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에 못 받은 조명 사후에야 받은 박수근화백

기사입력 2021.03.08 08:39 조회수 3,8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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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jpg

박수근(朴壽根, 1914.2.21~1965.5.6, 서양화가, 호는 美石)은 유화로서 가장 한국적이고도 독자적인 조형세계를 펼친 한국화단의 거목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불행하게도 생전에는 조명을 받지 못하다가 사후에 재평가를 받으면서 명성을 얻었다. 그의 작품 속에서는 화려하고 다채로운 요소를 찾을 수가 없다. 무채색계열의 채색은 둔중하면서도 강인한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그의 화폭은 저항감 없이 한국인의 가슴에 파고드는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그는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났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가세가 몰락하자 진학을 포기하고 독학으로 그림공부를 시작했다.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 당선된 후 화가로서의 기반을 닦았다. 이후 1952년 월남하여 화단의 외곽에서 묵묵히 작품활동을 하다가 화가로서 최절정에 이르렀을 때 가난과 역경 속에 51세의 짧은 생애를 끝냈다.

“나는 인간의 착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며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어린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라는 그의 육성은 주변의 가난한 이웃들에게 애정을 쏟는 그 자신의 구도자적인 작품경향을 대변하고 있다.

그는 표현방법에 있어서도 향토색 짙은 독자적인 양식을 구축하였는데 특히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강암의 질감을 연상시키는 우툴두툴한 마티에르는 그의 화풍상의 큰 특징이다. 회백색을 주로 쓰면서 단조로우나 한국적인 주제를 소박한 서민적 감각으로 다루었다. 또한 낯선 유화기법을 육화(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인 모습으로 뚜렷하게 나타냄)화시켜 자신의 어법으로 승화시키고 거기에 고도의 정신성을 담았다.

대표 작품으로 ‘나무’, ‘복숭아’, ‘노인과 소녀’, ‘빨래터’등이 있다. 그의 고향인 강원도 양구군에는 그의 이름을 딴 미술관이 있다.

박수근2.jpg

(출처:현대화랑, 빨래터, 1954)


1927년(13세) - 양구 공립 보통학교 졸업. 가난으로 중학교 진학 못 함
1932년(18세) -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 약칭 선전) 서양화부에 처음으로 입선 '봄이 오다' 이후 1943년까지 아홉 차례 입선함
1935년(21세) - 어머니가 유방암으로 사망하자 춘천으로 가 그림 공부를 함
1936년(22세) - 제 15회 선전에 ‘일하는 여인’수채화 출품으로 두 번째 입선
1937년(23세) - 제 16회 선전에 ‘봄’으로 세 번째 입선
1938년(24세) - 제 17회 선전에 ‘농가의 여인’입선
1939년(25세) - 제 18회 선전에 ‘여일(麗日)’ 입선
1940년(26세) - 2월 10일 강원도 금성 감리교회에서 김복순과 결혼, 5월 평양으로 가 공무원(평안남도 도청 사회과의 서기)으로 일함
1941년(27세) - 제 20회 선전에 ‘맷돌질하는 여인’ 입선
1942년(28세) - 제 21회 선전에 ‘모자(母子)’ 입선
1943년(29세) - 제 22회 선전에 ‘실을 뽑는 여인’ 입선
1945년(31세) - 8•15광복 후 강원도 금성중학교 미술 교사
1950년(36세) - 6.25전쟁 후 월남
1951년(37세) - 전라도 군산에서 막노동을 하며 그림을 그림
1952년(38세) - 미군부대에서 초상화 그리는 일을 시작함
1953년(39세) - 제 2회 대한민국미술전 서양화부에 ‘우물가(집)’이 특선, 노상에서’ 입선, 창신동에 가옥 마련
1954년(40세) - 제 3회 국전에서 ‘풍경’과 ‘절구’ 입상, 이어 제 4회, 5회 국전 입선
1957년(43세) - 제 6회 국전에서 ‘세 여인’이 낙선
1959년(45세) - 제 8회 국전의 추천작가로 ‘앉아 있는 여인’ 출품, 이어 9회 10회 국전 출품
1962년(48세) - 한일국제교류전에 ‘나물’ 전시, 제 11회 국전에서 서양화부 심사위원으로 ‘소’와 ‘유동’을 출품, 오산 주한미공군사령부 도서관에서 박수근 특별 초대전
1963년(49세) - 왼쪽 눈 실명, 전농동으로 이사함.
1964년(50세) - 제 14회 국전 추천작가로‘할아버지와 손자’ 출품
1965년(51세) - 4월 초 청량리 위생병원에 입원해 5월 5일에 퇴원, 5월 6일 새벽 1시 전농동 집에서 별세, 경기도 포천군 소홀면 동신교회 묘지에 안장. 제 14회 국전에 유작 ‘유동(遊童)’ 전시. 10월 6일~ 10일 소공동 중앙공보관에서 유작전 79점의 작품 전시.

"작품이 발표된 시점에선 크게 주목 받지 못했어도 한국의 현대미술에도 박수근(1914-1965)이라는 화가가 있다. 그는 가정형편상 화가 수업을 받은 일도 없었고 평생 가난한 삶 때문에 캔버스와 오일을 살 돈조차 마련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는 화가로서의 삶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캔버스 대신 종이 위에 아주 작은 작품을 그리면서 자신의 예술적 의지와 혼을 담아냈다. 당시에는 크게 주목 받지 못했던 그의 소품들은 날이 갈수록 제 빛을 발하여 오늘날에는 마치 지난 시절 잃어버린 보석처럼 빛나면서 한국인들은 그를 ‘우리의 화가’, ‘국민화가’로 칭송하고 있다.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 박수근에게는 아무런 일거리가 없었다. 그는 도시 빈민에 불과했다. 그의 유일한 수입원은 반도호텔 내에 있는 당시 유일한 갤러리인 반도화랑에서 이따금 팔아준 그림 값이 전부였다. 당시 그의 그림 값은 30 달러 정도였고 한국의 국민소득은 개인당 70달러였다. 미술품 거래라는 것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박수근의 작품은 특히 외국인들이 좋아하여 간간히 팔리곤 했다고 한다. 그의 작품은 소품인데다 값이 저렴하였고 무엇보다도 한국적인 서정이 물씬 풍겼기 때문이었다.

그런 외국인 중에 주한 미국 외교관의 부인인 마가렛 밀러 여사는 박수근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녀는 박수근의 그림을 수십 점 소장하였고 다른 외교관 부인들과 함께 아뜰리에 탐방 프로그램을 만들어 그의 낡고 허름한 집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귀국 후에도 편지로 박수근의 그림을 구입해 주었다. 이렇게 그녀가 미국에서 작품을 구입해 주면 박수근은 그림 값 대신 그림물감을 사서 보내 줄 것을 부탁하곤 하였다. 지금 그의 고향인 양구의 박수근미술관에 소장된 밀러 여사의 편지를 보면 가난한 화가의 그림에 대한 열정이 애틋하게 남아 있다.

1957년,  43세 때 모처럼 1백호의 대작을 그려 출품한 것이 낙선되자 크게 실망하고 슬픔에 빠지기도 했다. 이때부터 그는 폭음하는 버릇이 생겼다고 한다. 오늘의 시점에서는 이해되기 쉽지 않지만 당시만 해도 국전을 통한 미술활동이 화가 이력의 전부였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박수근의 상심은 그렇게 컸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고 국전 출품을 포기하고 그림에 열중하였다. 그리하여 1960년에는 추천작가로 초대되었고 62년에는 심사위원을 맡으면서 화단에서 명예를 회복했다.

그는 일하는 여인의 모습을 즐겨 그렸다. <광주리를 이고 가는 여인>, <빨래하는 여인>, <장터의 여인>, <절구질하는 여인>. 박수근은 또 아이들의 천진스런 모습도 즐겨 그렸다. <동생을 업고 있는 언니>, <독서하는 소녀>. 그러나 그는 남자를 그릴 때면 늘 <쉬고 있는 남자>를 그리곤 했다. 사실 이런 대상들은 그가 살아가면서 늘상 대하던 도회지 풍경들이었다. 박수근은 이런 서민들의 일상적 모습(everybody's everyday life)을 어떤 누구와도 다른 형식으로 표현하였다.
 
그것은 사실주의도 낭만주의도 인상주의도 표현주의도 아닌 박수근만의 형식이었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대상들이 어떤 식으로든 변형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는 그 인물들이 있는 그대로 화면 속에 고착되어 있기를 원했다. 그것은 존재에 대한 긍정이고 애정이다. 이를 위하여 그는 화면을 아주 두텁고 거친 마티엘 기법을 창출하였다. 그의 그림에 나오는 대상들은 한결같이 이 거친 마티엘 속에 가늘고 굵은 검은 선으로 새겨져 있다. 그리하여 그가 묘사한 인물들은 화면 속에 고착되어 있는 암각화 같은 느낌을 준다. 박수근 예술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밀러 여사는 귀국 후 그의 예술세계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1965년에 한 잡지에 <조용한 아침의 나라 화가, 박수근>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이 글에서 그녀는 박수근이 어떻게 이 두터운 마티엘 효과를 나타냈는지를 화가에게 직접 들은 대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나는 그림제작에 있어서 붓과 나이프를 함께 사용한다. 캔버스 위의 첫 번째 층을 충분히 기름에 섞은 흰색과 담황갈색으로 바르고 이것을 말린다. 그 다음에 틈 사이사이의 각 층을 말리면서 층 위에 층을 만든 것이다. 맨 위의 표면은 물감을 섞은 매우 적은 양의 기름을 사용한다. 이런 식으로 해서 그것은 갈라지거나 깨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나는 과감하게 검은 윤곽선을 이용하여 대상을 스케치 넣는다.”

이것이 박수근의 독특한 조형어법이고 서양의 어느 화가에게서도 볼 수 없는 개성으로 되었다. 이 마티엘 기법을 통하여 그가 얻어낸 예술적 효과는 마치 한국의 산천에 즐비한 화강암 암벽에 새겨져 있는 마애불처럼 그 대상이 영원히 변하지 않고 거기에 존재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다만 거기에 묘사된 대상이 부처가 아니라 정직하고 순박하고 꾸밈없이 살아가는 서민의 모습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박수근은 겨울나무도 즐겨 그렸다. 그 나무 또한 특별한 아름다운 형태를 가진 것이 아니라 한국의 산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하고 전형적인 -인물로 치면 서민적인- 나무이다. 그리고 잎이 다 떨어져 앙상한 나뭇가지를 드러내면서 새 봄을 기다리는 벌거벗은 나무들이다. 이 또한 그의 인물화에서 보여준 예술적 내용과 다르지 않다. 즉 현재의 삶은 힘들어도 묵묵히 견디면서 희망을 잃지 않은 그런 나무의 모습을 담아낸 것이다.

서양화의 기법이 한국에 들어온 것은 약 1세기 전이다. 한국인들은 중국, 일본 등 다른 동양인들과 마찬가지로 서구화를 통하여 근대화의 길을 걸었다. 전통적인 수묵화의 기법을 현대적으로 발전시킨 이도 있었지만 서양화의 조형어법과 예술정신을 충실히 배워 한국의 근대, 현대 미술문화를 만들어 간 이도 있었다. 처음에는 서양화의 기법을 익히는데 충실하였다. 그리고 그 기법이 익숙해진 다음에는 추상미술을 비롯하여 조형언어 자체를 탐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첨단적인(up-to-date) 경향에 뒤지지 않으면서 세계미술의 경향에 시차 없이 동참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난 1세기 동안 한국 화가들이 서양미술의 기법과 정신을 맹목적으로 모방한 것은 아니었다. 이 새로운 조형어법을 익히면서 서양미술사에서는 볼 수 없는 아주 독창적이고 감동적인 그림 세계를 이룩한 화가도 적지 않다.

그 중 대표적인 화가가 박수근이며 한국인들은 우리 현대미술에서 이런 훌륭한 화가를 갖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박수근이 이룩한 예술적 성과를 서양미술사의 흐름에서 어느 사조에 해당하는가를 따져 본다는 것은 넌센스이다. 그는 시대사조의 경향에 개의치 않고 오직 자신이 독창적인 그림 세계를 실현해 갔을 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서양 사조를 열심히 따랐던 동시대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가장 독창적이고 가장 한국적인 화가로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독일의 문학가 괴테가 일찍이 말했던 유명한 정의,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다.”라고 한 것은 박수근의 예술에 가장 잘 들어맞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유홍준/미술평론가, 명지대교수의 ‘현대화랑’ 평에서 발췌 편집)
박수근 작품 http://www.hyundaihwarang.com/?c=artist&s=1&gbn=view&gp=1&ix=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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