寬仁坊의 인(仁), 대사동(大寺洞)의 사(寺)자를 조합한 인사동(仁寺洞)

기사입력 2020.10.30 11:12 조회수 3,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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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4.jpg

인사동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63번지(종로2가)에서 관훈동 136번지(안국동 사거리)에 이르는 도로로 안국동 사거리에서 장교(長橋)를 건너 청계천으로 갈 수 있었다. 인사동이라는 이름은 일제 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에 처음 사용되었다.

현재의 인사동 지역에는 조선 초기에 한성부 중부 관인방(寬仁坊)과 견평방(堅平坊)이 있었고 1894년 갑오개혁 당시에 이루어진 행정개혁 때는 대사동(大寺洞), 원동(園洞), 승동(承洞), 이문동(李門洞), 향정동(香井洞), 수전동(水典洞) 등이 있었다.

관인방과 대사동에서 가운데 글자 인(仁)과 사(寺)를 각각 따서 인사동이라는 동명이 붙여진 것이다. 대사동(댓절골)이라는 명칭은 이 지역에 고려시대에는 흥복사라는 큰 절이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원각사라는 큰 절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졌다.

인사동길은 삼청동에서 시작한 개천으로 인해 관훈동, 인사동, 광통교로 흐르는 개울을 따라 생긴 길이다. 조선초기에는 이 지역이 관인방(寬仁坊)과 견평동(堅坪洞) 지역이었으며 갑오개혁(1894)때 관인방(寬仁坊)에는 대사동계 = 원동(園洞), 대사동, 승동, 탑동, 철물교계 = 대사동, 승동, 탑동계 = 대사동, 견평동(堅坪洞)에는 어물전계 = 이문동, 향정동, 수전동, 이문동계 = 이문동의 지명이었던 것이 1914년 4월1일 경기도 고시 제7호로 방계명(坊契名)을 동(洞)으로 개칭한 후 1936년 4월1일 조선총독부령으로 인사정(仁寺町)으로 개명되었다가 해방 후 1946년 10월 1일 다시 인사동(仁寺洞)으로 명칭이 환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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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은 관가이면서 동시에 거주지였다. 중인(中人)들이 많이 산 것으로 전해지지만 이율곡(李栗谷), 이완(李浣) 장군, 조광조(趙光祖) 등의 집도 이곳에 있었다.

일제강점기부터 골동품 상점들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이들 상점들은 문화재 수탈의 창구 역할을 했다. 해방 후 1970년대에 들어와 화랑, 표구점 등의 미술품 관련 상점들이 이곳으로 집중되면서 인사동은 현재와 비슷한 문화의 거리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현재 법정의 동(洞) 인사동(仁寺洞)은 인사동4거리에서 종로2가 방향의 1부(部)에 불과하나 보존회는 관훈동, 인사동과 견지동, 공평동, 경운동, 낙원동 일부를 포함한 종로2가, 우정국로, 율곡로, 삼일로의 내부를 관할구역으로 하고 있으며 외부에서는 관할구역 전체를 하나의 인사동(仁寺洞)으로 호칭하고 있다. 서울시에서는 1988년에 인사동을 ‘전통문화의 거리’로 지정했다.

★연대별로 본 인사동
조선시대
북촌과 종로사이에 위치하여 주로 중인들이 살았던 주거지역으로 조선초기 이래로 조선 미술활동의 중심지로 형성, 현재의 인사동 명칭은 일제 통치시기인 1914년부터 불리워짐.
1930년대
인사동길 주변에 서적 및 고미술 관련 상가가 들어서기 시작해 골동품 거리로 자리잡게 됨.
1950년대
6.25전쟁 이후 지금의 낙원상가 아파트 자리에 낙원시장이 형성되고, 평양떡집이 들어선 이후 현재와 같은 떡집골목 형성
1970년대
최초의 근대적 상업화랑인 현대화랑이 들어서면서 상설 전시판매장 형식의 화랑들이 모여들어 미술문화의 거리 성격 강화
1980년 이후
골동품, 고미술, 화랑, 고가구점, 화방, 민속공예품 판매점포들이 속속 들어서면서 서울의 명실 상부한 전통문화예술 활동의 중심지가 됨.
 
★인사동의 문화유적지
이완장군 집터
조선 효종 때 북벌을 주장했던 이완 장군의 집터가 인사동에 있다. 원래 장군은 낙동인평대군의 집 옆에 살고 있었는데 왕족의 이웃에 사는 것이 법도에 어긋난다하여 인사동으로 이사하였다. 대략 그 자리가 지금의 종로구청 창고자리 근방이 된다.
독립선언 유적지
태화빌딩 앞에 독립선언 유적지가 있다. 이곳은 을사경술조약 때 매국 대신들의 모의처로 사용되었고 이완용의 집터이기도 하였다. 삼일운동 때 그 조약을 무효화시킨다는 뜻으로 여기서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 인사동 194번지 이곳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한용운 선생이 선언서를 낭독하였던 태화관이 있던 곳이다.
박영효 대감댁의 터(현 경인미술관)
조선 철종 때 지어진 박영효 대감댁의 터
승동교회(삼일운동기념비)
조선시대 김흥근 대감댁이었으며 1904년 승동교회가 이전하였다. 삼일운동 때 교회 지하실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였으며 교회 학생들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학생시위운동을 전개하였던 교회이다. 1939년에는 지금의 한신대학 전신인 조선학교가 개교되었으며 1993년 교회에서 삼일운동 기념비를 설치하였다.
서울 중심점 표석 인사동 194
현재 하나로 빌딩 옆인 인사동 194번지에 네모꼴의 화강석으로 서울의 한복판 중심지점을 표시한 표지돌로 건양원년(1896)에 세워졌다.
이율곡선생 집터 관훈동 197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이율곡 선생의 가택이 있던 곳이다.
민가다헌
이 집은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16호인 월계동(月溪洞) 각심재(恪心齋)와 동일한 구조이다. 이 두집은 당초 건축주가 두 자식에게 한 채씩 주기 위하여 지은 집이라고 한다. 네모가 반듯한 집터의 동쪽에 일각대문(一角大門)이 나와 있다. 일제 때 화신백화점 등을 설계하였던 한국인 건축가 박길룡(朴吉龍, 1898-1943)의 작품이라고 하는데 화장실과 목욕탕을 한옥 내부에 포함하고 이것을 연결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으로 한국주택사의 변천을 알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전의감터
조선시대 궁중에 쓰이는 의약을 제조하고 약재를 재배하던 관아 터. 조선 말에 우정총국이 들어섰다
도화서터
도화서는 조선시대 그림에 관한 일을 담당한 관청으로 한국 전통 회화의 요람이자 중심이 되었던 곳이다
민영환 집터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이에 분격하여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의 집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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