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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디바들 '이난영, 마리아 칼라스, 에디트 피아프',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다
20세기의 디바들 '이난영, 마리아 칼라스, 에디트 피아프',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다
늘씬한 체구에 선명한 이목구비와 드라마틱한 멋진 노래. 그녀는 경제적으로 든든한 스폰서 '메네기니'와 결혼하며 최고의 스타로 오르게 되고 돈과 사랑을 모두 얻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오페라 공연에서 그녀를 보고 사랑에 빠진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선박 왕 '오나시스'였다. 그는 칼라스와 메네기니 부부를 자신의 유람선에 초청해 3주간 항해를 했는데 거기서 부적절한 애정사건이 발생한다. 유부남과 유부녀의 사랑. 칼라스는 수 십 명의 기자들을 모아 놓고 이혼을 발표하고 또한 당시로는 최고의 화제가 될만한 오나시스와의 동거를 시작하면서 결혼을 발표하려 했는데 얼마 안되는 짧 은 시간속에 세기적인 ‘운명의 장난’이 동시에 진행된다. 마국 케네디 대통령 암살 이후 미망인 '재클린 캐네디'와 전격적으로 결혼을 발표하는 오나시스. 이렇게 사랑게임은 허무하게 끝난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고 했던가? 이로부터 남은 생애를 우울증으로 고생하다가 파리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심장쇼크사 한다.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다’ 간 마리아 칼라스. 20세기에 가장 많이 팔린 오페라 음반 베스트 20 가운데 13편에 자신의 목소리를 담았지만 결국 비참하게 삶을 마감한다.
소금밭이 생태공원으로, 인천 소래습지생태공원
소금밭이 생태공원으로, 인천 소래습지생태공원
소래염전은 인천광역시 남동구 논현동, 경기도 시흥시 방산동, 포동, 월곶동, 장곡동에 있던 염전으로 조선총독부에서 건설한 제4기 염전 중 하나이다. 1935년부터 1937년에 걸쳐 준공되어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 하에서도 상당한 소금을 생산했으나 제염업이 사양산업이 됨에 따라 채산성악화로 1996년 7월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소래염전은 바닷물을 저수지, 두 개의 증발지, 결정지를 거쳐 소금을 생산했는데 인부들은 고된 작업을 거쳐 소금을 만들었다. 지금도 염전의 흔적으로 소금창고와 가시렁차(사진)가 남아 있다.(가시렁차는 ‘가소링차(가솔린차)’가 와전된 것으로 추정) 소래습지생태공원은 갯벌, 갯골과 폐염전 지역을 다양한 생물군락지 및 철새도래지로 복원시켰으며 각종 해양생물을 관찰하고 천일염을 생산했던 시설물과 자료를 볼 수 있는 전시관과 다양한 동, 식물을 탐구해 볼 수 있는 자연학습장, 그리고 광활한 갈대 및 풍차, 산책로, 쉼터 등이 마련되어 있다. 인천 시민의 편안한 휴식공간으로 활용될 뿐만 아니라 수도권 등 각지에서 찾는 명소이다. 천천히 공원 모두를 다 둘러보려면 4시간 이상이 걸리지만 보고 싶은 곳만 골라 볼 수 있도록 다양한 코스가 준비되어 있어 언제나 편하게 돌아 볼 수 있다. 또한 걷는 중간중간에 원두막이 설치되어 있어 쉬엄쉬엄 갈 수도 있다. 다만 습지라는 특성상 숲이 없어 태양이 작열할 때 걷기에는 다소 불편할 수 있다.
낙산 아래 도시빈민과 노동자들의 정주공간, 창신동(昌信洞)
낙산 아래 도시빈민과 노동자들의 정주공간, 창신동(昌信洞)
영조 27년(1751)에 ‘도성 삼군문 분계총록’에 보면 숭신방(성외) 밑에 숭신방계와 인창방(성외) 밑에 인창방계에 걸쳐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정조 13년(1789)에 간행된 ‘호구총수’를 보면 숭신방계가 숭신동계로, 인창방계가 인창동계로 바뀌어 있다. 갑오개혁(1894) 때 한성부 동서(東署) 숭신방(성외) 밑에 동문외계의 홍수동ㆍ복거교ㆍ남교ㆍ대정동ㆍ정자동ㆍ신리와 인창방(성외) 밑에 동문외계의 부정동ㆍ복거교 등으로 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에는 경기도령 제 3호에 의해 이 지역은 숭신면과 인창면이 되었다가 1914년 조선총독부령 제 111호 '부ㆍ군의 명칭ㆍ위치 및 관할구역의 개정'으로 경성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다시 경성부 동부에 편입되었으며 이어 경기도고시 제 7호에 의해 이 지역은 숭신면 자지동ㆍ정자동ㆍ성저동ㆍ신촌ㆍ당현동ㆍ인수동ㆍ복거교ㆍ홍수동ㆍ대정동ㆍ남교와 인창면 부어정동ㆍ복거교 등을 합하여 창신동이라 하였다. 1936년 경기도고시 제 32호에 의해 일제식 명칭으로 변경함에 따라 창신정이 되었다. 1943년 조선총독부령 제 163호에 의해 구제가 실시됨에 따라 동대문구가 설치되어 이에 속하였고 광복 후 1946년 일제식 동명을 모두 없앨 때 창신동으로 되었다. 1975년 대통령령 제 7816호에 의해 동대문구로부터 이관, 종로구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서울시 종로구 지명 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