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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주] 주생활:  한국 옛 사람들의 사찰건축
[의/식/주] 주생활: 한국 옛 사람들의 사찰건축
경상북도 영풍군 부석면 북지리 봉황산 부석사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인 문무왕 16년(676) 2월 의상대사(義湘大師)에 의해 창건되어 우리나라 화엄종의 근본 도량(道場)으로 자리를 지켜왔다. 부석사의 창건에는 대룡(大龍)과 부석(浮石)으로 모습을 바꾸면서까지 의상대사의 구도심(求道心)을 지켰던 선묘(善妙)아가씨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있어 더욱 숭고한 종교정신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무량수전 뒤에 있는 부석과 이 절이 개수(改修)될 때 무량수전 밑에서 발견되었다는 거대한 석룡(石龍)에 의해 더욱 진하게 와 닿는다. 부석사에는 국보 18호인 무량수전을 비롯하여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17), 조사당(국보 19), 소조 여래좌상(국보 45), 조사당 벽화(국보 46) 등과 같은 많은 문화재가 있다. 국보 제67호,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지리산.화엄사는 지리산의 절경을 배경으로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화엄종의 중심사찰로 창건 이래 수 많은 고승들을 배출하였다. 창건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설이 있었으나 화엄경사경(華嚴經寫經)이 발견되어 황룡사의 승려 연기(煙氣 또는 緣起)가 신라 경덕왕 때 세웠음이 밝혀졌다. 화엄사의 각황전은 조선 중기의 목조건물로 정면 7칸, 측면 5칸이며, 중층의 팔작지붕 다포집으로 웅장한 규모이다. 내부에는 3여래불상과 4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다포의 복잡한 공포(貢包)가 중층의 팔작지붕 처마 밑에 꽉 차 있어서 매우 화려한 느낌을 준다. 지붕은 2층이나 내부는 하나로 통해 있다. 건물의 중앙에는 기다란 불단이 설치되어 있고 그 밑에는 석각(石刻) 화엄석경(華嚴石經)이 있어서 웅장한 건물의 규모와 함께 각황전의 이름을 높이고 있다. 경상남도 양산군 하북면 지산리 영축산.보물 제144호, 남북 15.8, 동서 10.1m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15년(646)에 신라에 불경과 불상이 구비되지 못함을 안타까와하던 자장(慈藏)의 감명깊은 자기헌신에 의해 세워진 사찰로 삼보사찰 중의 하나이다. 이 절에는 불상이 없는데, 이는 불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절의 가람배치는 이 금강계단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그 앞에는 불사리에 참배할 수 있도록 대웅전이 있다. 대웅전은 신라 때 지어진 후 여러차례의 중건을 거쳐 현재의 건물은 조선 인조 19년(1641)에 중건한 것이다. 따라서 신라 때의 건물양식은 알 수 없으나 신라시대의 연화문 축대와 계석(階石) 문양이 남아 있다. 통도사의 대웅전은 특이하게도 지붕이 T자로 북쪽만 제외하고 합각(合閣, 용마루)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지붕만 T자이고 법당의 평면은 방형이며, 뒷벽은 금강계단에 예불하기 위하여 벽으로 막지 않고 문을 달고 불상 대신 거대하고 화려한 불단(佛壇)을 놓았다. 또한 천정은 국화와 모란이 조각된 꽃천정으로 화려하면서도 아기자기하여 법당의 운치를 높여준다. 국보 제15호, 경상북도 안동군 서후면 태장리 천등산. 봉정사는 682년 의상(義湘)이 세운 사찰로 종이로 봉(鳳)을 만들어 날렸는데 이 봉이 내려 앉은 자리에 세웠다거나 또는 화엄기도를 드리기 위해 이 산에 오른 의상을 청마(靑馬)가 안내하여 이곳에 앉았기 때문에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이 절의 극락전은 부석사의 무량수전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알려져 있는 고려 중.후기의 목조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4칸의 주심포계 맞배지붕 건물이다. 건물 정면 중앙에 출입문이 있고 양 옆에 광창(光窓)이 있으며 다른 3면은 모두 벽으로 막았다. 건물의 내부구조는 통일신라시대 이후 고려까지 이어진 고식(古式)으로 여겨져 부석사 무량수전보다 양식적으로 선행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상량문(上樑文)에 1363년 건물의 지붕을 수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음으로도 증명되었다. 전남 승주군 송광면호남의 명산 중의 하나인 조계산(曹溪山, 또는 송광산(松廣山)이라고도 함)에 위치하고 있는 송광사는 삼보사찰(三寶寺刹) 중의 하나로 승보사찰이라고도 불리우는 유서 깊은 절이다. 주변에는 이름 그대로 소나무 숲이 깊게 이어지고 수많은 계곡과 하천, 병풍처럼 둘러선 봉우리들이 있어서 명찰(名刹)과 더불어 명승지로 각광받고 있다. 신라말엽 혜린선사(慧璘禪師)에 의해 창건되었을 당시에는 승려 30-40명 정도의 소규모 사찰이었으나,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의 정혜사(定慧社)가 이곳에 옮겨와 정착한 이후 고려시대를 지나면서는 15명의 국사(國師)를 배출하는 등 대찰(大刹)로 발전하였다.송광사에는 하사당(下舍堂, 보물 263호)이라는 특수한 구조의 건물이 있는데 이는 선객(禪客)들이 거처하던 건물로 일종의 승방이다. 이 건물의 특징은 부엌의 기능을 고려하여 천정을 연등천정으로 하였는데 이는 용마루를 뚫어 환기구멍을 설치한 것으로 이러한 설비는 송광사 주변의 살림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외에도 목조삼존불감(木造三尊佛龕, 국보 42), 『고종제서(高宗制書)』(국보 43)의 국보와 약사전(藥師殿, 보물 302), 영산전(靈山殿, 보물 303)외의 수많은 보물이 있어서 명실공히 대찰로서 명성을 높이고 있다.
[의/식/주] 식생활:  한국 옛 사람들의 먹거리_ 뗙과 한과
[의/식/주] 식생활: 한국 옛 사람들의 먹거리_ 뗙과 한과
수저는 숟가락과 젓가락을 통칭하는 말로 일찍부터 우리나라는 이 수저를 이용해 왔다. 주,부식이 명확한 우리나라 음식에서는 숟가락으로는 밥을, 젓가락으로는 반찬을 취한다. 뿐만 아니라 숟가락을 많이 이용하기 때문에 우리의 식문화에는 국물이 많은 음식, 즉 죽과 탕류, 찌개류의 다양한 발달을 가져왔다.국토의 절반 이상이 산악지대이면서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는 작은 영토임에도 불구하고 산과 평야, 강과 바다를 골고루 갖추고 있어 다양한 식품이 산출되었다. 농업국가로 일찌기 벼농사가 발달해 쌀을 주식으로 하였으며 산야에 자생하는 각종 야채를 비롯하여 육류, 어류 등 풍부한 산물로 특히 음식의 조리법과 김치, 젓갈 등 저장법이 다양하고 정교하게 발달해 왔다. 또한 한국 음식의 특징은 음식의 간을 맞추거나 조미에 필요한 간장, 된장, 고추장 외에도 마늘, 생강, 파, 고추 가루 등 갖은 양념을 적절히 이용하여 새롭고 독특한 맛을 내었다는 것이다. 상차림은 밥과 국을 기본으로 김치며 찌개며 나물이며 여러 가지 반찬이 한 상에 모두 차려지는데 반찬의 가짓수에 따라 3첩 반상에서 12첩 반상까지 실로 다양하다. 곡물을 주 재료로 하여 만드는 떡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음식의 하나이다. 일찌기 우리 민족이 개발한 이 떡은 역사가 길고 보편성과 토착성이 깊은 전통음식의 하나이다. 삼국시대에도 명절이면 떡을 만들어 먹었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떡은 한국인의 통과의례나 명절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음식으로 이미 상고시대에서 부터 명절음식으로 제사음식으로 널리 쓰였다. 떡의 종류 또한 다양하여 메떡, 찰떡, 수수떡, 등 떡가루의 종류에 따라 다르고 쑥떡, 무떡, 느티떡 등 들어가는 재료와 떡고물에 따라 수도 없이 다양하다. 떡의 가장 기본형은 시루에 찌는 증병(烝餠)이며, 백설기, 팥시루떡 등 재료와 조리방법에 따라서도 그 가짓 수가 많다. 쫄깃쫄깃하고 말랑말랑한 맛이 일품인 인절미는 특히 겉에 뭍혀내는 팥이나 콩으로 만든 고물에 따라 맛의 차이가 있다. 혼례 등 잔치날에 빠지지 않는 이 인절미는 찹쌀을 불려서 시루나 찜통에 찐 다음 이를 꺼내어 곧바로 절구에 오래 친 후, 적당한 크기로 썰어 콩고물이나 흰 팥고물을 묻히는 간단한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떡을 칠 때에 살짝 데친 쑥을 넣어 만든 쑥인절미도 별미다. 절편은 쌀가루를 익혀 만든 흰떡을 쳐서 잘라낸 떡이라는 뜻이다. 납작하게 반죽된 떡 위에 각양각색의 문양이 새겨진 떡살로 찍어내어 아름다운 모양을 만든다. 뿐만 아니라절편에 여러가지 색으로 물을 들여 각색의 예쁜 떡을 만드는데 인절미와 마찬가지로 쑥을 넣은 쑥절편도 독특한 맛이 난다. 절편은 혼인 때 주로 많이 쓰이며 절편을 둥굴게 하여 그 위에 꽃처럼 여러 색을 놓아 찍어 아름답게 장식하기도 한다. 색색의 시각적인 아름다움이 한층 맛을 돋구는 경단은 쌀가루를 뜨거운 물에 익반죽하여 모양을 만든 다음 끓는 물에 삶아내어 여기에 콩고물이나 검정깨, 개피와 같은 각각의 다른 색깔을 내는 고물을 묻힌다. 달콤한 맛을 내는 경단은 고물의 재료에 따라 그 맛도 다양하다. 한국 고유의 과자인 한과는 곡물 가루에 꿀, 엿, 참기름, 설탕 등을 넣고 반죽하여 꽃모양 등 여러가지 모양의 판에 박아낸 후 기름에 지지거나 조려서 만든다. 떡과 마찬가지로 제례, 혼례, 연회 등의 필수 음식인 한과류는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며, 특히 유밀과와 다식은 의례음식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유밀과의 대표적인 것은 약과이며, 밀가루에 참기름, 꿀, 술을 넣어 반죽하여 기름에 튀긴 다음 다시 꿀에 담근다. 다식은 곡식가루 등을 꿀로 반죽하여 덩어리가 지도록 치댄 다음 아름다운 문양의 다식판에 박아낸 것으로 깨다식, 콩다식, 송화다식 등 여러 종류가 있다. 한과류는 크게 유과, 유밀과, 다식, 전과, 엿강정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의/식/주] 직물/염색:  한국 옛 사람들의 옷 만들기
[의/식/주] 직물/염색: 한국 옛 사람들의 옷 만들기
길쌈은 복식생활의 기본이 되는 것으로 우리나라 여성들의 대표적인 일거리 중 하나였으며 이미 상고 시대 부터 길쌈 풍속이 전해올 정도로 그 역사 또한 오래다. 조선시대에는 삼베, 모시, 무명, 명주 등의 길쌈이 전국적으로 성행해 복식문화의 꽃을 피웠으며 이에 따라 조선조에는 길쌈에 대한 풍속이 많이 남아있다. 특히 조선시대 때 삼베길쌈은 질적인 면에 상당한 발전을 보였으며 지방에 따라 북포, 강포, 안동포, 돌실나이 등 다양하게 발달했다. 모시길쌈은 순백색으로 가장 섬세하고 정교하게 짜는 한산모시가 유명하며 모시는 삼베나 무명과 마찬가지로 길쌈은 대개 재배와 수확, 씨앗기, 고치말기, 실잣기, 무명짜기 등의 순으로 이루어진다. 양반가나 계급 사회에서 주로 입혀지던 명주는 삼한시대 부터 길쌈의 기록이 나타나며 그 과정은 누에치기, 실뽑기, 실내리기, 명주짜기 등으로 이어진다. 요즘에도 국가가 지정한 무형문화재에 의해 그 길쌈의 풍속이 전수되고 있으며 사진은 고인이 된 옛 인간문화재 할머니가 안동포를 짜고 있는 모습이다. 유달리 백색을 선호한 민족이면서도 한복에 적용된 색상을 보면 그 다양하기가 이를 데 없다. 우리 복식의 아름다움은 먼저 오행에 기초한 전통색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으며, 대비적인 색채 사용으로는 흑백의 조화와 더불어 보색을 많이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염직은 삼국시대 부터 이미 상당한 수준의 발달을 보이고 있으며 계급이 엄격했던 조선시대에 오면 양반계층을 대상으로 염색이 발전되고 있다. 물들이는 횟수에 따라 연한색 부터 짙은 색 까지 다양한 색상을 내는 청색의 쪽물을 비롯하여, 홍색에는 소목, 분홍색은 홍화, 황색은 치자 등 주로 식물염료를 사용한다. 식물에는 뿌리, 나무껍질, 꽃, 열매 등 특정 부위에 색소를 함유하고 있어 그 부분을 채취하여 직물의 재료나 매염제, 염색 방법에 따라 다양한 색상을 내는데 홍화는 꽃으로, 치자는 열매로 물들인다. 바느질은 옛 여인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덕목의 하나로 길쌈과 더불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바느질 한 땀에도 여인들의 정성과 사랑과 염원이 깃들어 있었고 바느질에 소용되는 용구 또한 정성스럽고 귀중하게 간직해 왔다. 아름다운 색색의 종이를 발라 만든 바느질 상자 안에는 보통 실, 자, 가위 등 재봉용구를 비롯하여 실패, 바늘집, 바늘꽂이, 골무 등이 가지런하게 챙겨져 있다. 특히 바느질 도구에 딸리는 골무나 바늘집 같은 작은 용구 하나에도 정성을 다해 수를 놓은 여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가운데 원형의 바늘집을 중심으로 여기에 다양한 모양을 연결한 이 바늘꽂이는 옛 여인들의 재치와 미의식을 엿볼 수 있는 좋은 보기가 된다. 옷을 만들고 남은 명주들을 모아 두었다가 하트모양 등 여러개의 귀엽고 앙증스러운 형태들을 만들어 꼼꼼히 수를 놓은 이 바늘꽂이는 조형적인 면에서도 뛰어난 아름다움을 지닌다.
[의/식/주] 여성복식: 한국 옛 여인들의 옷 차림
[의/식/주] 여성복식: 한국 옛 여인들의 옷 차림
저고리 소매 배래선의 완만한 흐름과 하얀 동정의 정결성, 섶 코의 곡선, 옷고름의 선 등 한국적인 이미지를 강하게 전해주는 이 한복이야말로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와 긍지를 반영해온 독창적인 양식의 하나이다.예부터 지금까지 우리나라 옷의 기본형은 여자는 치마와 저고리, 남자는 바지와 저고리이다. 이 기본형의 한복은 최근 우리의 노년층에서 즐겨 입는 일상복으로서 여기에 덧붙여 속옷으로는 속저고리, 속치마, 고쟁이와 함께 버선을 든다. 한복을 용도별로 보면 평상시에 입는 일상복, 혼례 등 통과의례시 예를 갖추기 위해 입는 의례복, 또는 특수한 목적을 위해 제작된 특수복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 외에 남성의 웃옷으로서 곧은 깃을 단 도포가 있다. 신분과 지위 표시가 명확한 관복인 경우는 둥근 깃을 단 웃옷에 빛깔과 장식으로 구분했다. 조선시대는 삼국 시대 이래의 복식 문화를 꽃피워 왕복, 왕비복, 백관복, 선비복, 서민복, 관혼상제복 등이 제정돼 한복 양식이 한층 높은 수준으로 완성되었다.옷감으로는 삼베나 무명과 같은 식물성 섬유를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했으나 귀한 옷감으로 명주나 비단도 썼다. 또한 소박하고 검소한 우리 민족은 흰옷을 즐겨 입어 백의민족이라고도 불리워 왔다. 저고리의 구성은 몸체를 이루고 있는 몸판, 깃, 여밈 부분의 섶, 팔 부분의 소매통 등으로 대별된다. 이 중에서 가장 변화의 폭이 심한 곳은 저고리 길이와 도련, 소매의 형태를 들 수 있다.섶은 저고리의 좌우에 각각 달리는데 기능적으로 양쪽의 앞을 여미는 여분이 되며, 미적으로도 변화의 선으로 형태미를 부여할 수 있다. 깃은 앞몸판에서 뒷몸판까지 연결되어 목둘레를 장식하며 한국 복식의 형태를 인식할 수 있는 특징 중이 하나이다. 옷고름은 기능적으로 의복을 정돈하는 목적으로 사용하였으나 후대에 갈수록 저고리의 길이는 짧아지고 옷고름은 점차 길어지면서 장식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동정은 의복의 관리면에서 세탁하기에 편리한 방법으로 이용된 기능적인 역할을 하는 부위로 저고리의 단정함을 결정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치마는 저고리의 아래에 입는 여성의 하의로 형태는 치마의 몸체와 허리띠, 끈으로 간단하게 구성돼 있다.치마의 폭은 평면의 천을 이용하여 그대로 쓰지만 상부에 주름을 잘게 잡아 허리띠의 속으로 집어넣는다. 입을 때는 앞에서 둘러 입고 뒤에서 한 쪽으로 여며지게 하여 끈으로 묶으며 치마의 폭은 그대로 풍성하게 둥근 분위기를 나타낸다. 특히 치마의 형태는 잘게 잡혀진 주름이 아래로 수직적인 분위기를 주며 허리띠의 색을 흰 것으로 하여 치마색을 돋보이게 한다.치마는 폭이 넓어 우리나라의 온돌생활에 적합한 기능성이 있는 반면 뒷중심 여밈이 열리게 돼 있어 할동하기에 편리할 뿐만 아니라 미적으로도 기품있고 우아한 멋을 더해준다. 고구려 시대 남녀 공용으로 겉에 입던 여자의 바지는 신라시대 이후로 오면서 속옷으로 변천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앞뒤트임형, 무족의형, 남자 바지형으로 분화하였다. 또한 바지와 치마의 중간형인 시군, 말군이 입혔으며, 임진왜란 이후로 바지는 여러 형의 속곳으로 분화하여 속속곳, 단속곳, 너른바지 등으로 남게 되었다. 일본인들이 입고 있는 하까마는 한복 중에서 여자 속옷인 앞뒤트임의 단속곳이 겉옷 바지로 입혀지는 예이다. 특히 남자의 바지형이 고정적인 데 비해 여자의 속바지는 몇개를 겹쳐입는 중복성 때문에 기능을 고려한 점이 있으며 이는 용변의 편리를 위하여 밑을 완전히 트거나 바지통을 크게 하여 발을 뺄 수 있도록 한 점이다.속곳은 치마의 풍성함을 살리기 위하여 미적인 측면에서 이용되기도 했으며 치마의 벌어진 사이로 속옷이 보여지는 점을 고려하여 무릎 아래 부분만을 곱게 누비거나 윗쪽은 무명으로 아래쪽은 명주로 하여 보이는 곳에 신경을 쓰기도 하였다. 서민층 여인들의 방한모로 사용된 처네는 같은 모양으로 크게 만들어 아기를 업는데 사용하기도 했다.통영의 침선장 이정련씨가 재현한 이 누비로 만든 처네는 안쪽은 진홍색을, 바깥쪽은 더러움이 안타는 검은천으로 하여 가운데 솜을 두고 꼼꼼히 누볐다. 처네 바깥의 검은 천 위에는 벽사의 뜻이 있는 박쥐와 부귀를 나타내는 모란꽃을 다홍, 분홍, 초록, 노랑 등으로 화사하게 수놓았으며 두 겹으로 접히는 처네 깃에는 흰색 동정을 달았다. 특히 아기를 업을 때 뒤에서 잘 보이도록 후수를 달았는데 후수에는 다홍의 비단 위에 십장생 등 길한 문양들을 수놓고 가장자리에 오색으로 술을 달아 아름다움을 더했다. 삼회장 저고리는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변화한 독특한 저고리의 모습이다. 조선 중, 후기에 오면서 저고리의 형태에도 변화를 보여 저고리의 길이가 짧아지기 시작했으며 섶, 끝동, 동정도 좁아져 전체적으로 작아진 느낌이다.황색 비단 저고리에 자주색 비단으로 곁막이, 끝동, 깃, 고름을 배색한 이 삼회장 저고리는 조선시대 양반댁 규수들이 착용했던 전용물로서 삼회장 저고리와 함께 다홍색으로 염색한 치마의 강렬한 색대비가 아름다운 이 황의홍상은 결혼을 앞 둔 처녀들의 정장으로 단정하게 치장을 할 때 입었다. (한국자수박물관 소장)
24절기란 무엇인가?
24절기란 무엇인가?
음력(陰曆, 太陰曆)이란 달의 차고 기울어짐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달력으로 고대부터 중국·바빌로니아·그리이스·유태·인도·이슬람 등에서 사용되었던 방식이다. 한국에서도 음력을 기준으로 거의 모든 생활이 이루어져 왔다. 즉 평년을 12개월로 하고 동지를 기점으로 황도를 24등분해서 계절을 세분하여 각 등분점에 태양이 통과할 때를 절기(節氣) 또는 중기(中氣)라 하여 모두 24절기로 정했다. 농본중심의 사회였던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절기를 기준으로 우주와 자연의 섭리를 읽었고 이것을 변화하는 계절과 생활의 길잡이로 삼았다. 이 곳에서는 오랫동안 우리 생활의 지표가 되어온 한국의 24절기에 관해 소개한다. 24절기의 첫번째 절기인 입춘은 음력 1월의 절기로 양력 2월 3, 4일경이고, 우수는 음력 1월의 중기로 양력 2월 18, 19일경이다. 언 땅이 녹고 땅 속에서 잠자던 벌레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며 물고기가 얼음 밑을 돌아다니고 초목에서 싹이 트는 시기이다. 입춘은 농촌에서 농기구 정비, 농사 정보교환, 보리밟기, 거름주기 등 농사의 준비가 시작되는 기간으로, 보리뿌리의 수나 바람의 강도로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기도 한다. 농촌과 일반 가정에서는 '춘첩(春帖)'이라 하여 '입춘대길(立春大吉)'같이 복을 기원하는 좋은 뜻의 글귀를 기둥, 대문, 천정 등에 써서 붙이기도 한다. 경칩은 음력 2월의 절기로 양력 3월 5, 6일경이고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춘분은 음력 2월의 중기로 양력 3월 21일이다. 이 때는 얼음이 풀리고 날씨가 따뜻해서 만물이 소생하는 봄으로 개구리나 뱀처럼 겨울잠을 자던 짐승들이 깨어나고 온갖 꽃이 피며 제비가 날아오는 시기이다. 농사가 시작되어 두엄주기, 객토넣기, 봄배추, 감자, 옥수수, 푸성귀 등의 씨 뿌리기를 하고 보리밭에 거름주기, 비료주기, 보리밟기 등을 한다. 경칩에 벽을 바르거나 담을 쌓으면 탈이 없다고 하며, 보리싹의 성장으로 농사의 풍·흉을 점치기도 한다. 청명은 음력 3월의 절기로 양력 4월 5, 6일경이고, 곡우는 음력 3월의 중기로 양력 4월 20일경이다. 청명에는 가래질, 논둑다지기, 논갈이, 못자리 만들기 등의 논농사 준비와 보리밭매기, 채소의 파종, 거름주기 등이 이루어진다. 이 때에 장을 담그면 맛이 좋다고 하여 1년 동안 먹을 장을 담그고, 누에를 치며 목화를 심기도 한다. 곡우에는 못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볍씨를 담근다. 이 무렵의 조기는 살은 적지만 연하고 맛있어서 서해와 황해에서는 조기잡이가 한창이다. 입하는 음력 4월의 절기로 양력 5월 5일경이고, 소만은 음력 4월의 중기로 양력 5월 21일경이다. 초여름이 시작되는 입하에는 모내기 준비가 이루어지고, 가을보리 먼저베기 등 밭농사의 김매기로 바쁘다. 소만 무렵에 모판에서 이앙한 모를 모내기하게 된다. 모내기는 품앗이 혹은 품을 사서 하게 되는데, 비가 많이 오면 동네에서 1주일 내에 끝낼 수도 있지만 물이 부족한 논은 한달 후까지 하게 되기도 한다. 모내기는 대개 남쪽보다 북쪽에서 먼저 시작된다. 망종은 5월의 절기로 양력 6월 5, 6일경이고 일년 중 낮의 길이가 가장 긴 하지는 음력 5월의 중기로 양력 6월 21, 22일경이다. 여름이 한창인 이 때 농촌에서는 모내기와 보리타작이 이루어진다. 보리타작이 끝나면 밭에 콩, 팥, 조, 밀, 배추, 무를 선별해서 심고 거름주기, 김매기 등으로 한없이 바쁜 시기이다. 작은 더위라는 뜻의 소서는 음력 6월의 절기로 양력 7월 7일경이고 큰 더위라는 대서는 음력 6월의 중기로 양력 7월 23일경이다. 이 때는 여름이 한창이라 날이 습하고 더우며 때로는 큰비가 내린다. 농가에서는 퇴비 마련, 논두렁깎기, 모내기 끝난 논의 김매기, 콩·팥·조의 김매기를 하게 된다. 수박, 참외, 토마토, 호박, 오이, 감자 등 과일과 채소가 풍부하며 여름을 이기기 위해 보신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 도시와 학교는 휴가철이고 농촌에서도 산과 들을 찾아 잠시 휴식을 취하기도 하는 때이다. 가을에 들어선다는 입추는 음력 7월의 절기로 양력 8월 7, 8일경이고, 처서는 음력 7월의 중기로 양력 8월 22, 23일경이 된다. 서늘한 바람이 불고 이슬이 내리며 쓰르라미가 우는 때로 천지가 쓸쓸해지기 시작하고 벼가 익는다. 입추 무렵에는 무와 배추를 심고, 처서 때에는 벼이삭이 여물기 시작하므로 논에 허수아비를 세워 새쫓기를 하게 된다. 서리가 내린다는 백로는 음력 8월의 절기로 양력 9월 8, 9일경이고, 밤과 낮의 길이가 같은 추분은 음력 8월의 중기로 양력 9월 23, 24일경이다. 이 무렵은 하늘이 높고 푸르며 오곡이 무르익는다. 밤, 대추, 사과, 감 등의 과일과 벼를 수확하고, 추석 명절이 있어 풍요로운 달이다. 논의 나락은 늦어도 백로 안에 피어야 결실이 좋고, 바람이 불면 벼가 여물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추분 무렵에 벼를 수확하고 남부지방에서는 가을 보리를 심는다. 옛날에는 부인들이 삼베나 모시를 음력 8월이 가기 전에 다 짜두었다. 한로는 음력 9월의 절기로 양력 10월 8, 9일경이고, 상강은 음력 9월의 중기로 양력 10월 23, 24일경이다. 이 무렵은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 제비는 따뜻한 강남으로 되돌아 가고 기러기가 날아오며 낙엽이 진다. 한로 무렵에는 콩, 팥, 조, 수수 그리고 벼 수확으로 바쁘다. 상강 무렵엔 서리나 눈이 내리기 전에 배추와 무를 뽑아야 얼지 않는다. 고추따기, 고구마, 깨 수확을 하고 마늘, 가을 보리 심기에도 바쁘다. 국화가 피어나고 단풍이 붉게 물드는 아름다운 계절로 국화술, 국화전, 화채 등 계절음식도 만들어 먹는다. 겨울이 시작된다는 입동은 음력 10월의 절기로 양력 11월 7, 8일경이고 소설은 음력 10월의 중기로 양력 11월 22일경이다. 이 무렵엔 물과 땅이 얼기 시작하고 눈이 내리며 말 그대로 겨울이 시작되는 때이다. 눈이 내리기 전에 밭작물을 뽑고 겨우내 먹을 김장김치를 담그는 등 겨울준비를 한다. 김장 독을 땅 속에 묻어 보관하면 그 맛이 최고지만 요즘은 개량 김치독을 사용하거나 김치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 판매하기도 한다. 김장은 북쪽 지방부터 담그기 시작하여 남쪽으로 내려간다. 큰 눈이 내린다는 대설은 음력 11월의 절기로 양력 12월 8일경이고 일년 중 밤이 가장 긴 동지는 음력 11월의 중기로 양력 12월 22이다. 이 시기에 농촌은 비교적 한가한 시간을 맞게 된다. 옛날 농가에서는 밤에 짚으로 새끼, 가마니 등을 짜고 겨울 땔감을 마련했지만 요즘은 비닐 하우스에서 사계절 채소를 재배하며 제주도에서는 귤, 파인애플 등 열대과일을 재배한다. 또한 방한준비와 함께 씨앗과 곡식 저장, 퇴비, 농기구 정리, 양념류의 씨앗심기 등 다음해 농사의 준비를 한다. 동지에는 잡귀를 쫓는 의미로 붉은 팥죽을 만들어 먹는다. 소한은 음력 12월의 절기로 양력 1월 5일경이고, 24절기 중 마지막 절기인 대한은 음력 12월의 중기로 양력 21일경이다. 한국의 겨울은 보통 3한 4온으로 이 무렵의 날씨가 가장 춥다. 절기의 명칭으로는 대한이 소한보다 더 추울 것 같지만 "대한이 소한 집에 가서 얼어 죽었다.", "소한 추위는 꾸어다가라도 한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한국에서는 소한 때가 더 춥다. 이 시기는 큰 눈이 많이 내려 어느 때보다 아름다운 설경을 이루기도 한다.
숨어있는 제주 하천 캐니언, 효돈천 탐사
숨어있는 제주 하천 캐니언, 효돈천 탐사
미국에 그랜드 캐니언이 있다면 한국에는 속으로 들어가야만 보이는 숨어있는 제주 하천 캐니언, 효돈천이 있다. 제주 서귀포에 한라산 남쪽을 대표하는 하천, 효돈천이 흐른다. 한라산 정상에서부터 내려오는 물줄기로 하효동과 남원 하례리를 거쳐 13km 간 이어지다가 하류의 유명한 관광지 쇠소깍에 이르러 바다로 흘러간다. 이 계곡에는 난대식물과 활엽수림 등이 우거져 다양한 식물자원이 많고 숲과 물이 만나 신비로움을 풍겨 유네스코가 지정한 생물권 보존지역이기도 하다. 효돈천은 제주를 찾는 일반 관광객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사람의 발길이 드문 오지이다. 이 계곡 트래킹을 하려면 먼저 한라산국립공원관리소의 사전 허가를 받아야 한다. 자연생태계와 자연경관 보호 및 탐방객의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출입통제구역을 두고 있는데 이곳도 이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번 하천 탐사는 하류에서 상류로 올라가는 코스로 효돈천 상류에서 시작해 돈내코 원앙폭포까지 약 5Km 구간을 걷는다. 칡오름을 바라보며 걷기 시작한다. 여전히 땀은 비오듯하고... 건천인 계곡 곳곳에 향기로운 주인공 승두목이 아주 많이 피어 있었다. 중대가리꽃이라 부르기도 한다. 꽃피기 전 동글동글 스님 머리를 닮아서 ㅋ ㅋ ㅋ 오... 신비스런 곳들이 군데군데 많은 게 기대를 져버리진 않는군... 볼거리 많으니 좋아... 이번 구간 걷기중 만난 특이했던 마른 폭포 한라산에 비가 많이 내리면 순식간에 계곡물이 불어 이런 장관을 만들었다니... 그저 자연의 힘에 감탄만이 위에서 내려다보니 자갈들과 검은모래가 산처럼 쌓여있다. 급물살이 만든 작품은 언제나 그렇듯 다 다르고 탄성이 절로. 때론 자갈밭을 때론 사막처럼 모래 산을 넘고 또 넘고 커다란 바위틈으로 기어 통과 하기도 했다. 모두가 탄성을 지르던 구간 그러나 직진이 안된다. 도저히 방법이 없어 후퇴. 어느 구간쯤에서 밧줄타고 내려와 배낭을 벗어 던지고 아쉬운 그 구간으로 내려가본다. 와~우 아주아주 깊다. 신비스런 곳이다. 자꾸만 아쉬움에 자릴 뜨지 못하고 다시 한 컷 덥긴 했지만 지난번 구간보단 흐르는 맑은 물이 있어서 좋다. 오를수록 물은 더 차가워졌고 작은 폭포들이 제각각 뽐내며 멋부리고 있었다. 어느 구간부터는 아예 물속으로 걸었다. 오늘의 도착점인 원앙폭포에 도착하니 그동안 사람 구경 못했는데 어마어마한 인파들... 이렇게 아름다운 제주 속 살을 볼 수 있다는 건 큰 행운이다. 제주에 이처럼 때묻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숨은 비경들을 더 아끼고 사랑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일정을 정리한다.
다크 투어리즘, 제주 4•3 치유 공간 알뜨르 문화예술공간
다크 투어리즘, 제주 4•3 치유 공간 알뜨르 문화예술공간
또 제주야? 또 올레길을 걸어? 라는 친구들의 핀잔을 뒤로하고 이미 여러 번을 걸은 올레 10코스(화순항~모슬포항)를 이번엔 역방향으로 걷기로 한다. 과거 모슬포항이 아니다. 새로운 여객터미널을 만들고 운진항이라고 개명하고 익숙한 모슬포항을 대신한다. 오늘의 걷기 목적은 이름도 생소한 다크투어리즘(Dark Tourism, 전쟁·학살 등 비극적 역사의 현장이나 재난과 재해가 일어났던 곳을 돌아보며 교훈을 얻기 위하여 떠나는 여행, 일명 역사교훈여행)의 생생한 현장, 설치 미술작품들을 둘러 보는 것이다. 지난 9월 2일 개막식을 갖고 12월 3일에 폐막한 제주비엔날레 총 다섯 전시 공간 중 하나인 알뜨르 비행장 전시장은 ‘알뜨르 문화예술공간’이라 불리며 폐막 이후에도 작품을 전시할 수 있도록 공군 측이 3년간 사용을 할 수 있도록 허가를 해주었다고 한다. 알뜨르 문화예술공간이 다크투어리즘의 성지가 되길 기원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걸어왔다. 걸어오는 동안 바다너머로 보이는 산방산의 풍경만으로도 힐링이 되지만 초입 안내센터에 설치되어 있는 작품만을 보고 제주 4·3사태의 아픔을 고스란히 받는다. 총 13명의 아티스트들이 참여해 14개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알뜨르비행장을 제주비엔날레 전시장의 제 3코스로 만든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일제강점기, 평화로웠던 경작지에 일본군이 모슬포 주민을 강제동원해 조성한 알뜨르비행장은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군사 전초기지로 활용되었다. 그 옆 섯알오름에는 우리민족끼리의 아픔의 역사를 그대로 안고 있는 민간인 학살 희생자 넋을 기리는 유적지가 있다. 예술가들은 군기지의 흔적인 격납고와 벙커가 남아 있는 아픔의 땅에 역사와 장소에 대한 성찰을 담은 작품들을 전시한 것이다. 다시 본래 모습으로 돌아와 당시 격납고는 그대로 남아있지만 경작지에서 주민들이 다시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생활자체가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는 작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메시지를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게 아닐까? 사실 알뜨르비행장의 전시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지난 2010년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이번에도 참여하고 있는 박경훈작가의 개인전 '알뜨르에서 아시아를 보다'가 열렸었다고 한다. 그 당시 제작된 박경훈·강문석 작가의 공동작품 '알뜨르의 제로센'이 격납고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 (제로센- 영어 표기인 제로(zero)와 센토키(전투기의 일본어 발음)의 첫 글자를 합친 것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자살공격(가미카제 · 神風)에 이용된 전투기로 유명하다) 그 앞에 모래자루를 활용한 옥정호의 '무지개 진지'가 설치되긴 했지만 일제 전투기를 철로 재현한 그 당시 작품의 재현이다. 강문석 작가는 날개 부러진 제로센 전투기를 형상화한 '기억'을 또다른 격납고에 설치해 놓았다. 알뜨르 문화예술공간 초입 안내센터 앞에는 격납고 전시장에 앞서 거대한 작품들이 압도하며 관람객을 맞는다. 구본주작가의 ‘갑오농민전쟁2’(1994, 브론즈)와 최평곤작가의 ‘파랑새’(2017, 대나무, 철) 그리고 김해곤작가의 ‘한 알’(2017, 대나무, 천, 비계 구조물) 등은 차음부터 관람객을 압도한다. 37세로 요절한 조각가 구본주는 형상미술과 리얼리즘을 근간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계급성을 작업의 주요 모티프로 삼았다. 노동자, 농민, 그리고 도시의 샐러리맨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내며 현실 비판적 시각을 제시한 작가의 ‘갑오농민전쟁2’는 저항과 혁명의 에너지를 인체 조형의 솟구치는 힘으로 표현했다. 최평곤작가는 동학 농민군들이 사용했던 죽창에서 영감을 얻은 대나무를 씨줄 날줄로 엮어 '파랑새'를 설치했다. 9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크기이지만 긴 원통형으로 겸손한 자세를 취하고 공간을 위협하지 않는다. ‘파랑새’는 알뜨르비행장의 풍경, 바람과 조우하며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김해곤, ‘한 알’(2017, 대나무, 천, 비계 구조물 ● 사진출처:제주 비엔날레) 1990년대 후반이래 깃발과 천을 활용한 환경미술 작업을 이어오고 있는 김해곤은 알뜨르비행장에 ‘한 알’을 심는다. 바람에 흔들리는 황금색 천으로 이뤄진 대형 구 작품은 밀 한 알의 탄생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알뜨르비행장이 지니고 있는 전쟁의 역사가 치유되고 이 곳에 새로운 한 알의 생명이 잉태되어 평화의 시작을 알린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임경섭, ‘두린아이’(2017, 혼합재료, 가변크기) 임경섭작가의 '두린아이'는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다. 전망경을 통해 보게 되는 이미지는 섯알오름의 일출과 일몰 풍경에 과거 민간인 학살 희생자들의 유골 사진을 결합했다. 딥러닝 기술을 이용, 인공지능(AI)에서 생길 수 있는 오류를 제어하지 않고 오히려 확대시켜 얻어지는 이미지를 예술표현의 도구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한 '딥드림' 프로그램을 사용했다. 딥러닝의 핵심인 '인간이 축적해온 데이터를 습득해 스스로 학습하고 성장한다'는 개념과 달리 오류 를 축적하는 것이다. ‘두린아이’라는 AI의 시선은 인류의 과오를 되새기게 한다. 최고팀, ‘숭고한 눈물’(2017, 삽, 시멘트, 우레탄 페인트, 가변크기) '숭고한 눈물' 이 작품도 공감이 갔다. 최고팀은 최창훈, 고윤식 작가로 이루어진 팀이다. 이 팀은 알뜨르비행장에서 이뤄진 강제노역의 아픔을 담아 이 작품을 설치한다.노동의 상징인 삽과 시멘트로 제작한 작품으로 삽머리 모양이 눈물 모양과 유사한 점에 착안, 그 형상으로 노역의 슬픔을 상징했다. 시멘트는 노동현장의 폐쇄성과 암울한 느낌을 표현한다. 전종철, ‘경계선 사이에서’(2017, 혼합재료, 가변크기) 전종철작가의 '경계선 사이에서'는 제주의 환경적, 역사적 흔적을 기본 컨셉으로 바람을 거슬러 머무는 것이 아닌 바람이 지나가는 철망 구조물을 씨줄과 날줄로 엮었다. 이는 억겁의 인간 세상사의 경계선을 획정하는 관계항의 알고리즘적인 이미지를 근거로 한 사유의 과정을 의미한다. 격납고 입구 철망에 걸려있는 돌 조각들은 바람, 시간, 흔적들에 의해 걸러지고 남은 역사 속의 편린을 상징한다. 격납고 실내에는 아름다운 꽃 밭을 조성해 기존 구조물의 척박함과 대비되는 삶과 생명력을 보여준다. 격납고 내부 바닥부터 철망 너머의 세상까지 자갈을 깔아 꿈과 희망을 품고 비상하는 활주로 이미지를 연출했다. 활주로 끝에는 폭격기 대신 푸른 색 의자를 설치해, 관객이 편히 앉아 철망 경계선 너머의 아름다운 세상 풍경과 격납고 잔재를 동시에 보게 한다. IVAAIU, 자유 큐브, 2017, 나무 구조물, 가변크기 VAAIU작가는 이번에 두 개의 큐브작품. '자유큐브'를 전시했는데 그 중 하나이다. 직접 올라 알뜨르비행장 전체를 조망할 수 있어 느낌이 남다르다. 건축과 도시공학, 사운드, 인터렉션을 기반으로 21세기 새로운 건축적 원형을 시도한다. 알뜨르비행장의 격납고는 당시의 자유를 억압했다. 노출을 막기 위해 언덕 형태로 구축이 되었고 내부 공간은 지면 안으로 최대한 삽입되어 돌출을 최소화했다. 스스로의 정보를 감추는 형태의 구조를 취한 것이다. ‘자유 큐브’는 이러한 억압적 상징물의 반대 형태인 자유의 모뉴먼트 기능을 한다. 격납고의 존재 자체를 외부로 끌고 나올 수 있도록 상승적 축을 적용했고 여러가지 레벨로 배치된 큐브들은 사람들에게 관측, 휴식, 토론 등의 자유로운 액티비티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진다. 아래아 ‘•’ 전쟁의 역사 알뜨리의 아픔과 주검을 상징하는 제주 돌의 형상 작품이다. 하석홍작가는 십수년간 연구와 창작 가운데 태어난 실제돌이 아닌 돌을 통해 제주역사의 아픔 속에서 피어난 생명력을 돌아보는 작품이다. 작가의 돌은 빛과 바람에 따라, 놓여있는 장소에 따라 색도 모양도 다르다. 문명의 시작이자 미래인 돌에 한재준의 씨알인 ‘하늘꼴 아래아(·)’와 ‘천지인 히읗(ㅎ)’을 형상화했다. 두 작가는 만물창조의 소리 아래아에 담긴 가치를 살려 진정한 평화의 시대를 맞이하고자 한다. 알뜨르전시장 바로 옆 나무데크길에는 섯알오름이 있다.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에 있는 높이 40m, 둘레 704m의 작은 오름으로 송악산 응회환 외륜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 세 개의 알오름 중 하나로 셋알오름의 서편에 있다고 하여 서+알오름이라 부른 것이 사이시옷 현상을 거치면서 섯알오름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제주 4.3 사건의 비극이 진정된 국면으로 접어들 무렵인 1950년 6월 25일당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내무부 치안국에서 일제강점기 당시 우리 민족을 압살하던 예비검속법을 악용해 모슬포경찰서 관내에서 344명을 예비검속, 관리해오다 주민 210명을 법적인 절차도 거치지 않고 집단 학살해 암매장한 비극의 현장이다. 희생자 유족 가운데 한림지역 유족들은 세월이 흘러 1956년 3월 총살현장에서 비밀리에 시신을 수습했다고 한다. 61구의 시신이 정확하게 누구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현재 한림읍 금악리 속칭 만벵디 공동묘지에 안장돼 있다. 백조일손지묘에도 억울한 양민학살의 원혼들이 모셔져 있다.(百祖一孫之墓 - 백 할아버지 한 자손, 누군지 알 수 없는 섯알오름 학살과정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무덤) 백조일손지묘에 억울한 양민학살의 원혼들이 모셔져 있다. 섯알오름을 지나면 정면에 송악산이 압도적 장면으로 관람객을 맞이한다. 너무 유명한 장소이니 생략을 하고 허기진 배를 채우려 사전에 입수한 정보로 먹거리장터인 ‘요망진식당’을 찾아 나선다. 미리 알지 못하면 그냥 지나칠 조금은 쌩뚱맞은 밭 중간에 덜렁있다. 한번쯤 들려 맛보면 좋을 식당이다. 제주에서 '요망지다'고 하면 '똑 소리 난다'는 뜻이다. 똑똑하고 야무지고 딱 부러진 식당이라는 의미로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친절한 주인부부 내외가 손님을 맞는데 제주 명물인 돔베고기와 생선 그리고 몇 가지 밑반찬을 먹음직스럽게 준다. 가격은 제주의 음식 기본값인 7,000원이다.(평일에는 제주사람들이 기름기가 많아 싫어한다는 옥돔대신에 고등어를 주고 주말에만 관광객용으로 옥돔을 준다) 제주 올레 10코스에 위치한 알뜨르비행장 전시장은 삼년간 유지를 한다고 하니 길만 걷는 올레꾼들처럼 그냥 지나치지 말고 비행장 격납고를 찾아(벌판 경작지를 살펴보면 격납고를 쉽게 볼 수 있다. 그 안에 작품들이 설치되어 있고 설명이 쓰여 있다) 꼭 둘러보길 권한다.
3과 한국인
3과 한국인
3은 한국인들이 특별한 애착을 가진 숫자이다. 우리 민속신앙의 하나로 하늘과 땅의 매개자로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빌어주는 이 솟대 위에서도 세 마리의 오리가 앉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천, 지, 인의 삼재(三才)를 기본으로 음양의 조화가 비로소 완벽하게 이루어진 이 숫자는 오랜 옛날부터 길수(吉數), 또는 신성수(神聖數)라 하여 우리 민족의 생활과 철학에 깊숙히 배어있다. 유별나게 3을 선호한 우리 민족은 신화시대로 부터 역사시대, 오늘의 과학문명 시대에 이르기 까지 끊임없이 민족의 가슴에서 숨쉬고 있다. 단군신화에서의 환인, 환웅, 단군의 삼위일체적 존재는 곧 완성된 하나를 상징한다. 불교에서도 불법승(佛, 法, 僧), 이 세개가 모일 때 불교가 성립되며 민속에서는 출산 후 금줄을 칠때 아들의 경우 고추와 숯을 각각 세개씩 매달았다. 사람이 죽으면 삼년동안 집안에 머물다가 승천한다는 믿음에서 3년상을 치루었는데 이처럼 3은 관혼상제를 비롯하여 우리의 모든 일상생활과 속담, 격언 등에서 친근하게 사용돼 왔다. 우리의 전통춤에서도 그 기본이 어르고 맺고 푸는 삼박자로 되어있고 간장 고추장 된장의 3장은 기본적인 우리의 민족음식이다. 신을 모셔도 삼신을 모시며 내기를 해도 삼세번을 한다. 한복에 착용하여 우아함과 화려함을 더해주는 장식용 노리개도 대부분이 3작이다. 삼월 삼짇날(三辰日 음력 3월3일) 길수로 알려진 양수 3이 겹친 삼월 삼짇날은 특히나 3을 선호하는 한국들에게 더없이 소중한 날로 새겨지고 있다. 산과 들에 꽃이 피고 강남갔던 제비가 돌아온다고 하는 이 날은 처음보는 짐승을 보고 신수점을 치는데 개구리는 복을, 노랑나비, 호랑나비는 좋을 일을, 흰나비는 상(喪)을 의미한다. 아들이 없는 집에서는 절에 가서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하는 <삼짇 불공>을 드리며, 무당을 불러 굿을 하거나 용왕신 산신 등에게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빌기도 하였다. 또한 <삼짇 고사>라 하여 상주가 아니라도 목욕재계하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했으며,부녀자들은 들판에 나가 진달래꽃을 뜯어다가 화전을 해먹는가 하면, 풀싸움과 꽃놀이로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각 가정에서는 대개 삼짇날 장을 담그는데 담근 장에는 고추나 숯을 띄워놓고 부정한 것을 막기 위해 왼새끼를 꼬아 금줄을 쳤다. 한글/훈민정음 15세기 중엽에 세종과 그 주변의 학자들에 의해 창제된 훈민정음은 우리나라의 여러 학문 중에서도 가장 독창적이며, 확고한 전통을 가진 우리 고유의 문자이다. 훈민정음은 한자와는 전연 별개의 독자적인 체계에서 발생한 문자로 놀라운 창조적 정신을 보여주며, 음운 연구의 커다란 성과로서 그 이론의 가장 기본적인 것은 음절의 삼분법, 즉 초성, 중성, 종성이다. 이것은 중국 음운학의 이분법의 전통을 비판 수정한 것으로 훈민정음이 그처럼 훌륭한 문자체계일 수 있는 것은 이 삼분법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천 지 인의 구성으로 우주가 형성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한글 역시 그 우주를 반영하고 있다. 자음으로 이루어진 초성과 종성은 하늘과 땅을 뜻하며, 모음으로 이루어진 중성은 사람을 뜻한다. 이처럼 우리 문화의 상징인 한글에도 음절의 삼분법, 즉 3과 관련된 한국인의 사상과 수에 대한 관념을 엿볼 수 있다. 삼작노리개 한복 저고리의 겉고름이나 안고름, 또는 치마 허리에 차는 여성 장신구의 하나인 노리개는 매우 화려하고 그 모양도 갖가지로 다양하고 섬세하여서 우리의 고유 의상에 아름다움을 한층 더 강조해 준다. 단조로운 의상에 액센트를 주어 의상 전체와의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노리개는 보통 홍, 남, 황의 삼색을 비롯하여 분홍, 자주, 보라, 옥색 등 열두색에 이른다. 흔히 삼작 노리개로 불리워지는 이유는 이처럼 3색을 기본으로 하여 다양한 색상의 고운 빛깔의 다회로 매듭을 맺고 술을 드리운 노래개 세 점을 한 벌로 쳤기 때문이다. 궁중에서는 8월 한가위를 비롯하여 가례, 생일 등 특별한 축의일에 왕비를 비롯하여 행사에 참가하는 귀부인들 까지 모두 삼작노리개를 찼으며, 평상시에도 왕비가 대비전에 문안을 드릴 때 금박 스란치마에 당의를 입고 삼작노리개를 찼다고 한다. 보통 삼작노리개는 금, 은, 백옥, 비취, 산호 등 각종 보석을 세공한 패물을 중심으로 위 아래에 매듭을 맺고 봉술, 딸기술 등을 쌍으로 늘어뜨렸다. 장도를 중심으로 박쥐 등의 은세공을 한 이 삼작노리개는 주로 일반인들이 착용하던 것이다. 삼색나물 나물은 반찬 가운 데 가장 기본적이고 일반적인 우리 음식이다. 도라지, 시금치, 고사리를 각각 끓는 물에 살짝 데쳐 갖은 양념을 하거나 물에 불렸다가 삶아서 볶아 보기좋게 한 접시에 올린 이 삼색나물은 혼례, 상례, 제례를 비롯하여 명절 등의 음식에 빠지지 않는다. 이와같은 음식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한국인은 숫자 3을 유달리 선호했으며 더불어 일상의 모든 개념에 천 지 인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색을 의미한 이 나물은 시금치는 청을, 도라지는 황을, 고사리는 홍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삼성혈(三姓穴) 사적 제134호. 제주시 이도동 전설에 의하면 탐라국을 처음 연 시조(始祖)는 고을나(高乙那)/ 부을나(夫乙那)/ 양을나(梁乙那) 세 사람인데 이들이 바로 이 구멍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이 전설의 구멍은 평지에 각각 수 m를 간격으로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데 한국인에게 전통적으로 특별한 의미가 있는 '3'이라는 숫자를 여기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세 개의 구멍이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그 의미로 볼 때에 안정적이며 완벽한 출발을 상징하고자 하는 탐라국 사람들의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근처에는 이 곳을 기념하는 석비가 있고, 시조를 모시는 사당인 삼성전(三姓殿)이 있다. 천마총 청동솥(天馬塚 靑銅鼎) 신라 6세기, 높이 26.7, 배지름 21.6, 입지름 14.6cm 경주 천마총 출토 동글납작한 몸에 뚜껑이 있고, 어깨부분에 뚜껑 손잡이와 같은 고리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청동솥이다. 특히 이 청동솥에는 동물의 다리를 본딴 3개의 다리가 달려있다. 불전에 향불을 담아 올리는 그릇으로도 사용되었던 이 청동솥의 다리는 어떠한 요철 바닥에서도 안정되게 세울 수 있도록 세개로 되어 있다. '3'은 가장 완벽한 구도를 가지기 때문에 우리나라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조각, 회화, 공예, 건축 등에서 선호하던 숫자이다. 한국에 있어서 '3'의 의미를 갖는 문화재는 멀리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삼족오(三足烏)로부터 신라와 고려의 삼층탑과 삼존불, 가까이는 조선의 삼층장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하늘과 땅과 사람이 있음으로써 비로서 세계가 완성되고 살아 움직이게 된다고 보았던 '삼'의 표현은 시대나 종교에 구애받지 않고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민족의 근본 사상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서산마애삼존불상(瑞山磨崖三尊佛像)백제 7세기, 높이 : 본존 2.8m, 보살입상 1.7m, 반가상 1.66m 국보 제84호, 충남 서산군 운산면 용현리 2-40 삼존불상은 본존을 중심에 세우고 양쪽에 협시보살을 세우는 것으로 이러한 구성은 이미 인도에서 시작되어 우리나라로 전래되면서 부처님을 모시는 하나의 단위로 생각되었다. 협시보살은 본존 옆에서 공양도 하고 때로는 본존의 역할을 대신 수행하는 등 본존을 보좌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또한 미적으로도 좌우가 대칭이 되므로 안정된 구도를 얻을 수 있다. 불상을 어떤 재료로 만드는가와는 관계가 없어서 마애불, 석불, 금동불 등 다양한 삼존불에서 접할 수 있다. 이 서산마애삼존불은 삼국시대의 마애불을 대표하는 삼존불로서 특이한 점은 다른 삼존불의 경우에는 양 협시가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으나 이 삼존불의 협시 중 우협시보살은 보주를 들고 서 있는데 반해 좌협시보살은 반가사유자세를 취하고 있다. 백제의 미소를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질 만큼 표정처리가 매우 뛰어난 것은 눈은 크게 뜨고 입은 다문채 한껏 미소짓고 있기 때문이고 이로인해 부드럽고 풍만한 표정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