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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두 가지 의미를 가진 이태원(梨泰院), 이태원(異胎圓)
다른 두 가지 의미를 가진 이태원(梨泰院), 이태원(異胎圓)
1986년 한글학회에서 발간한 ‘한국지명총람’에 따르면 ‘이태원’이라는 지명에는 두 가지 유래가 존재한다고 되어 있다. 배나무 이(梨)와 역원(驛院)의 원에서 따온 이태원(梨泰院)이라는 설과 다를 이(異)와 태반 태(胎)를 사용한 이태원(異胎圓)이라는 전혀 다른 의미의 설도 있다. 서울 용산고등학교에 있는 이태원터 비 이태원은 한양 사대문 밖에 위치한 4대 역원 중 하나로, 유난히 배밭이 많았다는 데서 비롯한 이태원(梨泰院) 이름이 유래했다는 것이다. 한편 여기에는 임진왜란 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일본인, 임진왜란 중 일본군에게 성폭행을 당한 여성과 그 여성들이 낳은 아이들이 모여 살던 동네라는 이태원(異胎圓) 의미가 담겨 있다. 임진왜란 때 당시 이곳에는 여승인 비구니들이 수도하는 운종사(雲鍾寺)라는 절이 있었다. 왜적이 임진왜란 당시 이곳에 주둔하면서 여승들을 겁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왜군이 서울에서 물러나자 조정은 왜군에게 겁탈 당해 낳은 아이들 문제로 고심하였다. 마침내 조정에서는 운종사 여승을 포함하여 왜적의 아이를 낳은 부녀자들을 벌하지 않기로 하고 이곳에 보육원을 지어 그 아이들을 기르게 해, 그때부터 이곳을 이태원(異胎院)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임진왜란 때 항복한 왜군들이 조선에 귀화하여 여기에 모여 살았으므로 이타인(異他人)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지금의 이태원(梨泰院)으로 쓰인 것은 효종 때 이곳에 배나무를 많이 심어 재배했기 때문에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이태원은 이방인 공동체 성격이 강한 곳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조선 때부터 군사 관련 시설이 많았다. 일제 강점기 들어 군용지로 이용되면서 일본군 사령부가 머문 뒤 군사지역으로서 정체성을 드러냈다. 임오군란을 진압하러 조선에 온 청나라 군대가 1882∼1984년 주둔했고 1910∼1945년 일본군 조선사령부가, 광복 이후엔 미군이 이곳을 차지했다. 한국전쟁 뒤 미군이 이태원 상권을 주도했다. 1970년대 미군기지에서 나온 물품들로 상권이 형성된 이태원은 미군 유흥가로 거듭나 클럽이 우후죽순 들어섰다. 1957년 미군의 외박·외출이 허용되면서 기지촌까지 생겼다. 1960년대 말까지 미군 대상 매춘업소가 남산3호 터널 입구부터 이태원 입구까지 해방촌과 삼각지 파출소 뒷골목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현재 이태원은 서울 속의 외국인 거리다. 점포마다 걸려있는 간판은 모두 외래어이고 오고 가는 행인도 내국인보다는 외국인이 더 많다. (사진출처: http://english.seoul.go.kr) 1960년대 말까지 미군을 대상으로 했던 매춘업소는 현재 녹사평역 일대 해방촌에서부터 이태원로에 이르는 넓은 권역에서 성행했다. 허름한 주점들이 늘어선 후커힐에 아직도 그 흔적이 일부 남아있기는 하지만 이태원 지구의 자체적인 노력으로 근래에는 거의 자취를 감췄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해밀턴 호텔과 이태원 시장을 따라 이태원에 미국인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쇼핑지구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는 자원이 부족하고 값싼 인력이 풍부했던 한국에서 당시 가공무역에 주력했던 데서 기인한다. 정부에서 보세제품수출정책을 추진하면서 이태원 일대에 미군을 고객으로 하는 양복점, 유기점, 신발가게, 구둣방, 보세점이 생겨났고 뒷골목에는 수출용 가내 공장들이 들어서게 됐다.
육지 속의 섬, 문향의 마을, 고은(古隱) – 경상북도 영양
육지 속의 섬, 문향의 마을, 고은(古隱) – 경상북도 영양
육지 속의 섬이라 불리는 경상북도 영양군(英陽郡). 청송군, 봉화군과 더불어 경상북도 북부 오지 중 하나로 영양고추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의 옛이름이 고은(古隱)이다. 옛고, 은둔할 은자의 뜻으로 이곳은 유배를 보내던 지역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선비들이 많이 나오고 이곳 출신 문인들도 많아 문향(文郷)의 마을로도 불린다. 조지훈선생의 주실마을, 오일도선생의 감천마을, 이문열선생의 두들마을이 모두 영양에 있다. 신라 초에 고은(古隱)이라 불리었는데 ‘고은’은 ‘곱다’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의견과 ‘고은’ ‘곱’에 ‘은’이 붙어 만들어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고은’이 ‘굽다’라는 의견은 영양을 감돌아 흐르는 ‘감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한자 땅이름으로 ‘반변천’(半邊川)·곡강(曲江)이라 부르는 이 강을 달리 ‘감내·감들내’라 부르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지역은 금장산·백암산·명동산·일월산 등의 산과 장군천·장파천·반변천 등의 하천이 굽이져 만나는 곳이다.(허재영교수 의견) 조지훈선생의 주실마을, 영양군 홈페이지 발췌 영양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고추이다. 매년 김장때면 서울 시청앞 광장에서 영양고추축제를 열고 있다. 영양의 대표 관광지 몇 곳을 소개한다. 두들마을/음식 디미방 영양군청 주도로, 석보면 두들마을(이문열의 고향)등 문인의 고향 4곳에서 답사 프로그램 ‘소풍’을 선보였는데, 두들마을 답사는 석천서당과 정부인 안동 장씨 예절관 등으로 이어진다. 전통한옥체험관에서 음식디미방 요리를 먹을 수 있다. 선바위와 남이포 입암면 연당리에 있는 선바위와 남이포는 '영양고추'와 같이 영양의 상징과 같은 곳이다. 선바위 관광지에서 다리를 건너 절벽 밑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가면 ‘남이정’이란 정자가 나온다. 강 건너 절벽에 촛대처럼 하늘로 치솟은 바위가 선바위다. 남이포는 조선시대 남이 장군이 모반세력을 평정한 곳이라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이외에도 영양산촌생활박물관, 지훈문학관, 수하계곡, 측백수림, 서석지와 연당마을, 두메송하마을, 영양고추홍보관, 용화리삼층석탑, 삼의계곡, 일월산과 자생화공원, 반딧불이천문대 및 생태공원 등이 있다. 선바위 서석지
설악산 만경대(萬景臺)? 망경대(望景臺)?
설악산 만경대(萬景臺)? 망경대(望景臺)?
설악산에만 만경대가 세 곳이나 있다. 첫째는 속초시의 외설악지구에 있는 만경대로 천불동계곡과 공룡능선 등을 조망 할 수 있고, 둘째는 인제군 내설악지구에의 오세암 바로 앞 용아장성과 공룡능선, 나한봉 등을 조망 할 수 있는 만경대, 마지막 셋째는 46년만에 개방된 남설악의 흘림골과 주전골 사이의 만물상을 조망 할 수 있는 만경대 등이다. 망경대는 절벽 정상에는 옛날 주전골의 가짜 돈을 만들던 곳을 감시하던 초소인 망대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망경대라고 불렀다고 한다. 한편 만경대라는 이름은 서울 북한산과 경기 포천 운악산, 전주 남고산성 등에도 있다. 설악산국립공원 측에 따르면 지난 2001년 공원 계획을 세우면서 썼던 망경대라는 이름을 고수하려고 했지만 양양문화원이 이의를 제기했다. 지난 1976년 양양문화원이 발간한 향토지, 1968년과 1990년 양양군이 발간한 향토지와 양주지, 2010년 양양군지 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양양군지에 모두 만경대라는 명칭이 나오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려 시대 학자 이곡(1298~1351)의 동유기 가정집(東遊記 稼亭集)과 조선 시대 학자 김창흡(1653~1722)의 설악일기(雪嶽日記)에도 만경대하고 표기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설악산국립공원사무소는 만경대가 정식 탐방로로 개설되면서 임시 개설 당시 '망경대'로 표기한 안내판 등을 모두 '만경대'로 바꾸었다.
인천 문학산 삼호현(三呼峴), ‘사모지 고개’
인천 문학산 삼호현(三呼峴), ‘사모지 고개’
인천의 진산인 문학산을 걷다 보면 서쪽 거의 끝 부분에 위치한 연경산(일명 노적봉)이 이어지는 곳에 삼호현(三呼峴) 또는 ‘사모지 고개’ ‘사모재 고개’ 등으로 불리는 나지막한 고개가 있다. 옛날 사람들이 인천 읍내에서 문학산 기슭을 넘어 지금의 송도 방면 바다로 갈 때 이용하던 고개인데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보면 문학동에서 청학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다. 이미 백제시대부터 뱃길로 중국을 오가던 사신들이 지금의 송도 능허대(凌虛臺) 주변 한나루[大津]에서 배를 타기 위해 넘어 다니던 고개가 바로 삼호현이라 하며 그 이름도 이 같은 사연에서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중국을 오가던 사신들은 수도(首都)를 떠난 뒤 지금 남동구 만수동의 ‘별리현(別離峴)’을 거쳐, 다시 삼호현을 넘고 한나루에 도착했다. 이때 그들을 배웅하려 따라온 가족들은 별리현에서 헤어져야만 했는데 삼호현에 오른 사신들이 여전히 별리현에 서있는 가족들을 보며 ‘이름을 세 번[三] 불렀다[呼]’거나 ‘잘 다녀오겠다고 세 번을 말했다’ 해서 이 이름이 붙었다는 전설이다. 여기서 삼(三)이란 꼭 그 숫자가 아니라 ‘삼 동서가 모이면 황소도 잡는다’는 속담에서 보듯 여럿 또는 여러 번을 뜻하는 말이다. 사모지 또는 사모재 고개에 대해서는 사신들이 헤어진 가족을 사모해서 붙은 이름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이보다는 ‘삼호’의 발음이 바뀌어 ‘사모’가 되고, 여기에 ‘지’나 ‘재’가 덧붙은 형태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이때 ‘(삼호)지’는 물론 ‘재’의 발음이 바뀐 것이다. (출처: 인천광역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