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윤이상'과 '두개의 조국' 그리고 통영국제음악제

기사입력 2020.07.15 00:11 조회수 2,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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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윤이상평화재단)

지금으로부터 꼭 103년전인 1917년은 우리 현대사에서 중요한 족적을 남긴 세 인물이 태어난 해이다. '박정희' 전대통령과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 선생 그리고 시인 ‘윤동주’ 선생이다.

잠시 시계바늘을 50여년 전으로 되감아 본다. 바로 '동백림(베를린) 간첩사건'. 1967년 대통령 부정선거 시비가 일자 박정희정권은 공안사건을 만들어 낸다. 그 정치공작의 피해 자 중에는 이응로 화백, 시인 천상병, 작곡가 윤이상이 있었다.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윤이상'은 영국 독일 프랑스 정부 그리고 '스트라빈스키'와 '카라얀' 등 저명한 문화계인사 들의 도움으로 추방의 형식을 빌어 독일에서 남은 여생을 살게 된다.

두 사람의 악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박근혜 전대통령도 '윤이상평화재단'을 문화계 블랙 리스트에 포함 시켰고 '윤이상 국제음악콩쿠르'의 정부지원을 중단하기도 했다. 3년전 봄에는 문재인대통령의 부인 김정숙여사 (음대졸업)가 독일 방문 중에 윤이상의 묘소를 참배했고 통영에서 공수한 동백나무도 한 그루 심었다는 뉴스도 있었다.

1995년 유럽평론가들이 뽑은 20세기 최고의 작곡가 30인으로 선정되었고 뉴욕 브루클린 음악원에는 인류 최고의 음악가 44명 가운데 동양인으로는 유일하게 '윤이상' 만이 동판에 그 이름이 새겨져 있다. '윤이상'의 음악이 세계적으로 가치를 인정받는 가장 큰 이유는 한국음악의 연주기법과 서양악기의 결합을 시도해서 '동서양의 감성을 이어주는 중계자 역할을 한 커다란 공로'라는 평가다.

尹 伊 桑... 독어 이름은 Isang Yun(1917~1995). 작곡가 바이올리니스트 첼리스트 기타리스트, 그는 경남 산청에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고 이어 경남 통영에서 성장했다. 음악적 재능이 출중했으나 음악가가 되는걸 반대했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한다. 그리고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독학으로 오사카 음대에 진학했고 이어 고향으로 돌아와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게 된다.

이때 ‘유치환’ ‘김춘수’ 등의 문인들과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만들고 독립운동에도 가담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일제에 의해 쫒기는 신세가 되지만 곧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해방 이후에는 부산고 마산고 그리고 고려대학교의 교가도 만든다.

서울대 교수를 역임하고 독일로 유학을 가는데 유학기간 중에 '일곱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이 주목을 끌게 되고 곧 유명 작곡가의 반열에 오른다. 이후 '연꽃속의 진주' ‘심청’ ‘예악’ 등의 히트 작품을 만들어 내는데 그때 동백림 사건이 일어난다.

그는 1963년에 친구 최상학을 만나기 위해 방북한 적이 있는데 이는 박정희 정부의 입장 에서는 분명한 친북활동으로 포착되었고 국내로 강제 소환한 결과를 낳았다. 감옥 에서 자살시도를 했지만 결국 음악 작업을 허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오페라 '나비의 꿈'을 만든다. 이후 독일로 망명한 후에 그는 한국에 입국할 수 없었고 그의 음악은 연주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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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대학교 예술대학 교수로 재직할 때 북한에서는 매년 '윤이상 음악회'가 열렸고 이어 남한에서도 그의 음악은 해금된다. 노태우정부 당시 ‘범민족 통일음악회’에서 그의 음악이 남북공동으로 연주되었고 또한 ‘윤이상 음악 축제’가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1995년 폐렴으로 한많은 인생을 마감한다.

윤이상은 간혹 '파블로 피카소'와 비교되기도 한다. '피카소'도 조국 스페인에 프랑코 정권에 들어서자 프랑스로 망명해 평생 스페인으로 돌아지지 못할 운명이 됐지만 고향 '말라가'에 수차례 몰래 입국했다고 한다. '프랑코'도 이를 알았지만 스페인이 낳은 천재 예술가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이를 묵인했다고 한다.

윤이상과 두개의 조국. 지나간 역사지만 그 뒷맛은 어딘가 쓰리다. 현대음악은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지만 ‘윤이상’이란 이름 석 자는 꼭 기억하고 싶고 또 반드시 기억해야할 존재라고 생각된다.  끝으로 삶을 마감하는 순간, 그는 카세트 테잎에 담긴 '명창 안숙선'의 '남도 민요가락'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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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윤이상평화재단)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는 주옥같은 시를 남긴 시인 윤동주(尹東柱), 대한민국 근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세명의 인물들.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이홍주프로필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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