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 기능보유자, 이봉주(1926~)

기사입력 2020.09.13 09:07 조회수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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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주.jpg

(유튜브 캡쳐)

 

1926년에 평북 정주군 덕언면 납청에서 출생인 이봉주선생은. 작업 도중 튄 불똥에 시력을 잃어 한쪽 눈을 쓰지 못하지만 그의 메질은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1948년 월남한 이후 지금까지 방짜유기와 더불어 살아온 선생은 고집스럽게 놋그릇의 전통 맹맥을 지키고 있는데 무형의 전통이 결코 저절로 이어져 오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산 증인이다.

 

유기의 생명은 금속과 불, 이 두 가지 인연이 오늘날 선생을 있게 했다.
고향인 납청에선 정작 방짜유기 제작 기술을 배울 기회가 없었고 해방 후 22세 때인 1948년에 월남하여 서울 용산구 후암동에서 납청 방짜유기 공장을 크게 하던 탁창여 선생과의 인연으로 방짜 유기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선생은 탁창여 선생의 은혜를 기리고자 지금도 문경에 있는 선생의 공방, 납청방짜유기촌 마당 가운데에는 탁 선생의 공적비가 서 있다. 문경 납청방짜유기촌에는 모두 납청출신의 유기 장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1957년 구로동에 자신이 직접 ‘평부양대유기공장’을 설립하여 대장겸 점주 그리고 경영까지 하여 생산 기술자인 동시에 판매자까지 겸하게 되었다. 그러나 1950년대 말부터 생활문화가 변하면서 연탄을 집집마다 사용하게 되자 연탄가스에 쉽게 변색되는 유기는 심한 타격을 받게 된다.

 

계속되는 불경기로 선생의 공장도 문을 닫고 노동일을 하며 방황생활을 하다 1960년말 공방을 새로 시작한다. 1978년 경기도 안양 박달동에 진유공사를 세워 다시 양대유기를 제작했다.

 

1982년 전승공예대전에서 문화공보부장관상을 수상하고 1983년에는 국가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의 방짜유기 부문의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경북 문경에 ‘납청방짜유기 전수관’을 짓고 후진양성과 작품활동에 정진하고 있다. 지역 주민들과 함께 이곳을 유기마을로 키워가고 있다.

 

선생이 만든 대징은 직경 160cm, 무게 98kg의 세계 최대의 크기로 기네스북에도 올라 있다. 납청유기는 조시 부시 미국 대통령 방한 때 청와대 만찬에 사용되기도 했으며 세계 최대 타악기 회사인 질리안에 의해 그 기술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선생의 아들 이형근이 전수교육조교로 활동하며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유기장이란?
놋쇠로 각종 기물을 만드는 기술을 가진 장인을 말한다.
우리나라 유기의 역사는 청동기시대부터 시작되었는데 이 시기는 인류 역사에 있어 최초로 합금술이 발명된 때이다. 신라시대에는 유기를 만드는 국가 전문기관인 “철유전(鐵鍮典)”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더욱 발달하여 얇고 광택이 아름다운 유기를 만들었으며 품질도 우수해 신라동(新羅銅), 고려동(高麗銅)이라 불리며 수출하였다.

 

유기는 제작기법에 따라 방짜와 주물, 반방짜 등으로 나뉘는데 가장 질이 좋은 것으로 알려진 방짜유기는 일명 양반쇠라고도 하며 북한의 납청유기가 가장 유명하다. 질 좋은 놋쇠는 전통적인 유기제작 방법인 방짜(方字)기법으로 제작했는데 이는 동(銅)과 석(錫)을 정확한 비율로 합금하여 두드려서 만드는 놋제품이다.

 

이 방짜유기는 금속조직을 늘여서 만드는 것이라 떨어뜨려도 찌그러질 뿐 깨지지 않아서 사람들이 매우 선호했다. 그러나 조선조 중엽에 이르러 수요가 늘어나자 손으로 두드려서 만드는 방짜기법 대신 손쉬운 주물기법으로도 제작하게 되었다.

 

주물유기는 방짜유기의 합금과는 달리 구리와 아연의 합금인 황동이나 기타 잡금속을 섞어 녹인 금속을 주형에 부어 대량으로 생산해낸 것이다. 정확한 합금비율로 만든 전통적인 방짜유기와 주물유기는 성분이 다소 다르지만 잡주물로 만든 유기까지를 포함해서 넓은 의미로 유기라고 알려져 왔다. 이렇게 잡금속을 섞어서 대량생산하던 합금쇠를 통쇠라고 했으며, 전통적인 놋쇠와는 엄격히 구분지어 사용하였다. 그 이유는 퉁쇠는 주물한 것이라 금속의 단면이 유연성이 적어 그릇을 떨어뜨리면 깨지기 쉽기 때문이다.

 

방짜 유기 제작으로 유명한 평북 납청은 조선시대부터 유기 제작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납청은 정주읍과 박천읍 사이에 있는 산간지방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내공업으로 유기업을 하여 생활했던 곳이다. 이 지방은 일찍이 유기제작이 크게 발전하여 각 지방에서 유기 도매상들이 모여들었으며, 일제초기까지만 해도 성시를 이루었던 곳이다. 납청에서는 방짜를 양대(良大)라고 불렀으며, 모든 생활기명이나 악기를 만들어 내었는데, 놋쇠의 질이 좋아 견고하고 소리도 맑고 파장이 길어 각광을 받았다.

 

현재는 국가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 이봉주 선생에 의해 방짜유기의 기술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예부터 음식을 담는 반상기로 쓰인 방짜유기는 독성이 없고 항균, 멸균 효과가 뛰어나며 농약 성분을 가려주는 역할을 한다. 방짜기술을 가진 나라는 열손가락에 꼽을 정도라고 한다. 더구나 그릇을 방짜기술로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다고 한다.(한국문화재단 문화유산이야기)

 

이봉주1.jpg

(사진:납청방짜유기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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