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무형문화재, 처용무의 대가 김천흥

기사입력 2020.02.27 16:59 조회수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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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무김천흥.jpg

(사진: 덕담 박승우)

 

처용무의 대가 김천흥(金千興, 호는 심소(心韶), 出 1909년 3월 30일 卒 2007년 8월 18일)은 1909년 서울 남대문에서 태어났다. 그가 13살이었던 1922년부터 아악서(雅樂暑, 고려 말 조선 초에 궁중음악을 관장하기 위하여 예조 아래 두었던 음악기관)에서 기예를 익히기 시작하였고 1923년에는 일제의 점령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마지막 왕이었던 순종의 50세 생일축하공연에 참가하였다.

 

처음 김옹이 익히기 시작한 것은 해금이었고, 이후 양금 연주를 더하였다.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처용무와 춘앵무에도 또한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조선의 마지막 무동(조선시대 궁중의 연향에서 춤추는 어린아이. 풍물패와 걸립패 등에서는 상쇠의 목말을 타고 춤추고 재주 부리는 아이) 이기도 한데 1923년에 순종황제 51주년에 무동이 되었다.

 

특히 김옹은 궁중예술과 민속예술 사이의 구분을 넘어 이 두 영역 모두를 아우르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아악서와 조선음악협회에 속해 있던 대가들과 교분을 나누며 그들의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그가 보여주는 여러 재능 중의 백미는 춘앵무로서 이 아름답고 느린 궁중무용은 그가 살아온 삶의 위엄을 보여주는 듯하다. 국가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의 해금과 일무(佾舞, 여러 줄로 벌여 서서 추던 춤) 부문과 제39호 처용무의 무용과 가면 제작 부문의 보유자였다.

 

1951년부터는 국립국악원에서 예술사, 연주원, 자문위원을 거쳐 원로사범을 지냈다.
아악과 궁중무(宮中舞)의 재현•전승•보급에 힘썼으며 탈춤을 체계화시키고 보급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958년부터 ‘김천흥 무용연구소’를 개설했으며 1962년에는 ‘처용랑(處容郎)’으로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처용무김천흥2.jpg

 

(국립국악원 처용무공연화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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