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조국을 그리며 잠든 세계적 현대 음악가 윤이상(1971~1995)

기사입력 2021.04.30 11:09 조회수 5,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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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jpg

윤이상(尹伊桑, 1917-1995)


윤이상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현대음악가이다. 서양 음악에 동양적인 요소를 입힌 도교와 불교를 소재로 하는 곡이 많다.
그는 서양음악의 기교와 스타일, 한국전통음악 '아악'의 미학논리를 통해 만들어낸 자신의 고유의 음을 융합시켜 전혀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냈다. 동양 도교사상의 음양의 원리가 적용되면서 부분 속에 전체를, 변화 속에서의 동질성을 추구하는 그의 음악세계는 서구의 예술세계에 새로운 충격을 주면서 현대음악사의 한 획을 그었다. 특히 두고 온 고향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나라를 빼앗긴 일제로부터 분단까지 우리 민족의 고통과 희망은 그의 예술을 관통한 주요한 주제였다.

윤이상은 1917년 9월 17일 경상남도 산청에서 태어나 1920년 충무(지금의 통영)로 이사를 해 학교를 다녔다. 어려서부터 풍금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잘 부르고 악보를 곧잘 읽는 등 음악에 소질을 보였다. 열세 살 때에 바이올린과 기타를 배워 직접 곡도 썼다.

1935년 상업학교에 진학하면 음악을 공부해도 좋다는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일본 오사카에 있는 상업학교에 입학하고 오사카 음악대학에서 첼로, 작곡, 음악 이론을 배웠다. 이때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이 억압받는 현실을 보고 사회적, 정치적 의식을 갖게 된다.

1937년 귀국해 통영으로 돌아와 화양학원(지금의 화양초등학교) 교사를 지내며 동요집 ‘목동의 노래’를 낸다. 1939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이케노우치 도모지로(池内友次郎)에게 대위법과 작곡을 배웠다. 1941년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자 한국으로 돌아왔다. 조선가곡 악보가 발각되어 1944년 두 달 간 옥살이를 했다. 이후 서울에서 결핵으로 쓰러져 경성제대병원에 입원 중에 해방을 맞이했다.

광복 후 통영으로 돌아와 유치환•김춘수•정윤주등 통영의 예술인들과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만들고 자신은 음악부문을 맡았다. 이때 통영고등학교 등 통영의 거의 모든 학교의 교가를 작곡했다. 그리고 일본에서 부산으로 몰려드는 전쟁고아들에 대한 얘기를 듣고 부산시립고아원의 소장이 되었다.

1948년 통영여자고등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일하다가 부산사범학교로 옮겨 음악을 가르치며 작곡을 했다. 이듬 해 8월 가곡집 ‘달무리’를 부산에서 출판했는데 여기에 실린 ‘고풍의상’이나 ‘추천’등은 60년대에 많이 불렸다. 1950년 1월 30일 같은 학교에 국어 교사로 있던 이수자와 결혼했다. 한국전쟁 중에는 부산의 전시작곡가협회에서 활동하고 부산고등학교에서 일하다가 1953년 휴전되자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대학교 예술학부와 덕성여대 등에서 작곡과 음악이론을 가르치고 작품과 평론을 활발하게 발표했다. 1954년 ‘한국작곡가협회’의 사무국장으로 활동했다. 같은 해 글 ‘악계구상의 제 문제’를 썼다. 1956년 4월 ‘현악4중주 1번’과 ‘피아노 트리오’로 제5회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다. 이후 대한민국에서 습득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20세기 작곡기법과 음악이론을 공부하기 위하여 유럽으로 떠나기로 했다윤이상2.jpg

(사진:윤이상평화재단}


1956년 윤이상은 유럽으로 유학을 떠났다. 프랑스에서 Tony Aubin, Pierre Revel 등에게 배웠고1957년 독일로 가서 Boris Blacher, Josef Rufer 등에게 배웠다. 1958년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에 참가하여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으로 주목 받기 시작했고 1966년 오케스트라를 위한 ‘예악’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윤이상은 1967년 동백림 간첩단 사건이라는 누명을 쓰고 베를린에서 한국으로 강제 납치되어 모진 고문과 가혹한 수형 생활을 당했다. 이응노 화백, 천상병 시인 등 34명에게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최고 사형 등 유죄를 선고한 이 사건은 국내외적으로 커다란 저항을 불러 일으켰고 꾸준한 구명 운동으로 결국 이 사건을 조작했던 정권은 2년 만에 형집행정지로 풀어준다. 이후 윤이상은 독일로 돌아간다.

윤이상은 수형생활 동안에도 ‘나비의 미망인’, ‘율’, ‘영상’ 등을 작곡하여 세계인을 감동케 하였으나 대한민국은 끝까지 그를 박대해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채 눈을 감는다.

고국에 들어오지 못하는 동안 그는 뮌헨 올림픽 전야제에 오페라 ‘심청’을 초연하는 등 수많은 작품을 작곡해 1987년 독일연방 정부로부터 베를린 정도 750주년 기념 대공로 훈장을 받았다. 5.18광주민주항쟁 당시에는 김대중 석방운동을 하고 ‘광주여 영원히’를 작곡했다.

안타깝게도 1995년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지병으로 독일에서 눈을 감았다. 2018년 베를린에 있던 윤이상의 묘소는 생전에 꿈에도 그린 고향땅 통영의 바닷가(통영국제음악당 바닷가언덕)로 이장 되었윤이상1.jpg

 

(사진:By Assenmacher - 자작, CC BY-SA 3.0)

윤이상3.jpg

(사진 통영국제음악당으로 이장된 윤이상묘소)

윤이상 생애 발자취
1917.09.17 경상남도 산청군 덕산면에서 출생.
1920 충무(통영)로 이주.
1933 통영에서 서당과 보통학교 마침. 서울 상업학교 입학.  독일 음악가 프란츠 에케르트의 제자인 한 바이올린 주자로부터 2년 동안 화성학 교육 받음.
1935 일본 오사카 음악학교 입학. 2년간 작곡과 음악이론, 첼로 등 수학.
1937 일본에서 귀국. 화양학원(보통학고 과정) 교사생활 시작.
1939 도쿄에서 작곡가 이케노우치 토모지로에게 작곡 사사.
1941 태평양전쟁 발발. 전쟁 직전 귀국.
1944 징용 중 반일활동의 혐의로 체포, 두 달간 옥고.
1948~1952 통영여자고등학교, 부산사범학교, 부산고등학교 음악교사.
1950 1월 30일 부산사범학교 국어교사 이수자와 결혼. 부산대학 서양음악사 강의. 전시 작곡가협회 조직 후 한국작곡가협회 회원 활동. 가곡집 ‘달무리’(고풍의상, 달무리, 그네, 편지, 나그네 등 5곡)출판.
1953 종전 후 가족들과 함께 서울로 이주. 대학에서 작곡 가르치며 가곡, 실내악곡 등 발표.
1954 한국작곡가연맹 상임위원 선임.
1955 4월 11일 최초 작곡 ‘현악4중주 1번’ ‘피아노3중주’ 곡으로 제5회 서울시 문화상 수상.
1956 6월 프랑스로 유학.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에서 토니 오뱅에게서 작곡을, 피에르 르벨에게 음악이론 사사.
1957 서베를린 음악대학에서 음악이론은 슈바르츠-쉴링에게, 12음기법은 요제프 루피에게, 그리고 작곡은 보리스 블라허에게 사사.
1959 7월 서베를린 음악대학 졸업. 9월 네덜란드 발로벤에서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을 다름슈타트에서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을 프란시스 트라비스의 지휘로 초연. 여기서 큰 성공을 거두어 유럽 현대음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
1961 부인과 독일 합류.
1962 1월 29일 관현악곡 ‘바라’ 베를린 라디오방송교향악단 연주로 초연.
1963 퀼른 이주. 북한 방문. 바이올린 피아노를 위한 ‘가사’와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가락’ 발표.
1964 포드재단 예술가 프로그램 초청으르 베를린-슈마르겐도르프로 이주.
1965 오라토리움 ‘오 연꽃 속의 진주여’ 하노버 초연.
1966 10월 서독 도나우에싱겐 에르네스트 부어의 지휘로 ‘예약’ 초연.
1967 6월 17일, 한국 중앙정보부 서울로 납치.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으로 부인과 함께 기소. 12월 13일 제1심에서 종신형을 선고. 부인 이수자는 5년 형 집행유예로 석방. 윤이상은 1968년 3월 13일 제2심에서 15년 형 감형 처분, 1968년 12월 5일 제3심에서 10년 형 감형.
1968 교도소 수감 중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 완성. 건강 악화로 병원 이송돼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률(律)’과 플루트, 오보에, 바이올린, 첼로를 위한 ‘영상’ 창작. 석방되기 전 1968년 5월 서독 함부르크 자유예술원 회원 지명.
1969 2월 23일 서독 뉘른베르크 오페라극장 이중오페라 ‘꿈’(‘류퉁의 꿈’ ‘나비의 미망인’) 공연.
3월 30일 작곡가, 음악가들의 국제적 항의와 독일 정부의 조력 등으로 석방. 서베를린으로 돌아옴.
6월 23일 킬 문화상 수상.
1972 서베를린 음악대학 명예교수 임명. 8월 1일 뮌헨올림픽 문화행사 위촉 오페라 ‘심청’ 볼프강 자발리슈 지휘, 권터 레너트 연출로 초연.
1973 7~8월 미국 콜라라도 주 애스펜 음악제 참가, 많은 작품들이 연주됨.
1974 해외 민주화 운동에 투신. 서베를린 예술원 회원 추대.
1977 8월 한국민주민족통일해외연합(한민련) 유럽본부 의장으로 추대.
1977-1987 베를린 예술대학의정교수 재직. 루이제 린저와의 대담 ‘상처받은 용’ 출판.
1981 5월 8일 퀄른에서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 서부독일 라디오방송(WDR)교향악단 연주 초연.
1982 8월 북한에서 ‘광주여 영원히’ 연주. 이 후 북한에서 윤이상음악제 정기적 개최. 9월 제7회 대한민국음악제에서 이틀간 '윤이상 작곡의 밤' 개최. 9월 24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관현악의 밤에서는 프란시스 트라비스의 지휘와 KBS교향악단과의 협연으로 ‘서주와 추상’ ‘무악’ ‘예악’ ‘오보에 하프, 소관현악을 위한 이중협주곡:견우와 직녀이야기’ 등 연주. 우어줄라 홀리거와 하인츠 홀리거 등이 ‘로양’ ‘파리’ ‘오보에와 하프, 비올라를 위한 소나타’ 연주. 이후 남한에서 윤이상 작품 비정기적 연주.
1983-1987 매년 교향곡을 한 곡씩 발표함(교향곡Ⅰ~Ⅴ)
1984 5월 15일 ‘교향곡1번’(1982~1983) 베를린 필하모니 창단 100주년 기념(라인하르트페터스 지휘) 초연. 12월 5일 평양 윤일상음악연구소 개관. 한민련 유럽본부 의장 반납.
1985 1월 15일 서독 튀빙겐대학이 명예 철학박사 학위 수여.
1987 70세 생일기념 뮌헨 '텍스트와 크리틱'사가 '작곡가 윤이상' 작품 논문집 발간.
9월 17일 베를린 탄생 750주년 기념행사 위촉 ‘교향곡 5번’ 작곡,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 독창과 베를린 필하모니교향악단(한스 젠더 지휘)의 연주로 윤이상의 70세 생일에 초연.
9월 24~25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국제 심포지엄 '민족문화와 세계 공개성' 토론자로 참석.
9월 26일 일본 마이니치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38선상에서의 민족합동대축전 제의.
1988 5월 21일 '독일연방공화국 대공로훈장'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대통령 수여.
7월 1일 도쿄에서 휴전선상의 '민족합동음악축전'을 남북한 정부에 정식 제안.
10월 서베를린이 '유럽의 문화도시'로 지정되어 베를린 축제주간 때 윤이상 음악회 개최.
1990 분단 45년 만에 남북통일음악제 주관. 10월 서울전통음악연주단이 처음으로 평양에서 열린 제1회 범민족통일음악회 참가, 12월에는 평양음악단이 서울송년음악회 참가.
1991 최성만, 홍은미 편역 ‘윤이상의 음악세계’ 간행(한길사). 국제현대음악협회 명예회원 추대.
1992 75세 생일기념 뮌헨 '텍스트와 크리틱'사 ‘윤이상, 시대의 작곡가’ 논문집 발간.
전 세계적으로 윤이상 탄생 75주년 축하 음악회 개최. 일본에서도 11월 5일부터 16일까지 10일에 걸쳐 실내악, 관현악연주 및 강연회 등으로 '윤이상 탄생 75주년 기념 페스티벌' 개최, 11월 9일 일본에서 ‘윤이상, 나의조국 나의음악’ 출판.
12월 7일 함부르크자유예술원의 공로상 수상.
1993년 10월 22일 서울에서 열린 20세기 음악축제기간 중 한국 페스티벌 앙상블이 윤이상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연주함.
1994 범민련 의장직 반납. 9월 예음문화재단 주최로 서울, 부산, 광주 등지에서 윤이상의 음악축제 개최. 도서출판 HICE ’윤이상의 음악, 미학과 철학’ 출판.
1995 5월 9일 민주화를 위하여 분신자살한 청년들을 위해 지은 교향시 ‘화염속의 천사’ ‘에필로그’ 일본에서 발표. 독일 바이마르에서 괴테상 수상. 11월 3일 베를린에서 영면.
2018 윤이상 묘소 독일 베를린에서 고향 통영국제음악당 바닷가 언덕으로 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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