로부터 방어하기 위해서 석성으로 쌓은 이후 몇 차례의 중축을 거쳤다. 1870년 홍주목사 한응필에 의해 대대적으로 개축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충청도 4목 가운데 하나인 홍주목의 동헌인 안회당과 1896년 홍주목사 이승우가 건립했다고 전해지는 홍주목사들이 정사를 구상하며 휴식을 취했던 곳으로 정각은 6각형의 수상정인 여하정이 있다. 홍성군청 안뜰에는 보우국사가 왕사가 된 것을 기념으로 심었다고 전해지는 수령 600여년의 느티나무와 홍주관아의 외삼문인 홍주아문이 있다. 홍주성벽을 따라 안내판이 있는 입구로 내려와 다시 시내로 돌아가기 위해 가다가 올 때는 못 보았던 기와대문 건물에 이끌려 가보았다. 현판에 홍주아문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들어온다. 홍주아문은 역대 홍주목사가 행정을 하던 안회당(安懷堂) 외문으로 1870년 당시 홍주목사 한응필이 홍주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이 성의 동문인 조양문의 문루를 설치할 때 세운 것이라 한다. 홍주아문이란 철판을 대원군이 사액한 것으로 우리 나라 아문 중에서도 가장 크고 특이한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군청 정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적 제 231호로 지정되어있다. 홍주아문 안에는 열간 반의 규모인 내삼문과 남과 북으로 행랑을 이어서 지어 담장을 대신했던 큰 건물이 있었는데, 3•1 운동 당시 홍성의 만세사건을 진압시키기 위해 진주한 일본군이 홍성군청을 병영으로 삼고 군수를 추방하는 한편 내삼문을 헐어버렸다. 그 이후 행랑은 보수하지 못해 스스로 무너져 버렸고 오직 외삼문인 홍주아문만 보존된 것이다. 이 역시 홍성군수 조영호가 문화재 관리국의 지원을 얻어 현재와 같이 보수하고, 종전에 이 문을 군청 정문으로 활용하던 것을 막고, 그 옆으로 현재의 정문을 세워 활용케 하여 홍주아문을 오늘과 같이 보존하게 되었다. 현재 홍성군청사로 사용하고 있다. 홍성군청 주변에는 수령 600년이 넘는 느티나무와 주변으로 굵은 느티나무가 많은데 그 중 군청 앞 느티나무가 가장 크고 수형이 아름답다. 고려 공민왕 때 심었다는 이 느티나무는 홍주목사가 부임해오면 제를 올렸던 곳이라고 한다. 홍주아문을 끝으로 오늘의 여정을 마치고 다시 홍성역으로 돌아와 서해 금빛열차에 몸을 실었다. 홍주성 천년길의 역사를 두어 시간 안에 얼마나 느낄 수 있을까? 천분의 일이라도 느끼면 다행이겠다. 하지만 천년, 지나간 시간을 되짚어 보려 했던 건 과거의 역사 이야기는 스쳐 지나간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 남아있어 우리 조상의 시간을, 문화를, 사람을 보는 깊은 거울이었을 것이다. 그 때의 하루하루를 지금 우리는 천 년이라고 부르듯 오늘 걸은 이 작은 시간도 훗날 천년 역사의 한 점이 되기에 아낌없는 시간이었다. 어쩌면 성벽 안 우리 선조들의 숭고한 생활상과 의병들의 저항정신을 이어 받을 수 있어 고마운 발걸음이었다. 홍주성 천년길 가는 정보★자가용 이용 시: 서울(서해안고속도로 출발)-홍성IC(60분 소요)-홍주성(15분 소요)★버스 이용 시: 서울남부터미널/강남터미널-홍성터미널(1시간 간격, 1시간 40분 소요)-홍주성 (도보 30분)★열차 이용 시: 용산/영등포 출발-홍성역(1일 15회 운행, 2시간소요)-홍주성(도보 30분) 홍주성 천년 여행길 코스: 총 거리 8.0km, 소요시간 4시간홍성역.버스터미널-김좌진 장군상-홍성전통시장 입구-장터사랑방(문전성시)-홍성대장간-대교리석불입상-홍주의사총-매봉재-홍주향교-홍주성북문지-홍주성남문-홍주성 역사관-홍성군청(여하정,안회당, 홍주아문)-적산가옥-조양문-명동거리-당간지주-홍성시장벽화-홍성전통시장-홍성역.버스터미널
(남파랑길 7구간) 걷는내내 빠져드는 좌바우도
(남파랑길 7구간) 걷는내내 빠져드는 좌바우도
남파랑길 90개 구간 중 ①영화와 한류의 도시, 대도시와 자연의 반전 매력을 보유한 ‘한류길’(부산∼경남 창원)의 7구간을 걷는다. 코스: 진해구 재덕사거리~창원해양공윈~수치해변~예비군 부대~장천해변~벚꽃공원 거리: 10.8km, 난이도 중, 100% 포장도로시간: 출발 오전 12시 30분, 도착 15시 58분 6코스에 이어 내친김에 7코스를 이어 걷기로 한다.2개 코스, 창원 6,7 코스. 걷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오전에 18km 정도 걷고 시간이 너무 이른 시간이라서 6코스를 마치고 한참을 서있다가 그래 한 코스를 더 가자 했는데 끝날 쯤에는 힘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하루에 30km 가까이 걸었다. 배낭 무게를 체크했는데 20kg.미련하게도 걸었다. ㅠㅠ 갈등에 시간을 보내다가 걷기로 했다.거리가 10.8km. 하루 종일 좌측 바다 우측 도로. 좌바우도. 해양공원이다.짚라인도 있고 타고 싶기는 한데... 해변이 너무 아름답다.빠져들고 싶다.. 해변공원을 지나 행암로를 따라 약 한 시간정도를 가면 수치해안에 이른다.산자락을 병풍처럼 앞으로는 잔잔한 바다의 마을이 수치마을이다. 생선회하면 떠오른 진해의 명소 마을이란다. 사철 어종이 다양하고 풍부해 낚시꾼도 많이 찾는다. 인근에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장군이 왜군을 무찌른 해전으로 유명한 합포가 있다. 배에 사람이 거주하는 공정을 만드는 공장인데 국민 도수 체조를 한다.갑자기 내 평생을 바친 군대 생활이 슬라이드처럼 흐른다. 경치에 취해 생각에 취해 걷다 보니 어느새 10.8km를 걸어 종착점에 도착했다.피곤한 하루 여정을 마친다. 오늘에 숙소는 7코스 끝나는 지점 건너편. 8코스 걷기도 좋아 여기로 정한다. 버스정류장에서 시내가는 버스를 타고 경화파출소 내리면 바로 옆에 오아시스 찜질방이라는 곳이다. 지하에 있는데 물이 좋고 식당도, 매점도 같이 있어서 모든 걸 한 번에 해결 완료.ㅎ
제주도 한 바퀴, 물 때 따라 바닷가로 걷기
제주도 한 바퀴, 물 때 따라 바닷가로 걷기
일기예보엔 오후 비소식이다.지난번엔 출발부터 이슬비가 내려도 잘 걸었으므로 오후에 비가 내린다면 중간 탈출을 해도 됨직해 우선 시작점이 속골에 차량을 두고 날머리인 법환포구에 차량을 주차하기 위해 30분전에 도착했다. 어?제스토리가 달라졌다. 그러고 보니 아주 오랜만에 와 봄ㅋㅋ 제스토리 앞 해녀상에 누군가가 따뜻한 마음을 전했군가슴 따뜻함이 전해져 오더. 잠시 어슬렁거리던 것도 잠시마구마구 비가 쏟아졌다~ ㅠㅠ이건 아닌데? 어쩐다지?하는 수 없이 출발지인 속골로 다시 이동을 했다.다같이 모여서 상의해 봐야 하기로... 수묵화처럼 우산을 받쳐들고 빗줄기와 함께한다.참 알 수 없는 섬나라 날씨여~.정자에서 비를 피하며 일행들을 기다렸다.10시 정각, 모두가 모여 의견이 분분했다.까페순례나 하자는 둥... 그.런.데.거짓말처럼 비가 그친다?? 그럼걸어야겠쥬? 일단 인증샷을 찍고... 다시 한 컷!!그럼 출발~~~~ 미끄러워 바당길을 못걷고 올레 7코스를 걷는다. 그러다 다시 만난 몽돌바당 소원을 담은 맨들맨들한 돌들에 눈길이 가더라 비도 그쳤으니 본격적으로 바닷가로 내려가 걷게 되었다. 때론 네발로 기고반영 샷도 남기면서... 범섬의 해무쑈를 보면서 천천히 이동했다. 큰 돌을 밟으면 그닥 미끄럽지 않고 서두르지 않으면 걸을만하다 누구든다만 돌길에 대한 공포는 없어야 한다 오늘도 실망은 금물이다~선물같은 해식동굴이 짠~하고 나타나줬다.먼저 앞서가던 남성들은 먼저 위로 올라가 못봤다더라~ 깊진 않았지만 이렇게 담아내기엔 충분했다.득템한 기분 누가 알리~ㅎ음 여성들 포스작렬이군. 범섬의 해무 쑈 어느 것 하나 같음이 없고 다 다른 작품 대단하다 자연은.. 자꾸만 발길은 멈췄고멀리 범섬을 바라보며지금껏 걸었던 구간도 눈으로 다시 훑어본다.어머어머...고릴라가 뭘 먹는거 같아정말 그러네?보는 각도에 따라 달랐지만 이 사진은 딱 고릴라 한마리일세. 이 구간이 참 아쉬웠다미끄럽지만 않다면 모두들 저 용암둑?을 걷게 해 동영상을 찍어도 좋았으련만. 아쉬움에 이렇게라도 한 컷 남겨본다. 미끄러우니 패스하고 우회를 했고좌측 문섬과 섶섬, 우측 범섬을 담는다이런 사진 참 좋다!! 범섬으로 가는 배스킨스쿠버 하러가는 걸까?아님 낚시? 하늘이 조금씩 밝아온다.법환포구엔 동서를 가르는 용천수 물이 풍부하다막숙이라 함은 목호(牧胡)의 난 때 최영장군이 이곳 법환포구에 막을 치고 군사를 독려해 목호의 잔당들을 섬멸한데서 유래했단다. 궂은 날씨에도 안전하게 마무리를 하고 단체인증샷!!자전거 타신 분께 부탁해 서로 찍어주고 찍고 품앗이를 했다~ㅎㅎ 그리고점심을 먹어야 하는데...어느 까페로 가서 발코니에 자릴빌려 각자 싸온 도시락을 꺼내 나눠먹고 다시 실내로 들어가 차를 마셨다.‘다린’이라는 까페인데약탕기에 끓여내는 쌍화탕이 보약같던, 아주 독특한 까페를 만나 오랫만에 보약 한사발 들이켰고 그외 수제 메뉴들이 강추!! 다시속골로 걸어와 마무리를 했다.배가 부르니 걸어야 한다며...
치유의 숲, 전남 장성 축령산 편백나무 숲
치유의 숲, 전남 장성 축령산 편백나무 숲
전남 장성군 서삼면과 북일면에 걸쳐 있는 축령산. 축령산하면 독림가(篤林家, 영림계획을 작성해 모범적인 산림경영을 하며 사회적으로도 신망이 두터운 사람 중에서 산림청장 •도지사 •시장 •군수로부터 독림가 인증서를 받은 사람) 춘원 임종국선생(1915~1987)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6•25동란으로 황폐화된 땅에 1956년부터 그가 생을 마감할 때, 1987년까지 21년 간 사재를 털어 조림하고 가꾸어 지금은 전국최대조림 성공지로 손꼽히는 명소이다. 선생은 생전에 나무 심는 일에 모든 가산을 내어주고도 그 일을 멈출 수 없어 키운 나무를 담보로 또 빚을 얻어 계속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결국 그 빚 때문에 삶을 걸고 키웠던 나무들을 다른 사람에게 넘긴다. 다행히도 산림청이 2002년 이 숲을 사들인 뒤 `고(故) 임종국 조림지'로 명명하고 2001년에 선생의 이름을 `숲의 명예 전당'에 헌정했다. 평생 그가 심고 가꾸었던 편백나무와 삼나무들 숲으로 2005년 되돌아 와 수목장(樹木葬)으로 지키고 있다. 축령산 편백나무숲 정상 근처에는 임 선생이 공적비와 그의 아내 김영금 여사가 함께 잠들어 있다. 그래서인지 이 숲은 힐링을 원하는 이들에게는 쉼을, 병들어 아픈 사람들에게는 치유의 공간이 되고 있다. 저 세상에서도 우리에게 숲의 사랑을 주고 있는 것이다. (춘원 임종국선생과 공덕비) 축령산의 또 다른 옛 이름은 취령산, 문수산이다. 일대에는 60년생 이상의 편백나무와 삼나무 등 사철 푸른 상록수림대가 울창하게 조성되어 있다. 축령산 6km의 숲 길은 건설교통부에 의해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되기도 했다. 전남 장성은 예부터 산 좋고 물 좋기로 유명한 곳. 방장산, 입암산, 백암산, 불태산, 축령산, 태청산, 병풍산 등 크고 작은 산들이 어울어져 있는 천혜의 지역이다. 편백나무는 스트레스 치유에 좋은 피톤치드라는 특유한 향내음이 있어 삼림욕의 최적의 장소로 관광객들만 아니라 장기간 머무르며 치유를 원하는 많이 이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유명하다. 축령산 입구 괴정마을에는 민박촌과 관광농원이 조성되어 있고 산 아래 모암마을에는 통나무집 여러 동이 있어 체험하고 체류할 수 있다. 또한 관광을 즐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휴양림을 관통하는 임도를 지나가면 영화촬영지로도 각광을 받는 ‘금곡영화촌’이 또 다른 명소이다. (초창기 초가 지붕이 현대식 기와지붕으로 바뀌었다) 장성 8경의 하나로 꼽히는 금곡영화촌은 50~60년대 농촌분위기를 일부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과거를 소재로 하는 영화나 강원도 산골을 소재로 하는 영화를 찍을 때 자주 애용되는 곳이다. 영화 '태백산맥', '내 마음의 풍금', '만남의 광장', '침향' 등이 여기에서 촬영되었다. 영화를 찍었을 당시의 영화세트장 일부가 여전히 이곳에 남아 볼거리라며 제공하고 있다. 홍연이 살던 그 집이 바로 이 집이다.입구에 영화 '내 마음의 풍금'을 찍은 곳이란 간판이 서있다. 금곡영화촌은. 1950~1960년대 시골 농촌의 전형을 보여준다. 마을 입구 당산나무를 지나 돌담길을 따라 20여 가구 100여명이 옹기종기 모여 산다. 휴양림으로 들어서기 전, 좌측 목조건물이 눈에 띈다. 초가지붕을 얹은 아담한 한옥은 30여평 규모의 금곡 숲속미술관도 있다.. 축령산은 자기 형편에 맞게 걷기와 등산을 즐길 수 있다. 지도에서 보듯이 다양한 코스가 잘 만들어져 있다. 그 중 등산코스는 대강 네 개로 나눠진다. 크게 보면 추암주차장에서 출발해 공덕비를 거쳐 축령산 정상에 올랐다가 건강숲길, 하늘숲길, 산소숲길, 숲내음길을 걸어 내려와 원점에 다다르는데 인근의 북일리 금곡영화촌서 시작하는 코스도 있다. 베테랑 등산인들은 추암리주차장을 들머리로 공덕비, 축령산 정산을 정복하고 장성이 자랑하는 4가지 코스를 순회해 다시 주차장을 날머리로 내려오는 코스를 즐긴다. 축령산 정상은 620.5m로 그리 높지는 않다. 더군다나 산행 들머리의 해발 높아 어렵지 많다.정상에서 하산하는 길을 더 좋다. 건강숲길, 하늘숲길, 산소숲길, 숲내음길 등 약 9km가 조금 넘는 긴 길이지만 힐링의 걸음걸음이 이어지는 길이다. 네 코스의 길은 때로는 직선으로, 때로는 꾸불꾸불 길로 걷는 내내 기분이 좋다. 등산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이런 힐링 산길을 세상 어디도 없다고 한다. 그만큼 축령산은 천상의 길이다. ▲특산품 & 먹거리: 사과, 단감&곶감, 솔잎차, 포도, 잔디 등▲주변 볼거리: 홍길동생가, 필암서원, 장성호, 금곡영화촌, 백양사, 입암산성 등 ▶ 금곡영화마을 인근길: 장성군 북일면 문암리 500번지 ▶ 모암산촌마을을 지나 큰 저수지 길: 장성군 서삼면 모암리 682번지 ▶ 축령산 안내센터 인근길: 장성군 서삼면 추암리 669번지
(남파랑길 6구간) 선인들의 나라 사랑을 느끼며 걷는 창원 애국의 길
(남파랑길 6구간) 선인들의 나라 사랑을 느끼며 걷는 창원 애국의 길
오늘은 남파랑길 90개 구간 중 ①영화와 한류의 도시, 대도시와 자연의 반전 매력을 보유한 ‘한류길’(부산∼경남 창원)의 6구간을 걷는다. 코스: 부산 송정공원~웅천왜성~ 무궁화공원 ~황토돛대노래비~흰돌메공원 ~주기철목사기념관~진해구 재덕사거리걷는 날: 2020년 2월 4일 화요일 맑음. 바람, 햇살 좋음거리: 16.8Km, 난이도 중, 100% 포장도로시간: 출발 아침 8시, 도착 12시 15분 남파랑길 6구간은 부산 끝자락 강서구 송정공원을 출발해 창원으로 진입하는 길이다. 오랜만에 전 구간이 포장되어 있는 걷기 편한 길이다. 새벽잠을 설쳤다. 찜질방에 분위기는 익히 알아 참을 수 있는데 새벽 5시부터 통화하는 몰 매너 형님(?)의 새벽 긴 통화에 때문이었다. 말도 못하고 속만 끓이다 헛기침 한번하고 나와 버렸다. 어제 종료지점, 송정공원에 왔는데 출발시점 간판이 안보여 한참을 두리번거리며 헤맸다. 어느 친절한 아저씨가 투박한 손가락으로 방향을 알려주셨다. 감사. 친절은 언제나 행복을 준다 ㅎ. 부산 5코스와 창원 6코스 거리는 50 미터쯤 떨어졌었다.마음의 거리만큼일까? 지도를 보니 오늘 걸을 길이 14.1Km, 약 5시간 거리란다. 보아야 할 명소는 임진왜란 당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少西行長)가 제2기지로 활용했던 웅천 안골왜성, 이미자씨가 불러 히트한 노래인 황포돛대노래비, 항일독립운동가 주기철목사기념관이다. 그리고 무궁화공원도 있다. 그러고 보니 이 길은 애국의 마음이 느껴지는 길이라는 생각이다. 어디서나 인증 샷은 필수. 인증 샷 찍어주고 출발! 대구에 속을 다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속도 다 보여줄까? 부산에서 창원 6구간 시작 기점은 꽤 걸어야 한다. 두런두런 구경을 하며 걸으니 창원에 진입한 거 같다. 용원마을에 의창수협을 대구라는 생선이 할복 후에 장렬하게 투쟁하고 있다. 춥다. 뜨거운 물이라도 주소. 중간 점검하는 작은 간이 알림판 귀엽다. 지금은 웅동만을 중심으로 동쪽에 안골동이라 불리는 작은 포구, 안골포(安骨浦). 웅동만의 서쪽은 남산에 웅천왜성이 있고 안골대교와 웅천대교가 가로놓인 좁은 수로가 있다. 남해 바다로 들어가고 싶다… 아까 그 대구하고. 첫 도착지는 웅천안골왜성(熊川安骨倭城). 진해구 남문동에 있는 이 성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倭軍)이 쌓은 일본식 성곽(왜성)이다. 진해구 남산 꼭대기에서 능선을 따라 산기슭으로 뻗쳐 쌓은 산성으로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이 장기전에 대비하기 위해 우리나라 남해안에 축조한 18개의 성 가운데 하나이다.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少西行長)가 진을 치고 왜군의 제2기지로 활용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사진:창원시) 정상부에 본성(本城)을 두고 아래에 2개의 성을 배치하였고 육지방면의 방비를 철저히 하기 위하여 남쪽으로 긴 나성을 둘렀다. 진해구 웅동2동 안골로에는 우리나라 국화인 무궁화에 대한 모든 것이 담겨있는 무궁화공원이 있는데 전 국토 무궁화 심기사업으로 국비를 지원받아 조성되었다. '영원히 피고 또 피어서 지지 않는 꽃'이란 꽃 말을 지닌 무궁화는 기록에 의하면 고조선 이전부터 하늘 나라의 꽃으로 귀하게 여겨왔다고 한다. 공원이 위치한 안골포 일대는 임진왜란 때, 1592년 이순신장군의 조선수군이 일본수군을 격멸하며 호국의 혼이 깃든 역사의 고장으로 애국의 상징인 무궁화동산을 이곳에 조성하게 되었다. 호국선열을 기리는 특별한 뜻이 담겨있어 한번 더 유심히 돌아보게 되었다. 다음 코스인 황포돛대 노래비를 찾아 걷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시대에 우상, 이미자 쌤의 노래다. 귀한 음악 소리를 들으니 힘을 얻는다. 대중가요로서 널리 알려진 ‘황포돛대’는 진해 출신인 고 이용일(이일윤)씨의 노랫말에 1967년 백영호씨가 작곡해 이미자씨가 불러 히트한 노래이다. 노래비는 진해 바다 위에 황포돛대가 떠있는 모습을 모티브로 가로 5m, 세로 6m, 높이 7m인 화강석으로 2개의 기둥과 하단부분 화강석에 황포돛대 노래가사가 새겨져 있고 노래가 계속 흘러나오게 되어 있다. 창원에도 걷기 좋은 지역의 길이 있다. ‘진해 바다 70리길’이다. 진해바다 70리 길은 진해수협을 시작점으로 속천항 ~ 행암항 ~ 합포승전비 ~ STX조선소 ~ 해양공원 ~ 삼포항 ~ 제덕항 ~ 흰돌메공원 ~ 영길만 ~ 안골포 굴강까지 총 29.2km, 총 7개 구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중 6구간이 흰돌메길로 남파랑길 창원 6구간과의 일부와 겹친다. (사진:창원시) 흰돌메공원은 옛부터 흰바위나 하얀돌이 많은 곳이라 하여 이름 붙여졌다고 하는데 아름다운 숲속공원으로 신항만 현장이 한 눈에 바라다 보이는 전망을 자랑하는 산림공원이다. 특히 웅비대는 범선 모양으로 만들어져 진해전경, 부산신항만과 연결되어 있는 넓은 바다가 수평선 너머로 넓게 펼쳐져 있다. 무료 망원경으로 멀리 진해 작은 와성마을까지 조망할 수 있다. 흰돌메공원에서 약 3Km를 걸어 주기철목사 기념관에 도착했다.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거부와 항일운동 등으로 체포되어 옥중에서 순국한 독립운동가이며 목자이신 주기철목사님을 기리는 기념관이다. 주기철(1897~1944) 목사는1897년 11월 25일 경상남도 창원군 웅천면 복부리(현재 진해시 웅천 1동) 태생으로 일제 강점기 때 창씨개명과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주동하다 5차례의 옥고 끝에 향년 48세의 나이로 옥사했다. 1944년 평양 형무소 병감에서 순교한 주기철 목사의 100여 점의 유품들을 전시하고 있으며 전시실과 영상실, 자료실 등이 마련되어 있다. 항일 정신을 기리고 근대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교육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주목사님을 생을 생각하니 숙연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기념관 앞에서 서성이다 하늘을 올려다 봤다. 갑자기 내가 부끄러워지는 이유는 뭘까? 무거운 마음으로 약 20분을 걸어 오늘의 마지막 구간인 재덕사거리에 도착하니 다음 걸을 7구간 안내판이 눈에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