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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주] 식생활:  한국 옛 사람들의 전통 상차림
[의/식/주] 식생활: 한국 옛 사람들의 전통 상차림
예로 부터 한국인들은 상차림에 있어서도 아이들에게는 밥상, 어른에게는 진지상, 임금님의 상은 수라상이라고 하여 예의를 다하였다. 평상시 아침 저녁으로 임금에게 올리는 수라상에는 대원반, 소원반, 사각반의 세 가지 상에 차려지는데 기본찬 이외에 열두가지를 놓는 십이첩 반상이다. 전국에서 생산되는 명산물들 가지고 궁중의 주방 상궁들의 빼어난 솜씨로 올려지는 이 수라상에는 밥과 찬품으로 구성한다. 수라는 임금의 밥을 일컫는 말로 흰밥과 팥밥, 미역국과 곰탕의 두가지 탕, 맑은 조치와 장으로 맛을 낸 조치, 찜, 전골, 세 종류의 김치 등 기본찬 외에도 구이, 전유어, 수육, 숙채, 생채, 조림, 젓갈류, 마른반찬, 회, 별찬 등으로 꾸며지며 이 열두가지 찬들은 재료와 조리법이 중복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써서 만든다. 생일이나 환갑 등 집안에 경사가 있을 때 큰 상에 음식을 차려놓고 여러 사람이 함께 둘러 앉아 음식을 먹도록 하는 상이다. 주식은 면류나 떡국, 만두국 가운데 계절에 맞는 것으로 내고 탕, 찜, 전유어, 편육, 적, 회, 잡채나 구절판 등의 채, 그리고 신선로 같은 특별한 음식을 내놓는다. 제례는 조상을 공경하는 유교사상의 하나로 지금까지 계속돼 오고 있다. 죽은 지 3년이 지나 소상, 대상이 끝나면 해마다 죽은날의 전일을 제삿날로 정하여 음식을 차려놓고 고인을 기린다. 제사에 올려지는 상차림은 일반 상차림과 달리 그릇에 있어 굽이 높은 제기를 사용한다든가 음식의 재료도 작게 썰지 않고 통으로 하고 양념도 약하게 한다. 주, 과, 포, 탕, 적, 혜, 채소, 청장, 편을 각기 정해진 제기에 담아 놓으며, 제기를 놓는 위치는 가풍이나 지방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사진은 조선의 마지막 왕비(이방자 여사)의 제사상차림 차례를 지낸 후 세배를 온 손님에게 내는 정월 초하루의 상차림이 다. 떡국과 함께 전, 적, 찜, 과일, 인절미 등 떡을 비롯하여 각종 한과에 이르기까지 먹음직스럽고 풍성하게 차려져 나온다. 떡국은 대표적인 명절의 하나인 설날의 음식이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정월 초하룻날에 떡국을 끓여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고 반드시 떡국으로 새해의 첫 식사를 하였다. 떡국을 한 그릇 먹었다는 것은 나이를 한 살 먹었다는 의미로 통용되기도 한다. 가래떡이라고 하는 흰떡을 어슷하게 썰어 육수에 넣고 끓이면 바로 떡국이 된다. 지금과 달리 예전에는 설날이면 집집마다 떡을 치는 소리가 정겨운 풍취를 자아내기도 했다. 폐백은 혼례를 치르고 난 후 신부가 신랑의 부모님을 비롯한 시댁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고 나서 처음 드리는 음식이다. 음식의 내용은 집안의 가풍이나 지방에 따라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서울에서는 대체로 자손 번영을 상징하는 대추를 붉은 실에 꿰어 둥글게 돌려담고 고기를 다져 편포나 장포를 만든다. 또 지방에 따라서는 육포 대신 닭을 통째로 쪄서 고명을 얹어 장식하기도 한다. 폐백음식은 음양의 이치에 따라 청홍 보자기에 싼다. 우리나라 전통 상차림의 하나인 7첩 반상이다. 반상(飯床)은 밥을 주식으로 하여 밥을 먹기에 어울리는 음식, 즉 반찬을 구성한 상차림을 말한다. 우리나라 식문화의 특징 중 하나는 이처럼 한 상 위에 모든 음식을 차려내는 데에 있다. 주식과 부식이 뚜렷하여 어느 한가지를 독립된 식품으로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반상 차림은 밥, 국, 김치를 기본으로 여기에다 곁들여지는 반찬의 가짓수에 따라 3첩, 5첩, 7첩, 9첩 등이 된다. 7첩 반상에는 기본인 밥, 국, 김치 외에 간장, 초간장, 초고추장 등의 3가지 종지, 그리고 첩 수에 드는 반찬으로 찌개, 찜, 숙채, 냉채, 구이, 조림,전, 마른반찬, 회 등이 나온다.
[의/식/주] 식생활:  한국 옛 사람들의 먹거리_ 뗙과 한과
[의/식/주] 식생활: 한국 옛 사람들의 먹거리_ 뗙과 한과
수저는 숟가락과 젓가락을 통칭하는 말로 일찍부터 우리나라는 이 수저를 이용해 왔다. 주,부식이 명확한 우리나라 음식에서는 숟가락으로는 밥을, 젓가락으로는 반찬을 취한다. 뿐만 아니라 숟가락을 많이 이용하기 때문에 우리의 식문화에는 국물이 많은 음식, 즉 죽과 탕류, 찌개류의 다양한 발달을 가져왔다.국토의 절반 이상이 산악지대이면서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는 작은 영토임에도 불구하고 산과 평야, 강과 바다를 골고루 갖추고 있어 다양한 식품이 산출되었다. 농업국가로 일찌기 벼농사가 발달해 쌀을 주식으로 하였으며 산야에 자생하는 각종 야채를 비롯하여 육류, 어류 등 풍부한 산물로 특히 음식의 조리법과 김치, 젓갈 등 저장법이 다양하고 정교하게 발달해 왔다. 또한 한국 음식의 특징은 음식의 간을 맞추거나 조미에 필요한 간장, 된장, 고추장 외에도 마늘, 생강, 파, 고추 가루 등 갖은 양념을 적절히 이용하여 새롭고 독특한 맛을 내었다는 것이다. 상차림은 밥과 국을 기본으로 김치며 찌개며 나물이며 여러 가지 반찬이 한 상에 모두 차려지는데 반찬의 가짓수에 따라 3첩 반상에서 12첩 반상까지 실로 다양하다. 곡물을 주 재료로 하여 만드는 떡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음식의 하나이다. 일찌기 우리 민족이 개발한 이 떡은 역사가 길고 보편성과 토착성이 깊은 전통음식의 하나이다. 삼국시대에도 명절이면 떡을 만들어 먹었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떡은 한국인의 통과의례나 명절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음식으로 이미 상고시대에서 부터 명절음식으로 제사음식으로 널리 쓰였다. 떡의 종류 또한 다양하여 메떡, 찰떡, 수수떡, 등 떡가루의 종류에 따라 다르고 쑥떡, 무떡, 느티떡 등 들어가는 재료와 떡고물에 따라 수도 없이 다양하다. 떡의 가장 기본형은 시루에 찌는 증병(烝餠)이며, 백설기, 팥시루떡 등 재료와 조리방법에 따라서도 그 가짓 수가 많다. 쫄깃쫄깃하고 말랑말랑한 맛이 일품인 인절미는 특히 겉에 뭍혀내는 팥이나 콩으로 만든 고물에 따라 맛의 차이가 있다. 혼례 등 잔치날에 빠지지 않는 이 인절미는 찹쌀을 불려서 시루나 찜통에 찐 다음 이를 꺼내어 곧바로 절구에 오래 친 후, 적당한 크기로 썰어 콩고물이나 흰 팥고물을 묻히는 간단한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떡을 칠 때에 살짝 데친 쑥을 넣어 만든 쑥인절미도 별미다. 절편은 쌀가루를 익혀 만든 흰떡을 쳐서 잘라낸 떡이라는 뜻이다. 납작하게 반죽된 떡 위에 각양각색의 문양이 새겨진 떡살로 찍어내어 아름다운 모양을 만든다. 뿐만 아니라절편에 여러가지 색으로 물을 들여 각색의 예쁜 떡을 만드는데 인절미와 마찬가지로 쑥을 넣은 쑥절편도 독특한 맛이 난다. 절편은 혼인 때 주로 많이 쓰이며 절편을 둥굴게 하여 그 위에 꽃처럼 여러 색을 놓아 찍어 아름답게 장식하기도 한다. 색색의 시각적인 아름다움이 한층 맛을 돋구는 경단은 쌀가루를 뜨거운 물에 익반죽하여 모양을 만든 다음 끓는 물에 삶아내어 여기에 콩고물이나 검정깨, 개피와 같은 각각의 다른 색깔을 내는 고물을 묻힌다. 달콤한 맛을 내는 경단은 고물의 재료에 따라 그 맛도 다양하다. 한국 고유의 과자인 한과는 곡물 가루에 꿀, 엿, 참기름, 설탕 등을 넣고 반죽하여 꽃모양 등 여러가지 모양의 판에 박아낸 후 기름에 지지거나 조려서 만든다. 떡과 마찬가지로 제례, 혼례, 연회 등의 필수 음식인 한과류는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며, 특히 유밀과와 다식은 의례음식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유밀과의 대표적인 것은 약과이며, 밀가루에 참기름, 꿀, 술을 넣어 반죽하여 기름에 튀긴 다음 다시 꿀에 담근다. 다식은 곡식가루 등을 꿀로 반죽하여 덩어리가 지도록 치댄 다음 아름다운 문양의 다식판에 박아낸 것으로 깨다식, 콩다식, 송화다식 등 여러 종류가 있다. 한과류는 크게 유과, 유밀과, 다식, 전과, 엿강정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의/식/주] 직물/염색:  한국 옛 사람들의 옷 만들기
[의/식/주] 직물/염색: 한국 옛 사람들의 옷 만들기
길쌈은 복식생활의 기본이 되는 것으로 우리나라 여성들의 대표적인 일거리 중 하나였으며 이미 상고 시대 부터 길쌈 풍속이 전해올 정도로 그 역사 또한 오래다. 조선시대에는 삼베, 모시, 무명, 명주 등의 길쌈이 전국적으로 성행해 복식문화의 꽃을 피웠으며 이에 따라 조선조에는 길쌈에 대한 풍속이 많이 남아있다. 특히 조선시대 때 삼베길쌈은 질적인 면에 상당한 발전을 보였으며 지방에 따라 북포, 강포, 안동포, 돌실나이 등 다양하게 발달했다. 모시길쌈은 순백색으로 가장 섬세하고 정교하게 짜는 한산모시가 유명하며 모시는 삼베나 무명과 마찬가지로 길쌈은 대개 재배와 수확, 씨앗기, 고치말기, 실잣기, 무명짜기 등의 순으로 이루어진다. 양반가나 계급 사회에서 주로 입혀지던 명주는 삼한시대 부터 길쌈의 기록이 나타나며 그 과정은 누에치기, 실뽑기, 실내리기, 명주짜기 등으로 이어진다. 요즘에도 국가가 지정한 무형문화재에 의해 그 길쌈의 풍속이 전수되고 있으며 사진은 고인이 된 옛 인간문화재 할머니가 안동포를 짜고 있는 모습이다. 유달리 백색을 선호한 민족이면서도 한복에 적용된 색상을 보면 그 다양하기가 이를 데 없다. 우리 복식의 아름다움은 먼저 오행에 기초한 전통색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으며, 대비적인 색채 사용으로는 흑백의 조화와 더불어 보색을 많이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염직은 삼국시대 부터 이미 상당한 수준의 발달을 보이고 있으며 계급이 엄격했던 조선시대에 오면 양반계층을 대상으로 염색이 발전되고 있다. 물들이는 횟수에 따라 연한색 부터 짙은 색 까지 다양한 색상을 내는 청색의 쪽물을 비롯하여, 홍색에는 소목, 분홍색은 홍화, 황색은 치자 등 주로 식물염료를 사용한다. 식물에는 뿌리, 나무껍질, 꽃, 열매 등 특정 부위에 색소를 함유하고 있어 그 부분을 채취하여 직물의 재료나 매염제, 염색 방법에 따라 다양한 색상을 내는데 홍화는 꽃으로, 치자는 열매로 물들인다. 바느질은 옛 여인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덕목의 하나로 길쌈과 더불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바느질 한 땀에도 여인들의 정성과 사랑과 염원이 깃들어 있었고 바느질에 소용되는 용구 또한 정성스럽고 귀중하게 간직해 왔다. 아름다운 색색의 종이를 발라 만든 바느질 상자 안에는 보통 실, 자, 가위 등 재봉용구를 비롯하여 실패, 바늘집, 바늘꽂이, 골무 등이 가지런하게 챙겨져 있다. 특히 바느질 도구에 딸리는 골무나 바늘집 같은 작은 용구 하나에도 정성을 다해 수를 놓은 여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가운데 원형의 바늘집을 중심으로 여기에 다양한 모양을 연결한 이 바늘꽂이는 옛 여인들의 재치와 미의식을 엿볼 수 있는 좋은 보기가 된다. 옷을 만들고 남은 명주들을 모아 두었다가 하트모양 등 여러개의 귀엽고 앙증스러운 형태들을 만들어 꼼꼼히 수를 놓은 이 바늘꽂이는 조형적인 면에서도 뛰어난 아름다움을 지닌다.
24절기란 무엇인가?
24절기란 무엇인가?
음력(陰曆, 太陰曆)이란 달의 차고 기울어짐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달력으로 고대부터 중국·바빌로니아·그리이스·유태·인도·이슬람 등에서 사용되었던 방식이다. 한국에서도 음력을 기준으로 거의 모든 생활이 이루어져 왔다. 즉 평년을 12개월로 하고 동지를 기점으로 황도를 24등분해서 계절을 세분하여 각 등분점에 태양이 통과할 때를 절기(節氣) 또는 중기(中氣)라 하여 모두 24절기로 정했다. 농본중심의 사회였던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절기를 기준으로 우주와 자연의 섭리를 읽었고 이것을 변화하는 계절과 생활의 길잡이로 삼았다. 이 곳에서는 오랫동안 우리 생활의 지표가 되어온 한국의 24절기에 관해 소개한다. 24절기의 첫번째 절기인 입춘은 음력 1월의 절기로 양력 2월 3, 4일경이고, 우수는 음력 1월의 중기로 양력 2월 18, 19일경이다. 언 땅이 녹고 땅 속에서 잠자던 벌레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며 물고기가 얼음 밑을 돌아다니고 초목에서 싹이 트는 시기이다. 입춘은 농촌에서 농기구 정비, 농사 정보교환, 보리밟기, 거름주기 등 농사의 준비가 시작되는 기간으로, 보리뿌리의 수나 바람의 강도로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기도 한다. 농촌과 일반 가정에서는 '춘첩(春帖)'이라 하여 '입춘대길(立春大吉)'같이 복을 기원하는 좋은 뜻의 글귀를 기둥, 대문, 천정 등에 써서 붙이기도 한다. 경칩은 음력 2월의 절기로 양력 3월 5, 6일경이고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춘분은 음력 2월의 중기로 양력 3월 21일이다. 이 때는 얼음이 풀리고 날씨가 따뜻해서 만물이 소생하는 봄으로 개구리나 뱀처럼 겨울잠을 자던 짐승들이 깨어나고 온갖 꽃이 피며 제비가 날아오는 시기이다. 농사가 시작되어 두엄주기, 객토넣기, 봄배추, 감자, 옥수수, 푸성귀 등의 씨 뿌리기를 하고 보리밭에 거름주기, 비료주기, 보리밟기 등을 한다. 경칩에 벽을 바르거나 담을 쌓으면 탈이 없다고 하며, 보리싹의 성장으로 농사의 풍·흉을 점치기도 한다. 청명은 음력 3월의 절기로 양력 4월 5, 6일경이고, 곡우는 음력 3월의 중기로 양력 4월 20일경이다. 청명에는 가래질, 논둑다지기, 논갈이, 못자리 만들기 등의 논농사 준비와 보리밭매기, 채소의 파종, 거름주기 등이 이루어진다. 이 때에 장을 담그면 맛이 좋다고 하여 1년 동안 먹을 장을 담그고, 누에를 치며 목화를 심기도 한다. 곡우에는 못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볍씨를 담근다. 이 무렵의 조기는 살은 적지만 연하고 맛있어서 서해와 황해에서는 조기잡이가 한창이다. 입하는 음력 4월의 절기로 양력 5월 5일경이고, 소만은 음력 4월의 중기로 양력 5월 21일경이다. 초여름이 시작되는 입하에는 모내기 준비가 이루어지고, 가을보리 먼저베기 등 밭농사의 김매기로 바쁘다. 소만 무렵에 모판에서 이앙한 모를 모내기하게 된다. 모내기는 품앗이 혹은 품을 사서 하게 되는데, 비가 많이 오면 동네에서 1주일 내에 끝낼 수도 있지만 물이 부족한 논은 한달 후까지 하게 되기도 한다. 모내기는 대개 남쪽보다 북쪽에서 먼저 시작된다. 망종은 5월의 절기로 양력 6월 5, 6일경이고 일년 중 낮의 길이가 가장 긴 하지는 음력 5월의 중기로 양력 6월 21, 22일경이다. 여름이 한창인 이 때 농촌에서는 모내기와 보리타작이 이루어진다. 보리타작이 끝나면 밭에 콩, 팥, 조, 밀, 배추, 무를 선별해서 심고 거름주기, 김매기 등으로 한없이 바쁜 시기이다. 작은 더위라는 뜻의 소서는 음력 6월의 절기로 양력 7월 7일경이고 큰 더위라는 대서는 음력 6월의 중기로 양력 7월 23일경이다. 이 때는 여름이 한창이라 날이 습하고 더우며 때로는 큰비가 내린다. 농가에서는 퇴비 마련, 논두렁깎기, 모내기 끝난 논의 김매기, 콩·팥·조의 김매기를 하게 된다. 수박, 참외, 토마토, 호박, 오이, 감자 등 과일과 채소가 풍부하며 여름을 이기기 위해 보신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 도시와 학교는 휴가철이고 농촌에서도 산과 들을 찾아 잠시 휴식을 취하기도 하는 때이다. 가을에 들어선다는 입추는 음력 7월의 절기로 양력 8월 7, 8일경이고, 처서는 음력 7월의 중기로 양력 8월 22, 23일경이 된다. 서늘한 바람이 불고 이슬이 내리며 쓰르라미가 우는 때로 천지가 쓸쓸해지기 시작하고 벼가 익는다. 입추 무렵에는 무와 배추를 심고, 처서 때에는 벼이삭이 여물기 시작하므로 논에 허수아비를 세워 새쫓기를 하게 된다. 서리가 내린다는 백로는 음력 8월의 절기로 양력 9월 8, 9일경이고, 밤과 낮의 길이가 같은 추분은 음력 8월의 중기로 양력 9월 23, 24일경이다. 이 무렵은 하늘이 높고 푸르며 오곡이 무르익는다. 밤, 대추, 사과, 감 등의 과일과 벼를 수확하고, 추석 명절이 있어 풍요로운 달이다. 논의 나락은 늦어도 백로 안에 피어야 결실이 좋고, 바람이 불면 벼가 여물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추분 무렵에 벼를 수확하고 남부지방에서는 가을 보리를 심는다. 옛날에는 부인들이 삼베나 모시를 음력 8월이 가기 전에 다 짜두었다. 한로는 음력 9월의 절기로 양력 10월 8, 9일경이고, 상강은 음력 9월의 중기로 양력 10월 23, 24일경이다. 이 무렵은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 제비는 따뜻한 강남으로 되돌아 가고 기러기가 날아오며 낙엽이 진다. 한로 무렵에는 콩, 팥, 조, 수수 그리고 벼 수확으로 바쁘다. 상강 무렵엔 서리나 눈이 내리기 전에 배추와 무를 뽑아야 얼지 않는다. 고추따기, 고구마, 깨 수확을 하고 마늘, 가을 보리 심기에도 바쁘다. 국화가 피어나고 단풍이 붉게 물드는 아름다운 계절로 국화술, 국화전, 화채 등 계절음식도 만들어 먹는다. 겨울이 시작된다는 입동은 음력 10월의 절기로 양력 11월 7, 8일경이고 소설은 음력 10월의 중기로 양력 11월 22일경이다. 이 무렵엔 물과 땅이 얼기 시작하고 눈이 내리며 말 그대로 겨울이 시작되는 때이다. 눈이 내리기 전에 밭작물을 뽑고 겨우내 먹을 김장김치를 담그는 등 겨울준비를 한다. 김장 독을 땅 속에 묻어 보관하면 그 맛이 최고지만 요즘은 개량 김치독을 사용하거나 김치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 판매하기도 한다. 김장은 북쪽 지방부터 담그기 시작하여 남쪽으로 내려간다. 큰 눈이 내린다는 대설은 음력 11월의 절기로 양력 12월 8일경이고 일년 중 밤이 가장 긴 동지는 음력 11월의 중기로 양력 12월 22이다. 이 시기에 농촌은 비교적 한가한 시간을 맞게 된다. 옛날 농가에서는 밤에 짚으로 새끼, 가마니 등을 짜고 겨울 땔감을 마련했지만 요즘은 비닐 하우스에서 사계절 채소를 재배하며 제주도에서는 귤, 파인애플 등 열대과일을 재배한다. 또한 방한준비와 함께 씨앗과 곡식 저장, 퇴비, 농기구 정리, 양념류의 씨앗심기 등 다음해 농사의 준비를 한다. 동지에는 잡귀를 쫓는 의미로 붉은 팥죽을 만들어 먹는다. 소한은 음력 12월의 절기로 양력 1월 5일경이고, 24절기 중 마지막 절기인 대한은 음력 12월의 중기로 양력 21일경이다. 한국의 겨울은 보통 3한 4온으로 이 무렵의 날씨가 가장 춥다. 절기의 명칭으로는 대한이 소한보다 더 추울 것 같지만 "대한이 소한 집에 가서 얼어 죽었다.", "소한 추위는 꾸어다가라도 한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한국에서는 소한 때가 더 춥다. 이 시기는 큰 눈이 많이 내려 어느 때보다 아름다운 설경을 이루기도 한다.
한국인이 믿는 종교
한국인이 믿는 종교
오랜 세월동안 우리의 문화에 깊이 뿌리내려온 민간신앙을 비롯하여 외래종교인 불교, 도교, 유교, 기독교 등 수없는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한국의 다종교 상황은 한국문화가 지니고 있는 독특한 성격이자, 곧 한국인의 삶의 원형이다. 특히 넓은 뿌리와 역사를 가진 민간신앙은 무속, 마을제사, 가정신앙, 점복, 주술 등으로 폭넓게 전승되었으며 삼국시대로부터 고려시대에 걸친 불교문화, 조선 5백년의 유교, 근대 이후의 기독교 등의 외래종교 안에도 민간신앙의 요소들이 잠복돼 있다.또 민간신앙은 외래종교의 조직이나 교리등과 융합하여 동학이나 증산교와 같은 자생종교로 성장해 오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민간신앙 자체는 무속을 비롯한 판소리, 마을제사와 농악들 처럼 민속예술과 전통문화 보존의 뿌리를 이루어 왔다. 무당이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노래와 춤으로 인간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비는 의식이다. 무당은 신과 인간의 사이에서 인간의 소원을 신에게 고하고 신의 뜻을 인간에 전달해주는 중간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서낭당은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나 고갯마루에 수북히 쌓인 돌무더기로 그 옆에는 보통 신성시되는 나무나 장승이 세워져 있다. 사람들은 그 옆을 지나 다니면서 돌이나 나무 또는 오색의 천 등을 올려놓으면서 개인의 소원이나 마을의 평안을 빌었다. 즉, 서낭당은 마을의 수호신인 서낭을 모시는 당(堂)이다. 그러나 집을 따로 짓는 경우도 있으나 때로는 돌을 원뿔모양으로 쌓아 올리거나 그 옆에 서낭나무 또는 돌기둥이 서기도 하고 여기에 오색 천을 매단 새끼줄을 감기도 한다. 이 곳에 올려놓은 돌이나 나무, 천조각은 함부로 무너뜨리거나 자리를 옮겨 놓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어느 마을에나 서낭당을 중심으로 한 옛 이야기가 하나쯤은 있어서 한국 민간신앙의 특징인 신성시되면서도 사람들과 친근한 마을신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장승은 마을의 입구나 길가에 세운 나무나 돌을 깎아 만든 마을의 수호신으로 마을을 위협하는 잡귀를 물리치고 재난으로부터 보호하며 때로는 개인적으로 소원을 기원하는 대상으로써의 역할을 한다. 또한 사찰의 입구나 지역간의 경계선에 서서 경계표와 이정표 등의 역할도 한다. 전체는 기둥의 형태로 윗부분에 사람의 얼굴 형태를 소박하게 새기고 아래부분에는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 등의 글씨를 새겨 남녀 한 쌍을 세운다. 왕방울 만한 눈은 부릅뜨고 코는 주먹코이며 귀까지 찢어진 입에는 송곳니를 드러낸 무시무시한 표정을 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꾸밈없이 수수하고 자비로우며 친밀감을 주는 얼굴이 기도 하다. 이러한 장승은 신앙의 대상이기 때문에 신성시되어 함부로 만지거나 상하게 하면 벌을 받는다. 남자와 여자의 성기 모양을 본 떠 만든 모형이나 그를 닮은 형태를 숭배하는 민간신앙의 하나이다. 이러한 성기신앙의 역사는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시작되어 바위에 새긴 성기를 노출한 남자 그림이나 신라시대의 토우(土偶) 등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이후에도 돌이나 나무, 도토기(陶土器) 등으로 성기 모형을 만들거나 성기와 유사한 암석이나 지형 등의 자연물을 숭배의 대상으로 하기도 한다. 인간이 생존하는 데에는 농사나 사냥, 고기잡이의 풍요가 절실하게 필요했으며, 또한 자손의 번창을 기원하는 마음은 성생활의 내면적 의의를 깨닫는데 도달하게 되어 성신앙을 사회적.문화적으로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 다산(多産)과 풍요(豊饒)를 상징하는 성기를 숭배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불교적인 성격을 띤 국가행사로 그 시작은 신라 진흥왕 때(551년) 열리게 되었고 특히 고려시대에 성행하였다. 불교에서는 부처님께 등(燈)과 향(香)을 올리는 것을 중요시하는데, 특히 등을 밝힘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밝고 맑고 바르게 하여 이로써 부처님께 귀의하고자 하는 것이다. 신라시대 이래로 전국적으로 여러 날에 걸쳐 이루어지던 연등회는 매우 화려하고 성대하게 치러졌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불교를 억압하던 시대의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연등회는 비록 규모는 축소되었으나 꾸준히 이어져 내려온다. 오늘날에도 부처님 오신날인 4월 초파일(음력 4월 8일)에 전국적으로 연등회가 이루어지고 있다. 각 절마다 불교신도들이 각기 자신의 등을 하나씩 들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며 시내에서는 각양각색의 연등을 들고 행진을 하기도 한다. 사월 초파일에 절에서 승려가 염주를 들고 부처의 공덕을 노래하면서 탑을 돌면 신도들이 등에 붉을 밝혀 들고 그 뒤를 따라 돌면서 극락왕생(極樂往生)을 기원하는 불교의식으로 시작되었으나 불교가 대중화되면서 민속놀이의 하나로 변하였다.따라서 처음에는 불교적인 음악을 연주하고 부처에 대한 칭송을 하다가 차츰 민요풍의 노래도 부르게 되고 개인의 소원을 빌게도 되었다. 또한 참여 인원도 늘어나서 큰 절에서는 수백 명이 참가하는 탑돌이의 장관을 볼 수 있다.탑을 도는 순서와 방향에 따라 10가지로 구분되는데 비록 민속놀이지만 불교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매우 경건한 형태를 진행되는 것이 특징이다. 오늘날에는 쇠퇴되었다가 1970년 속리산 법주사에서 재연되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석전은 원래는 산천(山川)이나 묘사(廟社) 또는 학교에서 선현(先賢)을 추모하기 위하여 올리던 의식인데 시대를 내려오면서 학교에서 올리는 의식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굳어졌다. 매년 봄(음력 2월)과 가을(음력 8월) 두 차례에 걸쳐 문묘(文廟)에서 석전을 올린다. 의식에서는 음식을 차리고 문묘제례악(文廟祭禮樂)을 연주하며 일무(佾舞)를 춘다. 의식의 순서는 물론 참여하는 인원, 음식의 종류와 놓는 방법, 연주하는 음악과 춤 등에 대하여 그 절차와 격식이 엄격하고 까다롭게 정해져 있으며 의식은 매우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에서 진행된다. 1986년 11월 1일에 성균관의 석전대제보존회가 중요무형문화재 제 85호로 지정되었으며 오늘날도 해마다 봄, 가을에 석전을 올린다. 한국에 카톨릭이 전래되면서 처음에는 종교이기보다는 서양의 학문으로 받아들여졌다. 차츰 많은 사람들이 서학(西學)에 심취하게 되었고, 여러 경로를 통해 들어온 주문모(周文謨)와 같은 선교사들의 전도에 의해 교세가 확장되었다. 1784년에는 이승훈(李承薰)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와 신앙공동체를 구성함으로써 본격적인 교회가 창설되었다. 많은 박해가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세는 더욱 확장되어 정약용의 형제인 정약전.정약종과 같은 학자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신도를 얻게 된다.이렇게 해서 발전한 천주교는 근대사회에 들어와 여러 가지 사회사업을 통해 국민들을 계몽하였고, 오늘날은 거의 200만에 가까운 신자를 가지고 있으며 전국적으로 많은 학교와 병원 등을 세워 교육과 의료사업을 통한 전도사업에 힘쓰고 있다. 한국 카톨릭의 발전은 1969년 서울대교구 교구장 김수환(金壽煥)이 추기경에 서입되는 결실을 가져왔으며 한국에 카톨릭이 전래된 지 200주년이 되는 해인 1984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내한하여 기념집회를 집전하기도 하였다. 한국에 기독교를 처음 들여온 것은 미국의 북장로교로, 1884년 의료선교사 알렌(Allen, H.N.)의 서울 도착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는 광혜원(廣惠院)을 열고 의료사업을 통해 선교의 문을 열었으며, 곧이어 북장로교의 언더우드와 북감리교의 아펜젤러 (Appenzeller,H.G.), 스크랜턴(Scranton,W.B.) 등이 도착하면서 이화학당 . 배재학당 등을 세워 교육을 통한 선교활동에 들어가게 된다.초기 기독교회는 전통과의 이질성 때문에 심한 박해를 받았으나 활발한 반일운동을 계기로 민족교회로서 자리잡게 된다. 꾸준한 교육을 통한 계몽운동으로 민중의 눈을 뜨게 하였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사회사업을 추진하는 가운데 교세를 확장하여 1984년에는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지 100주년이 되는 해를 맞이하였다.현재는 세계 각국으로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으며 전체 인구의 25%에 달하는 900만의 신도를 갖게 되었다. 이 사진은 영락교회로 1945년 한경직 목사에 의해 설립되어 각종 기독교선교운동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중요한 사업을 많이 전개하였고 현재는 약 6만 여명의 교인을 가지고 있다. 천도교는 동학(東學)을 바탕으로 발전된 민족종교로 처음에는 기존의 정치체제를 개혁하고자 시작한 단체였으나 일부 세력이 친일화하자 정치적 관심을 포기하고 1905년 교명을 천도교로 개칭하면서 새로운 교리와 체제를 확립하고 본격적인 종교로서의 사업을 시작하였다. 국민들에게 사회교육을 실시하여 민족정신을 고취시킨 결과 3.1만세운동 때에 중심역할을 담당하였고, 잡지를 발간하는 등 근대적인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계몽에 힘썼다. 천도교의 기본정신은 인즉천(人卽天)으로 이는 자기의 마음을 스스로 깨달으면 그 몸이 곧 하늘이고 그 마음이 곧 하늘이므로 하늘을 모시는 것은 자기를 모시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즉 천도교의 중심교리는 하늘의 이치를 믿는 것이며 하늘은 인간의 마음에서 생기므로 결국 인간의 정신이 가장 중요하다는 인간지상주의를 표방한다. 천도교는 내세가 아니라 현세에서 지상천국을 건설할 것을 주장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개인의 인격을 완성하여 윤리적 사회를 이룩하고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여 세계의 신앙을 하나로 통일할 것을 주장한다. 한국 자생종교의 하나로 1916년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 출신의 박중빈(朴重彬, 호는 소태산(少太山))에 의해 시작되었다. 원불교는 그 연원을 불교에 두고는 있으나 근본진리가 사상적으로 같을 뿐이고, 창교자인 소태산은 시대화, 생활화, 대중화를 내세워 불교를 혁신하였다. 모든 존재를 서로 가능하게 하는 힘과 법칙은 '은(恩)'으로 유지되는 것이며 이를 깨닫고 은혜를 갚으려 하는 것이 원불교의 신앙이다. 또한 끊임없이 정신을 수양하면 원만하고 거짓 없는 본래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으며 그 마음을 활용하면 한없는 은혜와 위력을 얻게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교리(敎理)는 원불교의 상징인 '○'으로 정리되었다. 여러 가지 공익사업을 행하는 가운데 건전한 종교로 성장한 원불교는 현재의 신도가 약 100만으로 추정되며 '진리는 하나, 세계도 하나, 인류는 한가족, 세상은 한 일터, 개척하자 일원세계'라는 표어를 내걸고 내적으로는 실력을 쌓고 외적으로는 나라와 사회를 위해 힘써 일하는 종교로 발전하고 있다.
숨어있는 제주 하천 캐니언, 효돈천 탐사
숨어있는 제주 하천 캐니언, 효돈천 탐사
미국에 그랜드 캐니언이 있다면 한국에는 속으로 들어가야만 보이는 숨어있는 제주 하천 캐니언, 효돈천이 있다. 제주 서귀포에 한라산 남쪽을 대표하는 하천, 효돈천이 흐른다. 한라산 정상에서부터 내려오는 물줄기로 하효동과 남원 하례리를 거쳐 13km 간 이어지다가 하류의 유명한 관광지 쇠소깍에 이르러 바다로 흘러간다. 이 계곡에는 난대식물과 활엽수림 등이 우거져 다양한 식물자원이 많고 숲과 물이 만나 신비로움을 풍겨 유네스코가 지정한 생물권 보존지역이기도 하다. 효돈천은 제주를 찾는 일반 관광객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사람의 발길이 드문 오지이다. 이 계곡 트래킹을 하려면 먼저 한라산국립공원관리소의 사전 허가를 받아야 한다. 자연생태계와 자연경관 보호 및 탐방객의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출입통제구역을 두고 있는데 이곳도 이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번 하천 탐사는 하류에서 상류로 올라가는 코스로 효돈천 상류에서 시작해 돈내코 원앙폭포까지 약 5Km 구간을 걷는다. 칡오름을 바라보며 걷기 시작한다. 여전히 땀은 비오듯하고... 건천인 계곡 곳곳에 향기로운 주인공 승두목이 아주 많이 피어 있었다. 중대가리꽃이라 부르기도 한다. 꽃피기 전 동글동글 스님 머리를 닮아서 ㅋ ㅋ ㅋ 오... 신비스런 곳들이 군데군데 많은 게 기대를 져버리진 않는군... 볼거리 많으니 좋아... 이번 구간 걷기중 만난 특이했던 마른 폭포 한라산에 비가 많이 내리면 순식간에 계곡물이 불어 이런 장관을 만들었다니... 그저 자연의 힘에 감탄만이 위에서 내려다보니 자갈들과 검은모래가 산처럼 쌓여있다. 급물살이 만든 작품은 언제나 그렇듯 다 다르고 탄성이 절로. 때론 자갈밭을 때론 사막처럼 모래 산을 넘고 또 넘고 커다란 바위틈으로 기어 통과 하기도 했다. 모두가 탄성을 지르던 구간 그러나 직진이 안된다. 도저히 방법이 없어 후퇴. 어느 구간쯤에서 밧줄타고 내려와 배낭을 벗어 던지고 아쉬운 그 구간으로 내려가본다. 와~우 아주아주 깊다. 신비스런 곳이다. 자꾸만 아쉬움에 자릴 뜨지 못하고 다시 한 컷 덥긴 했지만 지난번 구간보단 흐르는 맑은 물이 있어서 좋다. 오를수록 물은 더 차가워졌고 작은 폭포들이 제각각 뽐내며 멋부리고 있었다. 어느 구간부터는 아예 물속으로 걸었다. 오늘의 도착점인 원앙폭포에 도착하니 그동안 사람 구경 못했는데 어마어마한 인파들... 이렇게 아름다운 제주 속 살을 볼 수 있다는 건 큰 행운이다. 제주에 이처럼 때묻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숨은 비경들을 더 아끼고 사랑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일정을 정리한다.
다크 투어리즘, 제주 4•3 치유 공간 알뜨르 문화예술공간
다크 투어리즘, 제주 4•3 치유 공간 알뜨르 문화예술공간
또 제주야? 또 올레길을 걸어? 라는 친구들의 핀잔을 뒤로하고 이미 여러 번을 걸은 올레 10코스(화순항~모슬포항)를 이번엔 역방향으로 걷기로 한다. 과거 모슬포항이 아니다. 새로운 여객터미널을 만들고 운진항이라고 개명하고 익숙한 모슬포항을 대신한다. 오늘의 걷기 목적은 이름도 생소한 다크투어리즘(Dark Tourism, 전쟁·학살 등 비극적 역사의 현장이나 재난과 재해가 일어났던 곳을 돌아보며 교훈을 얻기 위하여 떠나는 여행, 일명 역사교훈여행)의 생생한 현장, 설치 미술작품들을 둘러 보는 것이다. 지난 9월 2일 개막식을 갖고 12월 3일에 폐막한 제주비엔날레 총 다섯 전시 공간 중 하나인 알뜨르 비행장 전시장은 ‘알뜨르 문화예술공간’이라 불리며 폐막 이후에도 작품을 전시할 수 있도록 공군 측이 3년간 사용을 할 수 있도록 허가를 해주었다고 한다. 알뜨르 문화예술공간이 다크투어리즘의 성지가 되길 기원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걸어왔다. 걸어오는 동안 바다너머로 보이는 산방산의 풍경만으로도 힐링이 되지만 초입 안내센터에 설치되어 있는 작품만을 보고 제주 4·3사태의 아픔을 고스란히 받는다. 총 13명의 아티스트들이 참여해 14개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알뜨르비행장을 제주비엔날레 전시장의 제 3코스로 만든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일제강점기, 평화로웠던 경작지에 일본군이 모슬포 주민을 강제동원해 조성한 알뜨르비행장은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군사 전초기지로 활용되었다. 그 옆 섯알오름에는 우리민족끼리의 아픔의 역사를 그대로 안고 있는 민간인 학살 희생자 넋을 기리는 유적지가 있다. 예술가들은 군기지의 흔적인 격납고와 벙커가 남아 있는 아픔의 땅에 역사와 장소에 대한 성찰을 담은 작품들을 전시한 것이다. 다시 본래 모습으로 돌아와 당시 격납고는 그대로 남아있지만 경작지에서 주민들이 다시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생활자체가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는 작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메시지를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게 아닐까? 사실 알뜨르비행장의 전시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지난 2010년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이번에도 참여하고 있는 박경훈작가의 개인전 '알뜨르에서 아시아를 보다'가 열렸었다고 한다. 그 당시 제작된 박경훈·강문석 작가의 공동작품 '알뜨르의 제로센'이 격납고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 (제로센- 영어 표기인 제로(zero)와 센토키(전투기의 일본어 발음)의 첫 글자를 합친 것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자살공격(가미카제 · 神風)에 이용된 전투기로 유명하다) 그 앞에 모래자루를 활용한 옥정호의 '무지개 진지'가 설치되긴 했지만 일제 전투기를 철로 재현한 그 당시 작품의 재현이다. 강문석 작가는 날개 부러진 제로센 전투기를 형상화한 '기억'을 또다른 격납고에 설치해 놓았다. 알뜨르 문화예술공간 초입 안내센터 앞에는 격납고 전시장에 앞서 거대한 작품들이 압도하며 관람객을 맞는다. 구본주작가의 ‘갑오농민전쟁2’(1994, 브론즈)와 최평곤작가의 ‘파랑새’(2017, 대나무, 철) 그리고 김해곤작가의 ‘한 알’(2017, 대나무, 천, 비계 구조물) 등은 차음부터 관람객을 압도한다. 37세로 요절한 조각가 구본주는 형상미술과 리얼리즘을 근간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계급성을 작업의 주요 모티프로 삼았다. 노동자, 농민, 그리고 도시의 샐러리맨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내며 현실 비판적 시각을 제시한 작가의 ‘갑오농민전쟁2’는 저항과 혁명의 에너지를 인체 조형의 솟구치는 힘으로 표현했다. 최평곤작가는 동학 농민군들이 사용했던 죽창에서 영감을 얻은 대나무를 씨줄 날줄로 엮어 '파랑새'를 설치했다. 9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크기이지만 긴 원통형으로 겸손한 자세를 취하고 공간을 위협하지 않는다. ‘파랑새’는 알뜨르비행장의 풍경, 바람과 조우하며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김해곤, ‘한 알’(2017, 대나무, 천, 비계 구조물 ● 사진출처:제주 비엔날레) 1990년대 후반이래 깃발과 천을 활용한 환경미술 작업을 이어오고 있는 김해곤은 알뜨르비행장에 ‘한 알’을 심는다. 바람에 흔들리는 황금색 천으로 이뤄진 대형 구 작품은 밀 한 알의 탄생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알뜨르비행장이 지니고 있는 전쟁의 역사가 치유되고 이 곳에 새로운 한 알의 생명이 잉태되어 평화의 시작을 알린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임경섭, ‘두린아이’(2017, 혼합재료, 가변크기) 임경섭작가의 '두린아이'는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다. 전망경을 통해 보게 되는 이미지는 섯알오름의 일출과 일몰 풍경에 과거 민간인 학살 희생자들의 유골 사진을 결합했다. 딥러닝 기술을 이용, 인공지능(AI)에서 생길 수 있는 오류를 제어하지 않고 오히려 확대시켜 얻어지는 이미지를 예술표현의 도구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한 '딥드림' 프로그램을 사용했다. 딥러닝의 핵심인 '인간이 축적해온 데이터를 습득해 스스로 학습하고 성장한다'는 개념과 달리 오류 를 축적하는 것이다. ‘두린아이’라는 AI의 시선은 인류의 과오를 되새기게 한다. 최고팀, ‘숭고한 눈물’(2017, 삽, 시멘트, 우레탄 페인트, 가변크기) '숭고한 눈물' 이 작품도 공감이 갔다. 최고팀은 최창훈, 고윤식 작가로 이루어진 팀이다. 이 팀은 알뜨르비행장에서 이뤄진 강제노역의 아픔을 담아 이 작품을 설치한다.노동의 상징인 삽과 시멘트로 제작한 작품으로 삽머리 모양이 눈물 모양과 유사한 점에 착안, 그 형상으로 노역의 슬픔을 상징했다. 시멘트는 노동현장의 폐쇄성과 암울한 느낌을 표현한다. 전종철, ‘경계선 사이에서’(2017, 혼합재료, 가변크기) 전종철작가의 '경계선 사이에서'는 제주의 환경적, 역사적 흔적을 기본 컨셉으로 바람을 거슬러 머무는 것이 아닌 바람이 지나가는 철망 구조물을 씨줄과 날줄로 엮었다. 이는 억겁의 인간 세상사의 경계선을 획정하는 관계항의 알고리즘적인 이미지를 근거로 한 사유의 과정을 의미한다. 격납고 입구 철망에 걸려있는 돌 조각들은 바람, 시간, 흔적들에 의해 걸러지고 남은 역사 속의 편린을 상징한다. 격납고 실내에는 아름다운 꽃 밭을 조성해 기존 구조물의 척박함과 대비되는 삶과 생명력을 보여준다. 격납고 내부 바닥부터 철망 너머의 세상까지 자갈을 깔아 꿈과 희망을 품고 비상하는 활주로 이미지를 연출했다. 활주로 끝에는 폭격기 대신 푸른 색 의자를 설치해, 관객이 편히 앉아 철망 경계선 너머의 아름다운 세상 풍경과 격납고 잔재를 동시에 보게 한다. IVAAIU, 자유 큐브, 2017, 나무 구조물, 가변크기 VAAIU작가는 이번에 두 개의 큐브작품. '자유큐브'를 전시했는데 그 중 하나이다. 직접 올라 알뜨르비행장 전체를 조망할 수 있어 느낌이 남다르다. 건축과 도시공학, 사운드, 인터렉션을 기반으로 21세기 새로운 건축적 원형을 시도한다. 알뜨르비행장의 격납고는 당시의 자유를 억압했다. 노출을 막기 위해 언덕 형태로 구축이 되었고 내부 공간은 지면 안으로 최대한 삽입되어 돌출을 최소화했다. 스스로의 정보를 감추는 형태의 구조를 취한 것이다. ‘자유 큐브’는 이러한 억압적 상징물의 반대 형태인 자유의 모뉴먼트 기능을 한다. 격납고의 존재 자체를 외부로 끌고 나올 수 있도록 상승적 축을 적용했고 여러가지 레벨로 배치된 큐브들은 사람들에게 관측, 휴식, 토론 등의 자유로운 액티비티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진다. 아래아 ‘•’ 전쟁의 역사 알뜨리의 아픔과 주검을 상징하는 제주 돌의 형상 작품이다. 하석홍작가는 십수년간 연구와 창작 가운데 태어난 실제돌이 아닌 돌을 통해 제주역사의 아픔 속에서 피어난 생명력을 돌아보는 작품이다. 작가의 돌은 빛과 바람에 따라, 놓여있는 장소에 따라 색도 모양도 다르다. 문명의 시작이자 미래인 돌에 한재준의 씨알인 ‘하늘꼴 아래아(·)’와 ‘천지인 히읗(ㅎ)’을 형상화했다. 두 작가는 만물창조의 소리 아래아에 담긴 가치를 살려 진정한 평화의 시대를 맞이하고자 한다. 알뜨르전시장 바로 옆 나무데크길에는 섯알오름이 있다.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에 있는 높이 40m, 둘레 704m의 작은 오름으로 송악산 응회환 외륜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 세 개의 알오름 중 하나로 셋알오름의 서편에 있다고 하여 서+알오름이라 부른 것이 사이시옷 현상을 거치면서 섯알오름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제주 4.3 사건의 비극이 진정된 국면으로 접어들 무렵인 1950년 6월 25일당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내무부 치안국에서 일제강점기 당시 우리 민족을 압살하던 예비검속법을 악용해 모슬포경찰서 관내에서 344명을 예비검속, 관리해오다 주민 210명을 법적인 절차도 거치지 않고 집단 학살해 암매장한 비극의 현장이다. 희생자 유족 가운데 한림지역 유족들은 세월이 흘러 1956년 3월 총살현장에서 비밀리에 시신을 수습했다고 한다. 61구의 시신이 정확하게 누구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현재 한림읍 금악리 속칭 만벵디 공동묘지에 안장돼 있다. 백조일손지묘에도 억울한 양민학살의 원혼들이 모셔져 있다.(百祖一孫之墓 - 백 할아버지 한 자손, 누군지 알 수 없는 섯알오름 학살과정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무덤) 백조일손지묘에 억울한 양민학살의 원혼들이 모셔져 있다. 섯알오름을 지나면 정면에 송악산이 압도적 장면으로 관람객을 맞이한다. 너무 유명한 장소이니 생략을 하고 허기진 배를 채우려 사전에 입수한 정보로 먹거리장터인 ‘요망진식당’을 찾아 나선다. 미리 알지 못하면 그냥 지나칠 조금은 쌩뚱맞은 밭 중간에 덜렁있다. 한번쯤 들려 맛보면 좋을 식당이다. 제주에서 '요망지다'고 하면 '똑 소리 난다'는 뜻이다. 똑똑하고 야무지고 딱 부러진 식당이라는 의미로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친절한 주인부부 내외가 손님을 맞는데 제주 명물인 돔베고기와 생선 그리고 몇 가지 밑반찬을 먹음직스럽게 준다. 가격은 제주의 음식 기본값인 7,000원이다.(평일에는 제주사람들이 기름기가 많아 싫어한다는 옥돔대신에 고등어를 주고 주말에만 관광객용으로 옥돔을 준다) 제주 올레 10코스에 위치한 알뜨르비행장 전시장은 삼년간 유지를 한다고 하니 길만 걷는 올레꾼들처럼 그냥 지나치지 말고 비행장 격납고를 찾아(벌판 경작지를 살펴보면 격납고를 쉽게 볼 수 있다. 그 안에 작품들이 설치되어 있고 설명이 쓰여 있다) 꼭 둘러보길 권한다.
설악산 만경대(萬景臺)? 망경대(望景臺)?
설악산 만경대(萬景臺)? 망경대(望景臺)?
설악산에만 만경대가 세 곳이나 있다. 첫째는 속초시의 외설악지구에 있는 만경대로 천불동계곡과 공룡능선 등을 조망 할 수 있고, 둘째는 인제군 내설악지구에의 오세암 바로 앞 용아장성과 공룡능선, 나한봉 등을 조망 할 수 있는 만경대, 마지막 셋째는 46년만에 개방된 남설악의 흘림골과 주전골 사이의 만물상을 조망 할 수 있는 만경대 등이다. 망경대는 절벽 정상에는 옛날 주전골의 가짜 돈을 만들던 곳을 감시하던 초소인 망대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망경대라고 불렀다고 한다. 한편 만경대라는 이름은 서울 북한산과 경기 포천 운악산, 전주 남고산성 등에도 있다. 설악산국립공원 측에 따르면 지난 2001년 공원 계획을 세우면서 썼던 망경대라는 이름을 고수하려고 했지만 양양문화원이 이의를 제기했다. 지난 1976년 양양문화원이 발간한 향토지, 1968년과 1990년 양양군이 발간한 향토지와 양주지, 2010년 양양군지 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양양군지에 모두 만경대라는 명칭이 나오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려 시대 학자 이곡(1298~1351)의 동유기 가정집(東遊記 稼亭集)과 조선 시대 학자 김창흡(1653~1722)의 설악일기(雪嶽日記)에도 만경대하고 표기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설악산국립공원사무소는 만경대가 정식 탐방로로 개설되면서 임시 개설 당시 '망경대'로 표기한 안내판 등을 모두 '만경대'로 바꾸었다.
인천 문학산 삼호현(三呼峴), ‘사모지 고개’
인천 문학산 삼호현(三呼峴), ‘사모지 고개’
인천의 진산인 문학산을 걷다 보면 서쪽 거의 끝 부분에 위치한 연경산(일명 노적봉)이 이어지는 곳에 삼호현(三呼峴) 또는 ‘사모지 고개’ ‘사모재 고개’ 등으로 불리는 나지막한 고개가 있다. 옛날 사람들이 인천 읍내에서 문학산 기슭을 넘어 지금의 송도 방면 바다로 갈 때 이용하던 고개인데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보면 문학동에서 청학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다. 이미 백제시대부터 뱃길로 중국을 오가던 사신들이 지금의 송도 능허대(凌虛臺) 주변 한나루[大津]에서 배를 타기 위해 넘어 다니던 고개가 바로 삼호현이라 하며 그 이름도 이 같은 사연에서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중국을 오가던 사신들은 수도(首都)를 떠난 뒤 지금 남동구 만수동의 ‘별리현(別離峴)’을 거쳐, 다시 삼호현을 넘고 한나루에 도착했다. 이때 그들을 배웅하려 따라온 가족들은 별리현에서 헤어져야만 했는데 삼호현에 오른 사신들이 여전히 별리현에 서있는 가족들을 보며 ‘이름을 세 번[三] 불렀다[呼]’거나 ‘잘 다녀오겠다고 세 번을 말했다’ 해서 이 이름이 붙었다는 전설이다. 여기서 삼(三)이란 꼭 그 숫자가 아니라 ‘삼 동서가 모이면 황소도 잡는다’는 속담에서 보듯 여럿 또는 여러 번을 뜻하는 말이다. 사모지 또는 사모재 고개에 대해서는 사신들이 헤어진 가족을 사모해서 붙은 이름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이보다는 ‘삼호’의 발음이 바뀌어 ‘사모’가 되고, 여기에 ‘지’나 ‘재’가 덧붙은 형태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이때 ‘(삼호)지’는 물론 ‘재’의 발음이 바뀐 것이다. (출처: 인천광역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