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사건이 뭐우까? 4월 제주에 내리는 동백꽃 피눈물

4·3길과 올레- 가시마을, 의귀마을, 동광마을, 금악마을, 연미마을,북촌마을
기사입력 2020.04.13 00:34 조회수 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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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사건이 뭐우까?

 

육지 사람들이 행복하게 걷고 있는 제주의 상징 ‘올레길’ 곳곳에 4•3의 상처가 베어 있다는 것을 알고 걸어야 한다. 적어도 4월에는…   

4월이면 제주에 지천으로 핀 아름다운 동백이 제주 4•3사건의 상징화이다. 동백꽃이 지닌 말은 “그대를 누구보다도 사랑합니다”이다.

제주 4•3사건의 상징화 동백은 제주도민의 피눈물을 사랑으로 승화하기엔 아직도 시간이 필요하다. 제주에서 4월은 슬픔의 시간이고 역사상 가장 슬프고 잔인한 사건이 일어난 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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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코스 ‘표선 가시마을’, 5코스 ‘남원 의귀마을’, 8코스 ‘안덕 동광마을’, 15코스 ‘한림 금악마을’, 16코스 ‘오라 연미마을’, 18코스 ‘조천 북촌마을’에 4·3길은 4·3을 기억하고 ‘화해와 상생’의 사랑을 위한 역사의 길이다.
 

4·3길 상징 로고 퐁낭(팽나무)는 제주 사람들이 온갖 시련과 애환을 지켜낸 정주목이다. 4·3의 아픔을 당당히 극복하는 아름다운 제주·평화로운 제주, 밝은 미래를 열어가는 제주공동체 복원의 의미를 담고 있다.

 

4·3길 상징 띠의 붉은색은 정열, 희생, 진실을 뜻하며, 흰색은 순결, 결백, 평화를 뜻한다. 제주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제주자연과 환경에 잘 적응하며 평화를 사랑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사람들임을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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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미군정기에 발생하여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이르기까지 7년여에 걸쳐 지속된, 한국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인 사건이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를 ‘붉은 섬’으로 낙인 찍어 대규모 토벌대를 제주도로 보내 중산간마을 10개에서 초토화작전을 실행했다. 공식적으로 무려 1만4231명(4.3진상조사보고서는 실제 인명피해를 3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 그 중 10세 이하가 770명이다. 

 

11세~20세 어린 학생들도 2464명이나 죄없이 희생된 비극이다. 당시 제주도 인구의 1/10이 사라져 제주의 4월은 제사의 달이기도 하다.

 

1947년 3월1일은 ‘3.1혁명 정신을 계승해 외세를 물리치고 조국의 자주통일 민주국가를 세우자’는 외침 아래 3만 명에 달하는 도민이 관덕정(제주시 관덕로 19) 광장에 모였다. 

 

가두행진 도중 여섯 살 정도의 아이가 기마경관이 탄 말에 채였다. 기마경관이 이를 무시하고 가려는 순간 군중들의 야유가 들렸고 돌을 던졌다. 군중에 쫓기며 경찰서로 향하던 기마경관. 그리고 이어진 총성. 민간인 6명이 숨지고 8명이 중상을 입었다. 4.3사건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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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은 반세기 넘도록 금기의 영역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유가족들은 희생자들을 위령하는 행사조차 공개적으로 열기 어려웠다. 4·3희생자 추념일을 법정 기념일로 봉행하기까지는 험난한 과정을 거쳤다.

 

1978년 9월 계간 문학비평지 ‘창작과 비평’에 4·3사건을 소재로 한 현기영(玄基榮)의 중편소설. 순이삼촌(順伊三寸) 발표되면서 30여 년 동안이나 묻혀 있던 사건의 진실을 문학을 통해 공론화시켰다. 

 

이 소설은 실제 1949년 1월 16일 북제주군 조천면 북촌리에서 벌어진 양민학살을 사실주의 기법으로 다룸으로써 문학의 힘이 얼마나 강한 지 보여주었다. 

 

제주 출신 현기영은 그 학살현장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순이삼촌의 삶이 어떻게 황폐화되어 가는가를 보여줌으로써 4·3사건의 참혹상과 그 후유증을 고발했다. 

 

이 작품은 4·3사건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최초로 다룬 작품으로 문학사적·역사적 의의가 큰 1970년대 대표적인 문제소설로 평가받고 있다. 순이삼촌으로 현기영작가는 고문과 금서조치를 당하는 등 제4공화국 시절에 개인적으로 큰 고초를 겪지도 했다. 

 

하지만 이 작품을 계기로 4·3사건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전개되고 문학을 비롯해 미술·연극계 등 문화계 전반에 걸친 영향은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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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에는 제주도내 11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제주 4·3 사월제 공동준비위원회가 ‘제1회 4·3추모제’를 봉행함으로써 위령제는 공식행사로 치러진다.

 

1990년 6월 유족들은 ‘제주도4·3사건 민간인희생자 유족회’를 조직해 1991년 4월 처음으로 유족들이 주체가 된 4·3사건희생자위령제를 봉행했다.

 

4·3특별법이 제정된 2000년부터는 ‘제주4·3사건 희생자 범도민 위령제’로 명칭을 바꿔 제주시 봉개동에 새로 부지에서 확보해 4·3평화공원을 봉행한다.

 

2006년 4·3 위령제에는 국가 원수로는 처음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참석해 제주도민들에게 다시 공식 사과하고 참배했다.

 

4·3희생자 추념일을 국가 기념일로 지정한 것은 정부의 진상보고서 확정, 대통령의 사과에 이은 4·3의 국가적 해결 과제 중 마지막 안건을 해결한 것이다. 2012년 12월 박근혜 대통령 후보는 대선의 주요 공약으로 추념일 지정을 제시했다.

 

2013년 8월 국회는 4·3특별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면서 4·3 법정 기념일과 관련해 부대 의견으로 대통령령인 ‘각종 기념일에 관한 규정’을 개정해 4·3추념일을 법정 기념일로 지정하도록 명문화함으로써 법정 기념일 지정의 초석을 마련했다.

 

드디어 2014년 3월 18일 국무회의에서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을 개정하고 3월 24일자 관보에 게재함으로써 ‘4·3희생자 추념일’ 지정을 위한 대통령령 개정안이 마침내 공포됐다.

 

법정 기념일 지정을 계기로 4·3문제의 해법은 국민통합과 화합의 국정 과제를 실현한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지금까지 4·3사건을 둘러싸고 빚어진 이념 논쟁과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마련되었다.

 

제주 4·3 평화재단은 4·3당시 제주도민이 겪은 이런 통한의 역사현장을 국민이 공감 할 수 있는 역사·교육현장으로 조성, 인권과 평화의 소중함, 아름다운 제주도의 4·3역사를 올바르게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4·3길을 6개를 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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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덕 동광마을

1670년대 임씨가 정착한 이래 제주목을 왕래하던 사람들의 중간 기착지인 국영여관 이왕원(梨往院)이 있었을 만큼 사통발달한 곳이었다.

 

해방 후 미군정의 공출로 불만이 컸던 마을 청년들의 관리 폭행사건으로 미군정이 주목하는 마을로 낙인찍히게 되었고 토벌대에 의해 많은 주민들이 총살당했다. 시신들은 바다에 떠내려가거나 겹겹이 쌓여 있어 유족들은 시신을 구별할 수 없었고, 고심 끝에 헛묘를 만들어 원혼을 위로할 수 밖에 없었다. 동광리는 4·3으로 인한 희생자가 160여 명 이상이다.

 

2) 남원 의귀마을

4·3사건이 한창이던 1948년 11월 초순, 의귀 마을 주민들은 다른 지역보다 일찍 시작된 군경토벌대의 강경진압작전으로 한 순간에 삶터를 잃어 인근 오름과 숲, 궤 등에 숨어 살거나 산으로 피신할 수 밖에 없었다. 
 
군경토벌대에 의해 많은 주민들이 잡혀 희생되거나 육지 형무소로 보내졌다. 이들 중 대다수는 지금까지 생사를 알 수 없는 4·3행방불명인으로 남아 있다. 4·3사건으로 인한 의귀마을 희생자는 250여명에 이른다.
 
3) 조천 북촌마을
북촌은 제주시 조천읍 동쪽 끝에 자리 잡은 해변마을로 포구를 중심 으로 ‘본동’, 서쪽에 서우봉과 접한 ‘해동’, 남쪽 선흘리 방향 중산간에 ‘억수동’ 이 있으며 1990년대에 ‘한사동’이 새로 조성되어 지금은 4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949년 1월 17일 너븐숭이 인근에서 군인 2명이 무장대의 습격으로 숨지자 북촌초등학교 주변 들과 밭에서 북촌주민 3백여 명이 집단학살 당하는 등 북촌마을은 4·3사건 최대의 피해마을 중 하나이다.
 
4) 한림 금악마을
금악리는 1550년경 진주강씨 일가가 동네의 북쪽에, 남양홍씨가 남쪽에 살면서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전해온다. 그 후 양씨, 박씨 그리고 김씨, 이씨, 송씨 등이 입주했다고 한다. 
 
금악리는 4·3을 거치면서 300여호의 가옥이 없어지고 152명의 주민이 학살 되거나 행방불명이 되었다. 웃동네, 중가름, 오소록이동네, 별드르, 별진밭, 새가름, 동가름 등의 마을은 복구되지 못한 채 잃어버린 마을로 남게 되었다.
 
5) 표선 가시마을
가시리(加時里)는 한라산 남동쪽 해발 90~570m 고도에 위치한 중산간 마을로 표선면 전체 면적의 41.4%를 차지할 정도로 광활하다.
 
1948년 4·3당시에는 약 360여 가호가 있을 정도로 큰 마을이었지만 초토화 작전과 소개령으로 마을은 폐허가 되었다. 1949년 5월, 본동을 중심으로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지만, ‘새가름’, ‘종서물’ 마을은 재건하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가시리사무소 앞에는 마을이 재건될 때 도움을 준 안흥규, 안재호 선생의 동상과 공헌비가 세워져 있다.가시마을 4·3길은 4·3의 아픈 역사뿐만 아니라 아픈 역사를 딛고 일어선 희망의 가시리를 보여주고 있다.
 
6) 오라 연미마을
제주시 도심권역에 있는 오라동은 4.3초기부터 유독 피해가 많은 지역이다. 5월1일 발생한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연미 마을의 가옥들은 불탔으며 당시 진행 중이던 평화협상도 결렬됐다.
 
어우늘은 25여호 130여명의 주민이 살았던 마을이다. 1949년 1월초 군경의 초토화 작전을 만나 마을은 잿더미로 변했고 복구되지 못한 채 끝내 잃어버린 마을이 됐다. 
 
월정사는 1948년 12월 10일 토벌대에 의해 불태워졌다 4·3이후 지금의 월정사의 모습을 갖췄다. 제주 최초의 선원으로서 4·3의 아픔을 고스란히 겪은 사찰이다.
 
오라리 방화사건을 기억하는 비석은 현재 연미마을회관(제주시 연사길 142) 앞에 세워져 있다. 1948년 12월 오라공립국민학교가 전소되고 교사 3명이 토벌대에 의해 전소돼 학교는 폐교됐다. (글: 단무원심)
 
<제주 올레길 구석구석 4·3의 아픔이 스미지 않은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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