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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역사를 건강하게 즐길 수 있는 관악산 둘레길
문화, 역사를 건강하게 즐길 수 있는 관악산 둘레길
서울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은 가봤을 관악산과 삼성산, 그 속에 숨져진 길이 있다. 관악산과 바로 옆에 있는 삼성산을 오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관악산 둘레길은 색다른 경험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1, 2, 3 구간으로 나누어져 있어 자기 능력에 맞게 살살 걸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전국 지방자치단체들이 둘레길을 개발해 열고 있는데 관악산 둘레길도 관악구가 개발한 길이다.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아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걷고 있지는 않아 지금이 한 번 걸어보기에는 적기이다. 관악산을 둘러싼 평탄한 숲길을 걸으면서 자연과 문화, 역사를 건강하게 즐길 수 있도록 조성된 길이다.구간거리 : 15㎞(6~7시간 소요)구간경로 : 까치산생태육교 ~ 낙성대공원 ~ 관악구청~ 관악산공원 ~ 돌산 ~ 삼성산성지 ~ 난우공원 ~ 신림근린공원 관악산 둘레길은 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들머리는 사당역 6번 출구를 나와 낙성대역 방면으로 오르다 보면 까치산 생태육교가 보인다. 바로 그 초입 좌측에 출발 표지판이 있다. 여기가 무당골 ~낙성대공원~서울대까지 이어지는 길이 1구간이고 다시 서울대 일주문을 통과해 관악산 방면으로 20여 미터를 오르면 우측에 2구간 입구 표지판이 있다. 여기서 시작해 보덕사 ~ 삼성산 성지~ 산장약수터~산성아파트까지가 2구간이다. 마지막 3구간을 산성아파트 방향으로 신호등을 건너 우측으로 있는 표지판을 보고 오르면 된다. 이후 배수지 공원, 건우봉, 난우공원을 지나 신림근린공원(호림박물관)까지 오면 도는 구간이 끝나게 된다. 1,2,3구간은 약 15㎞에 이르는 길로 무리가 되는 사람들은 1구간을 마치고 서울대에서 끝나고 세 번에 나누어 걸어도 되고 어느 정도 걷기에 익숙한 분들이라면 하루에 모두 걸어도 좋다. 3구간을 하루에 걸을 경우 1구간이 끝나는 서울대 입구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는 시간까지 총 7시간 정도 걸린다고 보면 된다. 관악산 둘레길은 관악산과 삼성산을 직접 올라가지는 않지만 그래도 구간 구간에 약간의 오르막 길이 있고 이 오르막과 내리막은 3구간 내내 계속된다. 따라서 무리하지 말고 나누어 걷는 것도 방법이다. 1구간은 좌축에 관악산 정상인 연주대를 보며 걸을 수 있고 2 구간은 삼성산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어 수려한 자연 및 생태경관을 감상할 수 있고 천주교 삼성산 성지 등 역사•문화를 배울 수 있는 흥미로운 길이기도 하다. 1,2,3 구간을 연결하다 보니 지금은 도시 개발로 중간 중간 도로를 거쳐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초보자라면 이 연결지점에서 많이 헤매게 된다. 1구간 낙성대 역을 향해 가는 산길이 끊어지는 지점인 관악보건서 옆길을 찾아는 도로와 낙성대에서 나와 서울대 방향으로 올라가는 영어마을 옆길도 잘 못하면 놓치기 쉬운 길이다. 1구간이 끊나는 서울대정문 앞으로 가는 길고 일부 사람들은 산길을 이용하지 않고 그냥 도로를 이용해 가는 사람들이 있지만 여기는 제대로 된 구간은 아니다. 또한 3구간 시작점도 헛갈리기가 싶다. 2구간의 날머리인 산장 약수터까지는 숲길이 이어지지만 산장아파트에서 끊긴다. 난곡길에서 다시 도로를 건어 산장 아파트 옆 숲길을 찾아야 3구간이 시작된다. 여기서부터 마지막 3구간 날머리인 신림근린공원까지는 쉽게 길을 찾을 수 있다. ◐구간 내 명소3구간 날머리 부근에 위치한 호림박물관은 윤장섭 선생이 출연한 유물과 기금을 토대로 설립됐다. ‘호림(湖林)’은 윤장섭 선생의 아호(雅號)다. 1981년 7월 성보문화재단을 설립하고 이어 1982년 10월 서울시 강남구 대치동에 호림박물관(湖林博物館)을 개관했다. 그 후 1996년 3월 관악구 신림동에 박물관을 확장•신축해 1999년 5월에 재 개관했다. (사진:호림박물관) 신축한 호림박물관(www.horimmuseum.org)은 연건평 1400평 규모의 지하1층 지상 2층의 건물에 4개의 상설 전시실과 1개의 기획전시실, 야외전시장, 수장고 등 전시 관련시설과 커피숍, 기프트숍 등의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토기(3000여점), 도자기(4000여점), 회화전적류(2000여점), 금속공예품(600여점), 기타(400여점) 등 1만여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이 중 44점의 유물이 국가문화재로 지정(국보 8점, 보물 36점) 돼 국내외에서 소장품의 다양성과 질적인 면에서 주목받고 있는 박물관이다. 고려 명장 인헌공 강감찬 장군의 탄생지인 낙성대 공원 내에 말을 타고 호연지기를 뽐내는 강감찬 장군의 동상이 있다. 낙성대공원은 고려 때 거란족의 침입을 물리친 귀주대첩의 영웅 인헌공 강감찬 장군(948∼1031)의 탄생지(관악구 인헌동 228번지)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곳이다. 1973년 서울시가 장군의 슬기와 용맹을 국가 안보의 의표로 삼고자 출생유적지를 정화하고 사당과 부속건물을 신축했다. 당초 봉천동 218번지에 있던 석탑을 이곳으로 이전하고 그 옛터에는 따로 유허비를 세워 사적지임을 표시했다. 낙성대공원 동쪽에 ‘안국사’라는 사당을 지어 강감찬 장군의 영정을 모셨다. 정면에는 외삼문인 안국문과 내삼문을 세웠으며 문 안에 낙성대 탑을 옮겨와 안치했다. 또 탑 맞은편에는 사적비를 세워놓았다. 안국사는 고려시대 목조건축양식의 대표 건물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을 본떠 세웠으며 정면 5간, 측면 2간의 팔각 청기와 지붕이 올려져 있어 매우 웅장한 느낌을 준다. 모든 구간을 끝내고 신림 근린공원애서 남부순환로로 나와 신림역 방향으로 약 10분만 걸으면 유명한 신림동 순대타운이 있다. 신림동 순대타운은 약 300여 개의 크고 작은 상가들이 모여 있는 관악구의 대표적인 먹거리 타운으로 순대집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아예 건물 전체가 모두 순대집인 것들도 몇 개가 있다. 집집마다 맛의 차이는 있지만 ‘순대 곱창 볶음’은 특유의 매콤한 맛 때문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다. (글:단무원심)
소금밭이 생태공원으로, 인천 소래습지생태공원
소금밭이 생태공원으로, 인천 소래습지생태공원
인천의 유명한 소래포구 어시장과 인접해 있는 소래습지(濕地, wetland, 물기가 있는 축축한 땅) 생태공원은 소래염전(蘇萊鹽田)이 있던 자리를 인천광역시가 새롭게 생태공원으로 조성한 곳이다. 1996년까지 소금을 직접 생산하기도 했으며 염전 너머로 하루에 2번씩 바닷물이 들어와 갯벌을 이루던 지역이다. 생산된 소금을 실어 나르기 위하여 배가 들어왔던 흔적과 기차의 지금도 남아 있다. 소래염전은 인천광역시 남동구 논현동, 경기도 시흥시 방산동, 포동, 월곶동, 장곡동에 있던 염전으로 조선총독부에서 건설한 제4기 염전 중 하나이다. 1935년부터 1937년에 걸쳐 준공되어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 하에서도 상당한 소금을 생산했으나 제염업이 사양산업이 됨에 따라 채산성악화로 1996년 7월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소래염전은 바닷물을 저수지, 두 개의 증발지, 결정지를 거쳐 소금을 생산했는데 인부들은 고된 작업을 거쳐 소금을 만들었다. 지금도 염전의 흔적으로 소금창고와 가시렁차(사진)가 남아 있다.(가시렁차는 ‘가소링차(가솔린차)’가 와전된 것으로 추정) (사진:오모군-자작 CC BY 3.0 https://commons.wikimedia.org) 조선 시대까지 이용된 전통적인 제염법은 자염법(煮鹽法)으로 썰물 때의 갯벌을 갈고 말리기를 반복하여 소금기를 농축한 개흙에 바닷물을 통과시켜 만든 함수(鹹水)를 끓여서 소금을 생산하는 방식이었다. 당시에는 황•남해안뿐 아니라 동해안에서도 염업을 행했는데 전국 생산량의 50%를 전라남도에서 생산하였고 경기도에서는 남양에서 가장 크게 소금을 산출하였으며 안산, 수원, 통진, 부평, 인천 등에도 이름난 염전이 있었다. 소래염전은 염전에 적합한 입지였다. 소래염전 일대는 조선 시대부터 전통적인 자염법으로 제염을 했던 곳으로 조간대가 광활하고 평탄하며 갯벌의 토질은 점토와 모래가 절반씩 구성하고 있어 염전 바닥을 다지고 물을 증발시키기에 좋다. 조석의 차가 매우 커 수분을 증발시킬 시간이 충분히 확보되며 유입되는 하천도 소하천뿐이라 바닷물의 염도도 낮지 않다.(위키백과) 소래에서 생산한 소금은 과거 수인선 철로로 인천항으로 수송해 수도권으로, 국외로는 일본과 만주로까지 수송되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는 남북 분단으로 38선 이남 지역에 남은 염전은 연간 도합 10만 톤 가량의 소금을 생산할 수 있는 주안, 남동, 군자, 소래염전이 거의 전부여서 남한에서는 소금 부족 현상이 심했다. 그러자 정부는 소금을 수입하다가 민간에게 염전 운영을 허용, 황해와 남해안의 간석지에 많은 민영 염전이 건설되고 1955년에서야 처음으로 소금을 자급자족하게 되었다. 소래염전 부지는 1997년 폐염 이후 방치되다가 1999년 6월 1일, 인천광역시가 남동구 논현동 일대의 소래염전 부지를 활용한 소래습지 생태공원을 처음 개장했다. 그 이후 몇 차례 확장을 거쳐 2009년 7월 156만 1000m2 규모로 완전 개장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08년 7월에는 공원 안에 생태전시관도 열었다. 다소 생소한 ‘습지’는 물기가 있는 축축한 땅을 말하는데 내륙습지와 해안습지로 구분하고 있다. 내륙습지는 육지 또는 섬 안에 있는 습지이며 해안습지는 말 그대로 해안 경계선이 있는 습지이다. 소래습지는 소래 해안선에 있으니 해안습지이다. 또 물기에 따라 담수, 기수, 염수로 나뉘는데 소래는 염수습지뿐 아니라 기수(해수와 담수가 혼합되어 있는 곳의 염분이 적은 물)습지도 있다. 소래습지생태공원은 갯벌, 갯골과 폐염전 지역을 다양한 생물군락지 및 철새도래지로 복원시켰으며 각종 해양생물을 관찰하고 천일염을 생산했던 시설물과 자료를 볼 수 있는 전시관과 다양한 동, 식물을 탐구해 볼 수 있는 자연학습장, 그리고 광활한 갈대 및 풍차, 산책로, 쉼터 등이 마련되어 있다. 인천 시민의 편안한 휴식공간으로 활용될 뿐만 아니라 수도권 등 각지에서 찾는 명소이다. 천천히 공원 모두를 다 둘러보려면 4시간 이상이 걸리지만 보고 싶은 곳만 골라 볼 수 있도록 다양한 코스가 준비되어 있어 언제나 편하게 돌아 볼 수 있다. 또한 걷는 중간중간에 원두막이 설치되어 있어 쉬엄쉬엄 갈 수도 있다. 다만 습지라는 특성상 숲이 없어 태양이 작열할 때 걷기에는 다소 불편할 수 있다. 공원 내 시설물로는 조경시설(관찰데크 5개소, 조류관찰대 8개소, 생태관찰대 2개소, 목교 11개소, 풍차 3개소 등), 수목식재(이팝나무 외 중국단풍, 느티, 선주목, 해송, 박태기, 말발도리, 좀작살, 진달래, 해당화, 순비기나무, 영산홍, 자산홍, 갈대, 염습지 식물-퉁마디, 갯민들레, 칠면초, 갯개미취)와 기반 시설로는 부인교, 염전저수지, 습지 4개소 등이 있다. 또 염전(저수지→증발지→결정지), 탐방로, 갯벌체험장, 생태전시관 1개소, 해수족욕장 1개소 등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갖추고 있어 꼭 한 번 다녀올만한 곳으로 적극 추전한다. 특히 소래습지생태전시관은 습지 생지생태전시관은 습지 생명과 갯벌 환경의 모든 것을 총망라하는 대표적인 해양체험 학습관으로서 자라나는 세대에게 자연을 배우고, 익히고, 체험할 수 있는 국내 최고의 습지생태 전시실로 갯벌을 아끼고 보호하는 생명 존중의 인식을 정립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해수족욕장은 한 번에 1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지하 150m 바닷물을 끌어올려 평균온도 40도의 미온수의 제공으로 족욕할 수 있는 시설로 무료로 개방하고 있다. 소래습지생태공원은 독특한 경관으로 웨딩 사진 등 사진 촬영 명소로도 유명하다. 특히 갈대 숲을 배경으로 여러 대의 풍차가 선 모습이 이국적 풍경으로 사랑을 많이 받는다. 소래염전을 소재로 한 문학 작품도 많다. 시인 이가림(1943~)은 인천시에 거주하면서 ‘소금창고가 있는 풍경’이라는 소래염전의 역사를 담은 시를 썼으며 인천 출신 시조시인 이광녕(1946~)은 소래염전을 배경으로 ‘아버지와 소래염전’을 지어 그 시비(詩碑)가 소래습지생태공원내에 있다. 영화 ‘엄마없는 하늘아래’(1977년), 조해일 원작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81년)이 폐염 이전의 소래염전에서 촬영한 작품이다.(글:단무원심)
피톤치드 뿜뿜 서울대공원 산림욕장 둘레길, 가을 은행나무 길은 환상
피톤치드 뿜뿜 서울대공원 산림욕장 둘레길, 가을 은행나무 길은 환상
북한산, 도봉산, 관악산 등 수도권의 명산을 오르는 것도 좋지만 동물원도 있고, 놀이 동산도 있고, 미술관도 있고 여기에 더불어 산림욕 길까지 갖춘 팔방미인 길이 있다. 과천 청계산 자락의 서울대공원 산림욕장 들레길이 그곳으로 산에 오르는 힘든 수고가 없이도 누구나 편하게 살방살방 걸을 수 있는 편한 길이다. 더군다나 전철 한 번으로 걷기와 산림욕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서울대공원은 수도권 어디서나 접근성이 뛰어나다. 그런데 대부분 서울대공원의 동물원과 놀이시설은 잘 알지만 걷는 즐거움을 주는 길, 대공원 외곽을 둘러 조성된 둘레길들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지 않다. 서울대공원에는 ①호숫가 둘레길, ②동물원 둘레길, ③산림욕장길 등 총 3개의 둘레길이 있는데 한 개는 무료 두 개는 입장료를 내야 걸을 수 있다. 호숫가 둘레길(노란선 부분)청계저수지 호숫가를 한 바퀴 도는 산책길이다.걷는 내내 호수를 바라보고 걸을 수 있는 편한 길로 총 2km, 약 40분 가량이면 걸을 수 있다.특히 청계저수지 둑방길은 멋진 청계산, 관악산을 눈에 담을 수 있는 조망 좋은 길로 누구나 쉽게 걸으며 힐링할 수 있다. 산책로 주변은 메타세콰이어, 계절 꽃단지, 서울대공원에서만 볼 수 있는 코끼리열차길 등을 있다. (걷는 코스: 해오름다리~미리내다리~동물병원~공원관리사무소) 동물원 둘레길 (주황선 부분, 유료입장 후 이용 가능)동물원 입구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구입하고 원앙다리를 건너 동물병원 초소부터 동물원 둘레를 크게 돌아 북문까지 어지는 외곽순환길이다. 총 4.5km로 소요시간은 약 1시간 30분 정도가 걸린다. 봄에는 왕벚나무, 여름엔 느티나무가 우거져있으며 특히 가을에 가장 인기가 좋은 이 길은 서울시가 선정한 아름다운 단풍길로 선정된 곳일 만큼 아름답다.(걷는 코스: 동물병원초소~외곽순환도로~동물원 북문) 산림욕장길 (언녹색 선 부분, 유료입장 후 이용 가능)서울대공원의 하이라이트 야트막한 산길로 동물원 호주관 뒤에서 시작해 청계산 능선을 따라 동물원 외곽 북문입구까지 이어진 산림욕길이다. 세 군데 둘레길 중 가장 긴 길로 총 7km, 약 2시간30분 가량이 소요된다. 걷는 곳곳에는 약수터와 휴식공간이 있고 특히 맨발 구간은 백미다. 중간중간 탈출할 수 있는 샛길도 곳곳에 있어 힘들면 걷다가 포기할 수도 있다. 이 길은 걷는 내내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길로 숲이 좋아 산책과 운동하려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숲길이다.(걷는 코스: 호주관 입구 ~ 동물원 북문입구) 서울대공원 산림욕장길은 1994년 서울대공원 외곽 청계산(621m) 능선에 8km의 길을 정비해 조성돼 소나무, 팥배나무, 생강나무, 신갈나무 등 470여종의 식물과 다람쥐, 산토끼, 족제비, 너구리와 꿩, 소쩍새, 청딱따구리 등 35종의 새들이 정답게 살고 있는 숲길이다. 도심에서 지하철(4호선 대공원역 2,3번 출구)을 타고 갈 수 있는 멀지 않은 길로 선녀못이 있는 숲, 원앙이 숲, 밤나무 숲, 독서의 숲, 사귐의 숲 등 11개소의 휴식공간과 옹달샘, 맨발로 걷는 길 등 1, 2, 3, 4의 4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적당히 있는 길로 휴식과 함께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전 코스가 부담되는 초보 걷기족은 4코스 중 산림욕장길 내 3개의 샛길(남미관 샛길, 저수지 샛길, 맹수사 샛길)을 통해 1시간 내외의 길을 선택해 걸어도 좋다. 산림욕장길에는 총 6개소(자연과 함께하는 숲, 얼음골 숲, 전망대, 쉬어가는 숲, 독서하는 숲, 사귐의 숲)에 피크닉테이블이 있는 데크쉼터가 조성되어 있어 힘들면 쉬어가도 된다. 또한 약수터도 있어 시원한 약수를 마실 수 있다. 산림욕장 길은 피톤치드가 나와 심신 안정을 안정시키는데 살균, 살충효과가 있다. 피톤치드는 10~12시 사이가 발산량이 가장 많다고 하니 이왕이면 그 시간에 맞추어 가는 게 좋겠다. 천연림 속 자연학습장인 서울대공원 산림욕장은 생명의 숲 국민운동본부, 유한킴벌리, 산림청이 공동주최한 제8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아름다운 숲길’ 부문을 수상할 정도로 아름다운 숲 길이다. 365일 개방이 되며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개장되는 산림욕장 길은 입장료(3,000원, 경로 우대증 소지자 면제)를 내야 하지만 입장료 이상의 충분한 가치가 있는 길로 특색에 따라 총 4개 구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1코스는 호주관 뒤쪽에서 남미관 샛길까지 약 2.2Km로 60분이 소요되며 선녀못이 있는 숲, 아까시나무 숲, 자연과 함께 하는 숲, 얼음골 숲, 못골산막, 송촌산막이 있다. 2코스는 남미관 샛길에서 저수지 샛길까지 1.7Km로 50분이 소요되며 생각하는 숲, 쉬어가는 숲, 원앙이 숲, 얼음골 산막, 청계산막이 있다. 3코스는 저수지 샛길에서 맹수사 샛길까지 1.4Km로 30분이 소요되며 독서하는 숲, 밤나무 숲, 망경산막, 밤골산막이 있다. 4코스는 맹수사 샛길에서 산림전시관까지 1.6Km로 35분이 소요되며 사귐의 숲, 소나무 숲이 있다. 대공원 산림욕장 길은 연인, 친구, 가족 단위의 방문객이 많다. 산림욕장은 생각보다 크다. 3시간 정도가 걸리니 그리 작은 규모는 아니다. 한 여름에도 햇빛을 보지않고 걸어도 좋을 만큼 끊임없이 이어지는 나무와 길이 시원한 풍경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곧 다가올 단풍철에도 수많은 나무와 호수와 물이 흐르는 풍경은 한편의 영화처럼 우리 곁에 다가온다. 가을 은행나무 길은 가히 환상적으로 꼭 가보길 추천한다. 길게 걷기가 힘들다면 50분 정도만 걸을 수도 있다, 각 코스마다 탈출할 수 있는 길이 있기 때문이다. 선녀못이 있는 숲, 사귐의 숲 등 11개의 테마로 설치된 휴식공간도 곳곳에 있다. 특히 '생각하는 숲' 부근에는 맨발로 걸을 수 있는 450m 구간도 있다. 황토 흙을 맨발로 밟으며 흙의 감촉을 맛볼 수 있는 멋진 길이다. 이밖에 얼음골 숲, 원앙의 숲, 옹달샘 등 휴식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그밖에 1시간, 2시간 코스로 다녀오고 싶다면 샛길에서 출발하면 된다. 1, 2, 3, 4의 각 구간 초입에서 외곽길을 따라 남미관 샛길, 저수지 샛길, 맹수사 샛길이 잘 나 있다. 화려했던 여름의 흔적들이 사라지고 숲은 가을을 맞는다. 겨울이 오기 전에 한 번 얼른 다녀 오라고 권하고 싶은 길이다. 산림욕장 둘레길이지만 청계산 자락에 있기에 너무 편하게 생각하지 말고 아웃도어나 경등산화 정도는 갖추고 출발해야 한다. 겸허한 마음으로 걸어야 자연과 재대로 대화가 된다는 상식으로 이 가을을 즐겨보자. 산림욕(woods bathing, green shower)이란? 산림내에 청정한 대기를 쐬는 것. 특히 수목에서 발산되는 피톤치트라고 불리는 방향성 물질은 살균효과가 있으며 건강에도 좋은 효과가 있다. 1930년에 구소련 레닌그라드대학교(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의 V.P.토킨 박사가 식물이 상처를 입으면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주위의 미생물을 죽이는 물질을 만들어내는 현상에 착안하여 이름을 붙였다. 피톤은 ‘식물’, 치드는 ‘죽인다’는 의미로 이것은 미생물에는 유독하지만 인체에는 유익하여, 사소한 피로나 감기는 숲 속에 머물러 있으면 치료된다고 하여 유럽에서는 삼림요법이 성행한다. 그러나 피톤치드와 그 관련 연구는 초기 단계인데, 삼림의 공기를 맑게 할 정도의 살균력이 과연 피톤치드에 있느냐 하는 의문이 제기되었을 뿐만 아니라 알레르기 유기성이 문제되기도 했다.(두산백과)
홍성 랜드마크 홍주성, 홍성의 역사가 녹아있는 천년 여행길
홍성 랜드마크 홍주성, 홍성의 역사가 녹아있는 천년 여행길
오래 전 서해안 고속도로가 생기기 전에는 처가가 있는 보령(대천)을 가려면 꼭 홍성시내를 거쳐 지나가야 했다. 30여년이 지난 최근에 들렀음에도 불구하고 홍성은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언제부턴가 지방자치단체들은 앞다투어 관광 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홍주성 천년여행길도 그렇게 개발이 되었으리라. 이 길을 가지 않았다면 홍성이 천 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고장이라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또한 김좌진, 한용운, 고려 말의 명장 최영 장군, 사육신 성삼문 등 뛰어난 역사적 인물들이 이 고장 출신이었다는 것도 모를 뻔 했다. 여행은 이런 무지를 깨우쳐 주기에 늘 걷고 또 걷는다. 고려시대에 운주로 불리기 시작한 이후 홍주로, 그리고 일제강점기때 홍주군과 결성군이 합쳐져 오늘의 홍성이 되었다고 한다. 홍성을 말할 때 홍성의 중심지에 위치한 홍주성을 빼놓을 수 없는 랜드마크이다. 이 홍주성을 키포인트로 하는 홍주성 천년여행길은 홍성의 천년 역사가 그대로 스며있는 수학의 길이다. 외지인들은 보통 홍성역이나 홍성버스터미널로 도착하기에 여기를 출발점으로 잡으면 된다. 필자는 홍성역에 도착해 온전한 코스는 다시 걷기로 하고 오늘은 두어 시간 정도 지도를 보고 중요 거점만 맛보기로 한다. 역에서 나오니 저 앞에 작은 봉우리와 성벽 같은 모습이 어슴프레 보이는 걸 보니 그 방향으로 걸어 내려간다. 홍성역 앞 광장에는 최영, 성삼문, 한용운, 김좌진 등 이 지역 출신 역사적 인물들의 조형물이 있어 홍성이 유서 깊은 고장임을 느끼게 한다. 홍성역에서 내려가는 길에는 홍성의 역사를 알려주는 안내판들이 있어 읽으면서 살살 내려간다. 역앞 도로가 끝나는 사거리 우측에 홍성관광안내소가 있어 홍주성 천년여행길 안내 자료와 지도를 받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한다. 버스터미널을 지나 처음 마주하게 되는 것이 독립운동가 백야 김좌진장군 동상이다. 한 손으로는 칼을 쥐고 다른 한 손은 곧게 들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모습은 그 날의 기상을 느낄 수 있게 한다. 동상 옆에는 김좌진장군의 검이 있는 작은 조각물도 전시되어 있다. 백야 장군은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에 가장 큰 승리를 안겨주었던 청산리 전투를 지휘했던 만주벌 호랑이 장군으로 불리었다. 홍성군 결성면에는 백야 장군의 생가와 백야기념관, 그리고 사당인 백야사와 백야 공원이 있어 나중에 한 번 다시 가보려 한다. 백야 장군상을 뒤로 하고 길을 건너면 바로 홍성전통시장 초입이다. 1943년에 문을 연 홍성전통시장은 약 75년의 역사를 자랑하는데 이 시장에는 홍성장터보물 10가지가 숨어있다. 대교리 석불, 홍성대장간의 모루와 나무통, 부의함, 보신알(곤계란), 재봉틀, 뿅뿅다리, 홍성시장벽화, 꽃상여, 되(됫박), 돈궤 등이 그것으로 게스트 하우스이자 장터 사랑방인 '문전성시'라는 이름의 카페 앞 지도를 보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사진:홍성관광 홈페이지) 천수만의 해산물과 내포평야의 농산물이 넘쳐나 홍주성 안에 여느 읍성과 다르게 장터가 형성되었는데 그게 바로 홍성전통시장의 시작이다. 160여년의 전통이 이어지고 사통팔달의 홍성시장은 상설장과 1일과 6일에 서는 오일장이 있다. 홍성 오일장은 인근의 천수만에서 잡은 신선한 해산물, 내포평야의 농산물이 어우러지는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는 풍요의 장을 살살 걷다 보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여기저기 둘러보는 재미가 있고 또 주전부리 할 것도 많아 눈과 입이 즐거운 우리 어머니, 아버지의 장이다. 넉넉한 인심과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로 장이 서는 날에는 귀까지 즐거워 지는 행복한 풍경을 주는 맑은 품이다. (사진:홍성관광 홈페이지) 10개 보물은 정해진 시간이 있어 다 찾아보기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시장 안에 있는 보물은 다 둘러볼 요량이다. 먼저 철물점 골목으로 들어서면 홍성대장간(충남도 무형문화재 제160호)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3대에 걸쳐 100년의 세월을 이어오고 있다는 대장간에는 달궈진 쇳덩이를 올려 두드리는 받침대인 모루와 그 옆에 다듬어진 쇳덩이 푹 담가 식히는 나무물통이 명물이다. 일제 때부터 낡은 목조의 장옥 건물에서 60여년을 넘게 이어오는 대승철물점에는 그 당시부터 사용하던 돈괘와 주판이 명물이다. (사진:홍성관광 홈페이지) 시장을 장남 코끼리 다리 만지듯 대강 돌아보고 나오면 눈앞에 작은 개천이 흐르는데 홍성천이다. 홍성천에는 복개한 도로와 버스 등이 다니는 철골 다리도 있지만 또 다른 보물인 뿅뿅다리가 옛 정을 느끼게 한다. 옛날 공사장에서 이동할 때 설치해 놓았던 구멍 송송 뚫린 철판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뿅뿅다리인가 혼자 생각해 본다. 정겨운 다리를 건너 다시 홍주성 천년길을 찾아 나선다. (사진::홍성관광 홈페이지) 전통시장과는 다른 도시적 분위기의 홍성의 명동을 걸어 가다 처음 마주치는 역사물이 조양문이다. 조양문(朝陽門)은 홍주읍성 4대문 중 하나로 홍주성의 동문으로 서문인 경의문, 남문은 문루가 없는 홍예문, 북문인 망화문의 문액은 흥선대원군이 친필로 하사하였으나 망실되었다. 조양문은 1906년에 을사늑약에 반대한 홍주의병과 일본군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북문은 역대 목사들이 문루에서 사형수의 처형을 감시하기도 하였는데 동학운동(1894) 때는 수백 명의 동학군이 여기에서 처형되었다. 고종 광무 10년(1906) 항일의병이 일어나 일본군과 홍주성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그 때의 흔적이 조양문 곳곳에 남아있다. 일본인들에 의하여 서문과 북문은 파괴되어 없어지고 조양문 또한 파괴되었으나 부분적인 보수로 퇴락되었던 것을 1975년 문루를 해체 복원하여 옛 모습을 찾게 되었다. 조양문을 지나 홍주성 입구에 서면 옛 홍주성 전투 안내판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홍주성전투는 1906년 5월 홍주성에서 의병과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1905년 일제에 의해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정산에 은둔하고 있던 전 참판 민종식은 5월 11일 홍산에서 의병의 기치를 들었다. 이곳을 중심으로 서천•남포•보령•청양 등지의 의병을 규합한 민종식 부대는 서부지방의 중심지인 홍주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때 부대 병력은 1,000여명으로 그 중 신식 소총과 화승총 등 화기류로 무장한 병력이 500여명, 창검과 활 등을 소지한 병력이 200여명, 나머지는 비무장이었다. 5월 19일 오후 홍주에 도착하여 홍주성 서남쪽 남산에 진을 치고 공격을 시작하였다. 당시 홍주성에는 일본군 헌병부대와 거류민 등이 남문 성벽에 의거하여 항전하였다. 이에 의병부대는 맹렬한 사격을 가하면서 남문을 집중 공격했고 남문을 지키던 일본군 헌병과 거류민들은 마침내 의병의 공격 기세를 당해 낼 수 없게 되자 북문을 열고 덕산으로 패주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패한 소규모 부대에 의한 산발적인 공격을 했으나 탈환에 실패하고 출혈이 계속되자 대규모 병력을 파견해 홍주성을 공격하게 된다. 이에 조선주차군 사령관은 서울에 주둔중인 보병 제60연대의 제1대대장 다나카 소좌를 지대장으로 하는 2개 중대의 지대를 편성하여 27일 홍주로 급파하였다. 5월 29일 홍주성 동쪽 천변리에 도착한 일본군은 홍주성 서쪽 홍주-결성간의 도로를 봉쇄하여 퇴로를 차단하고 북문과 동문으로 성을 공격하여 성 안의 의병을 포위, 섬멸하는 계획을 세웠다. 일본군은 이러한 계획 아래 성의 남문과 서문에 기관총 사격을 수 차례 실시하여 의병의 주력을 성의 남서쪽으로 집중시킨 다음, 5월 31일 새벽 성에 대한 총공격을 시작했다. 우세한 화력을 앞세워 동문과 북문으로 일본군이 밀려들자 의병들은 대로를 차단하고 시가전을 전개하였으나 사상자가 급증하였으므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날이 새기 전에 성을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성 안으로 돌입한 다나카 지대는 헌병과 경찰이 성문을 감시하는 가운데 성 안을 수색하여 의병을 색출했다. 이 전투로 일본군은 10여명이 사살된 반면 의병은 82명의 전사자를 내고 145명이 포로가 되는 손실을 입었다. 신돌석, 정용기 부대의 의병활동과 더불어 3대 전투의병의 하나로 꼽힌다. (문화콘텐츠닷컴 발췌 편집) 홍주읍성의 역사는 파란만장하다. 나말여초에 처음 성을 쌓은 홍주읍성은 왕건과 견휜이 후삼국 쟁패의 운명을 건 운주성 전투가 있었던 곳이며 광해군과 임진왜란, 이몽학의 난, 천주교 박해, 홍주의병, 동학농민운동 등 격동 세월의 부침을 그대로 껴안고 있는 역사의 땅이다. 현재의 홍주읍성은 1870년의 홍주목사 한응필이 대대적으로 수축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지봉 이수광, 우암 송시열, 대원군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러나 동학농민운동과 홍주성 전투 등을 거치며 일제에 의해 홍주관아 건물이 철거되고 일본식 건물이 지어지면서 관아 건물과 성벽 등이 크게 훼손되어 지금은 조양문, 홍주아문, 안회당(동헌), 여하정만이 남아 있다. 2011년 홍주성역사관을 개관해 홍주읍성의 복원모형과 홍성의 위인에 대해 전시되어 있다. 안내문을 읽고 성에 대한 대강의 이해를 하고 성안으로 들어서니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홍주옥이다. 이 옥사는 공주와 더불어 천주교 2대 순교성지로 불린다고 한다. 조선 후기의 홍주 옥은 순교자들이 순교를 준비하던 의미 있는 장소이다. 내포지역의 개방성으로 인해 천주교신자가 가장 많았던 지역으로 홍주는 충청도 전영장이 배치되었던 천주교도의 처형장이 되어 순교자가 많았으며 1792년(정조16) 홍주 옥에서 얼어 죽은 원시장을 비롯하여 신유박해 때 6명, 을해박해 때 1명, 기해․병오박해 때 6명, 병인박해 때 117명 등이 이곳에서 순교했다. 지난 2009년 홍주성 복원에 따른 계획에 의해 이전 건물이 철거되고 공터로 남아있는 자리에 옛 홍주성의 관아 등을 하나 둘 복원했다. 홍주 옥은 천주교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1791∼1870년대) 홍주관아로 끌려온 천주교 신자들이 갖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 굳게 신앙을 증거한 곳이다. 이곳 홍주 옥에 수감되어 꿋꿋하게 순교의 길로 나아갔던 것이다. 현재 천주교 순례길이 조성되면서 많은 천주교신자들의 순례가 이어지고 있다. 홍주성 옥에서 나와 왼편으로 보면 우물이 있다. 이 우물은 2005년 홍주성 복원계획에 따라 대전지검 홍성지청과 대전법원 홍성지청이 월산리로 이전하면서 폐공되었다가 지난 2012년 역사공원 조성에 따라 복원했다. 과거에는 ‘재판소 물’로 불리던 이 우물은 옛부터 물맛이 좋고 병을 치유한다는 소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애용했다고 한다. 이 샘물에 대한 기록은 세종실록, 동국여지승람에도 나온다. ‘세종실록지리지’ 149권에는 “홍주읍성 안에 샘이 하나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도 마르지 아니한다”고 기록돼 있다. 또 1481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홍주읍성 안에 3개 우물이 있으며 그 중 하나는 1872년 제작된 ‘홍주지도’에도 같은 모습이 확인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물을 지나 왼편 언덕 위로 보이는 홍화문 방향으로 오르다 보면 오른쪽으로 탑 같은 게 눈길을 끈다. 바로 병오항일의병기념비이다. 병오항일의병기념비는 ‘애도지비’자리였는데 항일의병 당시 죽은 관군과 일본군을 애도하기 위해 1907년 김윤식이 시를 짓고 이완용이 글을 쓴 비석이었으나 해방 후 이 비석을 없애고 의병기념비를 세웠다. 1905년 을사늑약에 저항해 1906년 항일의병이 일어나 당시 관군과 일본군을 물리치고 홍주성을 탈환했지만 결국 함락당하고 말았다. 그 옆으로는 홍주성 사찰부재가 자리잡고 있다. 조선초기에 억불승유정책을 시행하면서 많은 사찰 소유의 토지와 노비가 몰수되었다는데 홍주성 주변의 사찰부재들도 홍주성 관아와 성벽을 쌓을 때 사용되었다고 한다. 현재 홍주성 성벽을 살펴보면 미륵사탑의 일부로 보이는 유물을 발견되는데 당시 중앙이나 지방의 관청을 신축 하거나 중건할 때 폐사지의 기와를 이용한 사례들 흔적이라고 한다. 사찰부재 옆으로 보면 현대식 건물이 보이는데 2011년 5월에 개관한 홍주성역사관이다. (사진:홍성군) 홍주성역사관은 지상1층, 지하 2층의 건물로 전시홀로 내려가면 1871년도 규장각 지도를 참고해 만든 홍주성복원모형도가 있어 당시 홍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홍성은 많은 역사적 인물을 배출한 고장답게 최영, 성삼문, 김복한, 이설, 한용운, 김좌진 등에 대해 소개 전시도 있다. 홍주성하면 빼놓을 수 없는 홍주의병과 홍성의 독립운동 등을 전시공간을 차지해 조선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홍성인들의 나라사랑의 정신을 느낄 수 있게 했다. 역사관을 나와 오른쪽 홍화문 방향으로 오른다. 홍주성에는 동서남북의 4대문이 있었지만 서문과 북문은 소실되어 터만 남아 있고 동문인 조양문만 온전히 남아 있으며 남문인 홍화문은 지난 2013년 12월 복원해 현재 모습을 갖추고 있다. 홍화문을 나서면 눈앞에 홍성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왼편 성곽을 따라 걷는데 이제서야 홍주성이라는 느낌을 갖게 하는 웅장한 모습을 보여 준다. 서해의 관문이자 홍주목의 치소(治所, 어떤 지역의 행정 사무를 맡아보는 기관이 있는 곳)를 둘러쌓은 홍주성은 1772m에 달했으나 현재는 810여m의 성벽만 남아있다. 홍주목의 36동에 이르렀던 관아 건물이 일제에 의해 훼손되어 현재는 조양문, 홍주아문, 안회당, 여하정만 남아 있다. 홍주성이 정확히 언제 축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초기 왜구로부터 방어하기 위해서 석성으로 쌓은 이후 몇 차례의 중축을 거쳤다. 1870년 홍주목사 한응필에 의해 대대적으로 개축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충청도 4목 가운데 하나인 홍주목의 동헌인 안회당과 1896년 홍주목사 이승우가 건립했다고 전해지는 홍주목사들이 정사를 구상하며 휴식을 취했던 곳으로 정각은 6각형의 수상정인 여하정이 있다. 홍성군청 안뜰에는 보우국사가 왕사가 된 것을 기념으로 심었다고 전해지는 수령 600여년의 느티나무와 홍주관아의 외삼문인 홍주아문이 있다. 홍주성벽을 따라 안내판이 있는 입구로 내려와 다시 시내로 돌아가기 위해 가다가 올 때는 못 보았던 기와대문 건물에 이끌려 가보았다. 현판에 홍주아문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들어온다. 홍주아문은 역대 홍주목사가 행정을 하던 안회당(安懷堂) 외문으로 1870년 당시 홍주목사 한응필이 홍주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이 성의 동문인 조양문의 문루를 설치할 때 세운 것이라 한다. 홍주아문이란 철판을 대원군이 사액한 것으로 우리 나라 아문 중에서도 가장 크고 특이한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군청 정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적 제 231호로 지정되어있다. 홍주아문 안에는 열간 반의 규모인 내삼문과 남과 북으로 행랑을 이어서 지어 담장을 대신했던 큰 건물이 있었는데, 3•1 운동 당시 홍성의 만세사건을 진압시키기 위해 진주한 일본군이 홍성군청을 병영으로 삼고 군수를 추방하는 한편 내삼문을 헐어버렸다. 그 이후 행랑은 보수하지 못해 스스로 무너져 버렸고 오직 외삼문인 홍주아문만 보존된 것이다. 이 역시 홍성군수 조영호가 문화재 관리국의 지원을 얻어 현재와 같이 보수하고, 종전에 이 문을 군청 정문으로 활용하던 것을 막고, 그 옆으로 현재의 정문을 세워 활용케 하여 홍주아문을 오늘과 같이 보존하게 되었다. 현재 홍성군청사로 사용하고 있다. 홍성군청 주변에는 수령 600년이 넘는 느티나무와 주변으로 굵은 느티나무가 많은데 그 중 군청 앞 느티나무가 가장 크고 수형이 아름답다. 고려 공민왕 때 심었다는 이 느티나무는 홍주목사가 부임해오면 제를 올렸던 곳이라고 한다. 홍주아문을 끝으로 오늘의 여정을 마치고 다시 홍성역으로 돌아와 서해 금빛열차에 몸을 실었다. 홍주성 천년길의 역사를 두어 시간 안에 얼마나 느낄 수 있을까? 천분의 일이라도 느끼면 다행이겠다. 하지만 천년, 지나간 시간을 되짚어 보려 했던 건 과거의 역사 이야기는 스쳐 지나간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 남아있어 우리 조상의 시간을, 문화를, 사람을 보는 깊은 거울이었을 것이다. 그 때의 하루하루를 지금 우리는 천 년이라고 부르듯 오늘 걸은 이 작은 시간도 훗날 천년 역사의 한 점이 되기에 아낌없는 시간이었다. 어쩌면 성벽 안 우리 선조들의 숭고한 생활상과 의병들의 저항정신을 이어 받을 수 있어 고마운 발걸음이었다. 홍주성 천년길 가는 정보★자가용 이용 시: 서울(서해안고속도로 출발)-홍성IC(60분 소요)-홍주성(15분 소요)★버스 이용 시: 서울남부터미널/강남터미널-홍성터미널(1시간 간격, 1시간 40분 소요)-홍주성 (도보 30분)★열차 이용 시: 용산/영등포 출발-홍성역(1일 15회 운행, 2시간소요)-홍주성(도보 30분) 홍주성 천년 여행길 코스: 총 거리 8.0km, 소요시간 4시간홍성역.버스터미널-김좌진 장군상-홍성전통시장 입구-장터사랑방(문전성시)-홍성대장간-대교리석불입상-홍주의사총-매봉재-홍주향교-홍주성북문지-홍주성남문-홍주성 역사관-홍성군청(여하정,안회당, 홍주아문)-적산가옥-조양문-명동거리-당간지주-홍성시장벽화-홍성전통시장-홍성역.버스터미널
치유의 숲, 전남 장성 축령산 편백나무 숲
치유의 숲, 전남 장성 축령산 편백나무 숲
전남 장성군 서삼면과 북일면에 걸쳐 있는 축령산. 축령산하면 독림가(篤林家, 영림계획을 작성해 모범적인 산림경영을 하며 사회적으로도 신망이 두터운 사람 중에서 산림청장 •도지사 •시장 •군수로부터 독림가 인증서를 받은 사람) 춘원 임종국선생(1915~1987)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6•25동란으로 황폐화된 땅에 1956년부터 그가 생을 마감할 때, 1987년까지 21년 간 사재를 털어 조림하고 가꾸어 지금은 전국최대조림 성공지로 손꼽히는 명소이다. 선생은 생전에 나무 심는 일에 모든 가산을 내어주고도 그 일을 멈출 수 없어 키운 나무를 담보로 또 빚을 얻어 계속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결국 그 빚 때문에 삶을 걸고 키웠던 나무들을 다른 사람에게 넘긴다. 다행히도 산림청이 2002년 이 숲을 사들인 뒤 `고(故) 임종국 조림지'로 명명하고 2001년에 선생의 이름을 `숲의 명예 전당'에 헌정했다. 평생 그가 심고 가꾸었던 편백나무와 삼나무들 숲으로 2005년 되돌아 와 수목장(樹木葬)으로 지키고 있다. 축령산 편백나무숲 정상 근처에는 임 선생이 공적비와 그의 아내 김영금 여사가 함께 잠들어 있다. 그래서인지 이 숲은 힐링을 원하는 이들에게는 쉼을, 병들어 아픈 사람들에게는 치유의 공간이 되고 있다. 저 세상에서도 우리에게 숲의 사랑을 주고 있는 것이다. (춘원 임종국선생과 공덕비) 축령산의 또 다른 옛 이름은 취령산, 문수산이다. 일대에는 60년생 이상의 편백나무와 삼나무 등 사철 푸른 상록수림대가 울창하게 조성되어 있다. 축령산 6km의 숲 길은 건설교통부에 의해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되기도 했다. 전남 장성은 예부터 산 좋고 물 좋기로 유명한 곳. 방장산, 입암산, 백암산, 불태산, 축령산, 태청산, 병풍산 등 크고 작은 산들이 어울어져 있는 천혜의 지역이다. 편백나무는 스트레스 치유에 좋은 피톤치드라는 특유한 향내음이 있어 삼림욕의 최적의 장소로 관광객들만 아니라 장기간 머무르며 치유를 원하는 많이 이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유명하다. 축령산 입구 괴정마을에는 민박촌과 관광농원이 조성되어 있고 산 아래 모암마을에는 통나무집 여러 동이 있어 체험하고 체류할 수 있다. 또한 관광을 즐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휴양림을 관통하는 임도를 지나가면 영화촬영지로도 각광을 받는 ‘금곡영화촌’이 또 다른 명소이다. (초창기 초가 지붕이 현대식 기와지붕으로 바뀌었다) 장성 8경의 하나로 꼽히는 금곡영화촌은 50~60년대 농촌분위기를 일부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과거를 소재로 하는 영화나 강원도 산골을 소재로 하는 영화를 찍을 때 자주 애용되는 곳이다. 영화 '태백산맥', '내 마음의 풍금', '만남의 광장', '침향' 등이 여기에서 촬영되었다. 영화를 찍었을 당시의 영화세트장 일부가 여전히 이곳에 남아 볼거리라며 제공하고 있다. 홍연이 살던 그 집이 바로 이 집이다.입구에 영화 '내 마음의 풍금'을 찍은 곳이란 간판이 서있다. 금곡영화촌은. 1950~1960년대 시골 농촌의 전형을 보여준다. 마을 입구 당산나무를 지나 돌담길을 따라 20여 가구 100여명이 옹기종기 모여 산다. 휴양림으로 들어서기 전, 좌측 목조건물이 눈에 띈다. 초가지붕을 얹은 아담한 한옥은 30여평 규모의 금곡 숲속미술관도 있다.. 축령산은 자기 형편에 맞게 걷기와 등산을 즐길 수 있다. 지도에서 보듯이 다양한 코스가 잘 만들어져 있다. 그 중 등산코스는 대강 네 개로 나눠진다. 크게 보면 추암주차장에서 출발해 공덕비를 거쳐 축령산 정상에 올랐다가 건강숲길, 하늘숲길, 산소숲길, 숲내음길을 걸어 내려와 원점에 다다르는데 인근의 북일리 금곡영화촌서 시작하는 코스도 있다. 베테랑 등산인들은 추암리주차장을 들머리로 공덕비, 축령산 정산을 정복하고 장성이 자랑하는 4가지 코스를 순회해 다시 주차장을 날머리로 내려오는 코스를 즐긴다. 축령산 정상은 620.5m로 그리 높지는 않다. 더군다나 산행 들머리의 해발 높아 어렵지 많다.정상에서 하산하는 길을 더 좋다. 건강숲길, 하늘숲길, 산소숲길, 숲내음길 등 약 9km가 조금 넘는 긴 길이지만 힐링의 걸음걸음이 이어지는 길이다. 네 코스의 길은 때로는 직선으로, 때로는 꾸불꾸불 길로 걷는 내내 기분이 좋다. 등산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이런 힐링 산길을 세상 어디도 없다고 한다. 그만큼 축령산은 천상의 길이다. ▲특산품 & 먹거리: 사과, 단감&곶감, 솔잎차, 포도, 잔디 등▲주변 볼거리: 홍길동생가, 필암서원, 장성호, 금곡영화촌, 백양사, 입암산성 등 ▶ 금곡영화마을 인근길: 장성군 북일면 문암리 500번지 ▶ 모암산촌마을을 지나 큰 저수지 길: 장성군 서삼면 모암리 682번지 ▶ 축령산 안내센터 인근길: 장성군 서삼면 추암리 669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