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형문화재 박동진 판소리 명창

기사입력 2020.03.04 08:26 조회수 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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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문화재 박동진 판소리 명창


충남 공주에서 태어난 박동진(朴東鎭, 아호(雅號)는 인당(忍堂), 1916 7 12~2003 7 8)옹은 중학 졸업반인 열 여섯살때 판소리에 넋을 잃은 후로 소리꾼이 되기로 결심을 했다. 소리를 배우기 위해 무작정 집을 나선 그는 전국을 다니며 유명하다는 소리선생은 모두 찾아다니며 소리를 익혀나갔다.


그때 만난 스승들이 당대 명창들이던 유성준, 조학진, 김창진, 정정열 씨 등이다. 하지만 소리꾼의 길이 순탄치만은 않아 기생 소리 선생 노릇을 하기도 해야 했다. 그러다 1962년 국립국악원에 들어오며 비로소 소리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유명해진 것은 1968년 늦여름 '흥보가' 5시간 동안 완창한 이후이다.


이를 기점으로 1969춘향가’ 8시간, 1970심청가’ 6시간, 1971적벽가’ 7시간, 0’수궁가’ 4시간의 완창 발표를 연달아 진행하였다. 또한 1970년에는 변강쇠타령’, 1972배비장타령’, ‘숙영낭자전등 완창 발표회를 가졌고 성웅 이순신등 새로운 판소리도 선보였다.


이렇듯 그가 완창하지 않은 판소리가 거의 없을 정도이다. 여든의 말년에 나이에도 믿기지 않는 정력으로 짧게는 3시간, 길게는 8시간 반에 이르는 판소리 완창을 해냈다. 1973년 판소리 다섯 마당 중 가장 비대중적이라는 '적벽가' 완창 능력을 인정받아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같은 해 국립창극단의 단장에 취임하고 1990년대까지 연 1회 이상의 연창회를 가졌다.


창작 판소리 예수전을 공연한 뒤 개신교 신자가 되어 성서 판소리’, ‘모세전등의 잇단 종교적 창작 판소리를 발표해 새 장을 열기도 했다. 1985년 국립국악원 판소리 원로사범, 1987년 국립국악원 지도위원을 역임했다.


1990년대 후반 공주에 낙향해 소리 전수관을 세우고 후진 양성에 힘쓰는 한편 노구에도 공연 활동도 활발히 펼쳤다.


1981년 은관문화훈장, 1982년 전국국악대상, 1983년에는 서울시 문화상, 작고 후 2003 7월 관문화훈장을 수상하였다.

(시진: 덕담 박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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