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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사건이 뭐우까? 4월 제주에 내리는 동백꽃 피눈물
4·3사건이 뭐우까? 4월 제주에 내리는 동백꽃 피눈물
4·3사건이 뭐우까? 육지 사람들이 행복하게 걷고 있는 제주의 상징 ‘올레길’ 곳곳에 4•3의 상처가 베어 있다는 것을 알고 걸어야 한다. 적어도 4월에는… 4월이면 제주에 지천으로 핀 아름다운 동백이 제주 4•3사건의 상징화이다. 동백꽃이 지닌 말은 “그대를 누구보다도 사랑합니다”이다. 제주 4•3사건의 상징화 동백은 제주도민의 피눈물을 사랑으로 승화하기엔 아직도 시간이 필요하다. 제주에서 4월은 슬픔의 시간이고 역사상 가장 슬프고 잔인한 사건이 일어난 달이다. 3코스 ‘표선 가시마을’, 5코스 ‘남원 의귀마을’, 8코스 ‘안덕 동광마을’, 15코스 ‘한림 금악마을’, 16코스 ‘오라 연미마을’, 18코스 ‘조천 북촌마을’에 4·3길은 4·3을 기억하고 ‘화해와 상생’의 사랑을 위한 역사의 길이다. 4·3길 상징 로고 퐁낭(팽나무)는 제주 사람들이 온갖 시련과 애환을 지켜낸 정주목이다. 4·3의 아픔을 당당히 극복하는 아름다운 제주·평화로운 제주, 밝은 미래를 열어가는 제주공동체 복원의 의미를 담고 있다. 4·3길 상징 띠의 붉은색은 정열, 희생, 진실을 뜻하며, 흰색은 순결, 결백, 평화를 뜻한다. 제주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제주자연과 환경에 잘 적응하며 평화를 사랑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사람들임을 표현하고 있다.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미군정기에 발생하여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이르기까지 7년여에 걸쳐 지속된, 한국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인 사건이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를 ‘붉은 섬’으로 낙인 찍어 대규모 토벌대를 제주도로 보내 중산간마을 10개에서 초토화작전을 실행했다. 공식적으로 무려 1만4231명(4.3진상조사보고서는 실제 인명피해를 3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 그 중 10세 이하가 770명이다. 11세~20세 어린 학생들도 2464명이나 죄없이 희생된 비극이다. 당시 제주도 인구의 1/10이 사라져 제주의 4월은 제사의 달이기도 하다. 1947년 3월1일은 ‘3.1혁명 정신을 계승해 외세를 물리치고 조국의 자주통일 민주국가를 세우자’는 외침 아래 3만 명에 달하는 도민이 관덕정(제주시 관덕로 19) 광장에 모였다. 가두행진 도중 여섯 살 정도의 아이가 기마경관이 탄 말에 채였다. 기마경관이 이를 무시하고 가려는 순간 군중들의 야유가 들렸고 돌을 던졌다. 군중에 쫓기며 경찰서로 향하던 기마경관. 그리고 이어진 총성. 민간인 6명이 숨지고 8명이 중상을 입었다. 4.3사건의 시작이었다. 4·3은 반세기 넘도록 금기의 영역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유가족들은 희생자들을 위령하는 행사조차 공개적으로 열기 어려웠다. 4·3희생자 추념일을 법정 기념일로 봉행하기까지는 험난한 과정을 거쳤다. 1978년 9월 계간 문학비평지 ‘창작과 비평’에 4·3사건을 소재로 한 현기영(玄基榮)의 중편소설. 순이삼촌(順伊三寸) 발표되면서 30여 년 동안이나 묻혀 있던 사건의 진실을 문학을 통해 공론화시켰다. 이 소설은 실제 1949년 1월 16일 북제주군 조천면 북촌리에서 벌어진 양민학살을 사실주의 기법으로 다룸으로써 문학의 힘이 얼마나 강한 지 보여주었다. 제주 출신 현기영은 그 학살현장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순이삼촌의 삶이 어떻게 황폐화되어 가는가를 보여줌으로써 4·3사건의 참혹상과 그 후유증을 고발했다. 이 작품은 4·3사건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최초로 다룬 작품으로 문학사적·역사적 의의가 큰 1970년대 대표적인 문제소설로 평가받고 있다. 순이삼촌으로 현기영작가는 고문과 금서조치를 당하는 등 제4공화국 시절에 개인적으로 큰 고초를 겪지도 했다. 하지만 이 작품을 계기로 4·3사건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전개되고 문학을 비롯해 미술·연극계 등 문화계 전반에 걸친 영향은 대단했다. 1989년에는 제주도내 11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제주 4·3 사월제 공동준비위원회가 ‘제1회 4·3추모제’를 봉행함으로써 위령제는 공식행사로 치러진다. 1990년 6월 유족들은 ‘제주도4·3사건 민간인희생자 유족회’를 조직해 1991년 4월 처음으로 유족들이 주체가 된 4·3사건희생자위령제를 봉행했다. 4·3특별법이 제정된 2000년부터는 ‘제주4·3사건 희생자 범도민 위령제’로 명칭을 바꿔 제주시 봉개동에 새로 부지에서 확보해 4·3평화공원을 봉행한다. 2006년 4·3 위령제에는 국가 원수로는 처음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참석해 제주도민들에게 다시 공식 사과하고 참배했다. 4·3희생자 추념일을 국가 기념일로 지정한 것은 정부의 진상보고서 확정, 대통령의 사과에 이은 4·3의 국가적 해결 과제 중 마지막 안건을 해결한 것이다. 2012년 12월 박근혜 대통령 후보는 대선의 주요 공약으로 추념일 지정을 제시했다. 2013년 8월 국회는 4·3특별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면서 4·3 법정 기념일과 관련해 부대 의견으로 대통령령인 ‘각종 기념일에 관한 규정’을 개정해 4·3추념일을 법정 기념일로 지정하도록 명문화함으로써 법정 기념일 지정의 초석을 마련했다. 드디어 2014년 3월 18일 국무회의에서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을 개정하고 3월 24일자 관보에 게재함으로써 ‘4·3희생자 추념일’ 지정을 위한 대통령령 개정안이 마침내 공포됐다. 법정 기념일 지정을 계기로 4·3문제의 해법은 국민통합과 화합의 국정 과제를 실현한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지금까지 4·3사건을 둘러싸고 빚어진 이념 논쟁과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마련되었다. 제주 4·3 평화재단은 4·3당시 제주도민이 겪은 이런 통한의 역사현장을 국민이 공감 할 수 있는 역사·교육현장으로 조성, 인권과 평화의 소중함, 아름다운 제주도의 4·3역사를 올바르게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4·3길을 6개를 조성했다. 1) 안덕 동광마을 1670년대 임씨가 정착한 이래 제주목을 왕래하던 사람들의 중간 기착지인 국영여관 이왕원(梨往院)이 있었을 만큼 사통발달한 곳이었다. 해방 후 미군정의 공출로 불만이 컸던 마을 청년들의 관리 폭행사건으로 미군정이 주목하는 마을로 낙인찍히게 되었고 토벌대에 의해 많은 주민들이 총살당했다. 시신들은 바다에 떠내려가거나 겹겹이 쌓여 있어 유족들은 시신을 구별할 수 없었고, 고심 끝에 헛묘를 만들어 원혼을 위로할 수 밖에 없었다. 동광리는 4·3으로 인한 희생자가 160여 명 이상이다. 2) 남원 의귀마을 4·3사건이 한창이던 1948년 11월 초순, 의귀 마을 주민들은 다른 지역보다 일찍 시작된 군경토벌대의 강경진압작전으로 한 순간에 삶터를 잃어 인근 오름과 숲, 궤 등에 숨어 살거나 산으로 피신할 수 밖에 없었다. 군경토벌대에 의해 많은 주민들이 잡혀 희생되거나 육지 형무소로 보내졌다. 이들 중 대다수는 지금까지 생사를 알 수 없는 4·3행방불명인으로 남아 있다. 4·3사건으로 인한 의귀마을 희생자는 250여명에 이른다. 3) 조천 북촌마을북촌은 제주시 조천읍 동쪽 끝에 자리 잡은 해변마을로 포구를 중심 으로 ‘본동’, 서쪽에 서우봉과 접한 ‘해동’, 남쪽 선흘리 방향 중산간에 ‘억수동’ 이 있으며 1990년대에 ‘한사동’이 새로 조성되어 지금은 4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949년 1월 17일 너븐숭이 인근에서 군인 2명이 무장대의 습격으로 숨지자 북촌초등학교 주변 들과 밭에서 북촌주민 3백여 명이 집단학살 당하는 등 북촌마을은 4·3사건 최대의 피해마을 중 하나이다. 4) 한림 금악마을금악리는 1550년경 진주강씨 일가가 동네의 북쪽에, 남양홍씨가 남쪽에 살면서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전해온다. 그 후 양씨, 박씨 그리고 김씨, 이씨, 송씨 등이 입주했다고 한다. 금악리는 4·3을 거치면서 300여호의 가옥이 없어지고 152명의 주민이 학살 되거나 행방불명이 되었다. 웃동네, 중가름, 오소록이동네, 별드르, 별진밭, 새가름, 동가름 등의 마을은 복구되지 못한 채 잃어버린 마을로 남게 되었다. 5) 표선 가시마을가시리(加時里)는 한라산 남동쪽 해발 90~570m 고도에 위치한 중산간 마을로 표선면 전체 면적의 41.4%를 차지할 정도로 광활하다. 1948년 4·3당시에는 약 360여 가호가 있을 정도로 큰 마을이었지만 초토화 작전과 소개령으로 마을은 폐허가 되었다. 1949년 5월, 본동을 중심으로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지만, ‘새가름’, ‘종서물’ 마을은 재건하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가시리사무소 앞에는 마을이 재건될 때 도움을 준 안흥규, 안재호 선생의 동상과 공헌비가 세워져 있다.가시마을 4·3길은 4·3의 아픈 역사뿐만 아니라 아픈 역사를 딛고 일어선 희망의 가시리를 보여주고 있다. 6) 오라 연미마을제주시 도심권역에 있는 오라동은 4.3초기부터 유독 피해가 많은 지역이다. 5월1일 발생한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연미 마을의 가옥들은 불탔으며 당시 진행 중이던 평화협상도 결렬됐다. 어우늘은 25여호 130여명의 주민이 살았던 마을이다. 1949년 1월초 군경의 초토화 작전을 만나 마을은 잿더미로 변했고 복구되지 못한 채 끝내 잃어버린 마을이 됐다. 월정사는 1948년 12월 10일 토벌대에 의해 불태워졌다 4·3이후 지금의 월정사의 모습을 갖췄다. 제주 최초의 선원으로서 4·3의 아픔을 고스란히 겪은 사찰이다. 오라리 방화사건을 기억하는 비석은 현재 연미마을회관(제주시 연사길 142) 앞에 세워져 있다. 1948년 12월 오라공립국민학교가 전소되고 교사 3명이 토벌대에 의해 전소돼 학교는 폐교됐다. (글: 단무원심) <제주 올레길 구석구석 4·3의 아픔이 스미지 않은 곳이 없다>
세계 화장실 문화 정립시킨 WTA 초대회장 ‘Mr. Toilet’ 심재덕 11주년 추모식
세계 화장실 문화 정립시킨 WTA 초대회장 ‘Mr. Toilet’ 심재덕 11주년 추모식
눈 감고 코 막고 외면하던 곳, 님의 손길 닿으니 향기나는 세상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미스터 토일렛’ ‘심재덕’ 선생님! (장사익 씀) 화장실을 문화로 승화시킨 ‘Mr. Toilet’ 심재덕. 2020년 1월 14일 그의 11주기 추모식이 수원시 이목동 해우제 문화센터에서 열렸다. 평소 그의 인간성을 알 수 있듯이 이목동 배나무골 주민, 수원지역 국회의원, 시의원, 시 관계자, 예술인, 지인 등이 11년이 지난 지금도 예전처럼 모여 그를 추모하고 있는 것이다. 고인과는 남다른 인연이 있어 그의 장례식에서 ‘하늘가는 길’을 불러주었던 노래꾼 장사익씨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더럽다고 외면하던 변소를 향기나는 화장실 문화로 바꾸기 위해 자신의 몸까지 바쳐가면서 평생 화장실을 생각했다. 그래서 스스로를 미스터 화장실이라 불렀다. 화장실 문화운동에 매진하기 위해 자신의 몸도 돌보지 않아 아이러니 하게도 전립선 암으로 돌아갔다. 자신의 몸을 불태워 세계화장실 협회를 살려 낸 것이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 날도 참석해 무반주로 천상병시인의 '귀천'을 불러 주었다) 사실 그는 화장실문화 전도사가 아니다. 국회의원, 수원시장이 그의 본문이었다. 그럼에도 그런 이름보다는 미스터 토일렛으로 불려질 바랐고 사후에도 그렇게 기억되길 원했다. 생전에 그를 만났을 때 비위생적인 화장실로 인해 세계 각국의 후진국들이 각종 전염병 발병으로 고생하고 있다고 하며 화장실 개선만으로도 인간들의 위생이 획기적을 개선될 수 있디면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수만의 아이들을 살릴 수 있다고 역설하던 모습이 기억이 난다. 실제로 그는 자기 집을 세계 최초, 최대 변기 모양으로 만들어 살 정도로 화장실 문화에 대한 집념이 대단했다. ‘근심을 덜어내는 집’이라는 이름의 ‘해우재(解憂齋)’(지하 1층, 지상 2층)는 원래 심 전 시장이 30여 년간 살아왔던 집을 2007년 변기모양으로 지었는데 2009년 세상을 떠나면서 수원시에 기증했다. 수원시는 해우재를 화장실문화 전시관으로 만들고 일대를 화장실문화 공원으로 만드는 등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며 수원시 화장실 문화 전시관으로 운영 중이다. (사진: 해우재문화센터) 뒷간, 변소로 불리며 냄새나고 지저분한 공간이던 공중화장실을 민선 초대 수원시장, 심재덕 미스터 토일렛의 노력으로 오늘날에 이르렀다. 2002 한·일 월드컵 경기 유치를 위해 시·군간의 경쟁이 치열하던 1996년 당시 심재덕 수원시장은 화장실 TF팀을 만들었다. 또한 1999년에는 한국화장실협회를 만들어 국내 화장실 문화 개혁을 이끌었다. 오늘날 고속도로와 주요 관광지의 모습이 그의 노력이 시발점이 되었다. 이후 2007년 11월에는 화장실 전문 국제기구인 세계화장실협회(WTA)를 창립해 초대 회장으로 취임하고 세계로 화장실 문화 확산을 해 나가 결실을 맺었다. 현재는 염태영 수원시장이 고인의 유지를 따라 2014년 세계화장실협회 회장을 맡아 심 전 시장이 수원시에 뿌린 화장실 문화를 확산시키고 있다. . WTA는 위생이 열악한 개도국에 ‘희망의 화장실 프로젝트’를 통해 16개국에 33개 공중화장실 설치를 지원했다. 또한 세계화장실 기술표준 제정과 UN, KOICA 등 국내외 국제기구·민간기구와 협력사업 등으로 세계 화장실 문화 확산에 우리나라가 자랑스런 리더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노력의 결실로 고인이 그토록 원했던 ‘유엔 경제사회이사회(ECOSOC)’의 ‘특별 협의 지위(Special consultative status)’를 획득하며 글로벌 비정부기구로서의 위상을 갖췄다. '영원한 수원시장'으로 수원시민에게 아직도 기억되고 있는 심재덕 전 시장을 기리기 위해 심재덕기념사업회(회장 선정선)는 수원 곳곳에 남아 있는 ‘심재덕의 발자취를 찾아서'라는 프로그램으로 심 전 시장이 복원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킨 화성행궁을 시작으로 화홍문, 방화수류정, 연무대, 광교산 반딧불이 화장실, 수원 월드컵 경기장, 해우재를 둘러보는 행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특히 반딧불이 화장실은 수원시가 세계화장실문화의 메카라는 호칭을 얻은 상징적인 건물이다. 매년 1월 14일이면 수원시 이목동 배나무골에서는 Mr. Toilet을 기리는 추모제가 계속 열릴 것이다. 그는 ‘영원한 수원시장 심재덕’이다. (사진: 심재덕기념사업회)
95년 역사, 국내 첫 민간 백운산장 3대에서 막 내리다
95년 역사, 국내 첫 민간 백운산장 3대에서 막 내리다
(사진:백운산장 보존대책위원회) 1924년 지어진 국내 첫 민간 산장, 백운산장이 우여곡절 끝에 2019년 12월로 95년 역사를 마감했다. 산악인은 물론이고 주말이면 서울 북한산을 찾았던 일반인들도 백운대에 오르려면 누구나 한 번쯤 막걸리 한 잔과 국수로 힘든 산행을 쉬어가게 해 주던 보금자리였다. 그러던 백운산장이 국립공단과의 오랜 소송 끝에 패소하고 현판을 내린 것이다. 공단 측은 향후 새 단장을 하고 백운대피소로 산악 안내와 특수산악구조대의 근무 공간으로 운영할 예정이다. 백운대와 인수봉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는 백운산장은 1924년 이해문씨가 작은 움막으로 시작한 것이 그 출발이었다. 그 후 이영구씨가 1946년 산장에 들어왔으며 2018년 3일 이영구씨가 87세를 일기로 별세하면서 이인덕씨가 이어 받았다. (사진:이승용) 백운산장이 공단과 소송이 시작된 것은 1992년 등산객 실화로 화재가 발생했고 1998년 기부채납(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 무상으로 재산을 증여하는 것)을 조건으로 국립공원관리공단으로부터 신축 허가를 받은 것에서부터 기인한다. 그 후 무상사용기간으로 정한 20년 경과 후 2017년이 되자 공단은 기부채납 이행을 요구했고 산장 측은 민간이 계속 운영하도록 산악인들의 유지 서명으로 맞서자 공단 측이 2017년 7월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법원이 2019년 5월 공단 승소 판결을 내리면서 2019년 12월 2일 민간인 산장의 역사는 막을 내린 것이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2014년 제 12회 소중한 문화유산상으로 북한산 백운산장을 선정한 바 있다. 그리고 백운산장을 사랑하는 산악인들은 서명을 통해 문화재로 남기자고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사진:백운산장 보존대책위원회) 백운산장에는 많은 이야기가 숨어있다. 백제시대 백운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는데 이 암자터에 이해문씨와 산악인들이 의기투합해 1933년 경성영림소의 묵인하에 지은 것이 역사의 시작이다. 그후 산악인들이 의기투합으로 4년간의 공사 끝에 1960년에 번듯한 백운산장(白雲山莊)으로 완공한다. 이렇게 30년을 지켜왔는데 불행하게도 화재사고를 당한다. 1992년 6월 등산객의 부주의로 화재가 발생해 산장지붕이 전소되었다. 이로 인해 한동안 지중에 천막을 치고 운영을 하게 된다. 그러다 지붕보수를 위해 공단 측과 합의를 통해 국립공단 국유지에 건축을 허기하는 조건을 20년 기부채납 약속을 하게 된다. 사실 백운산장은 국내 국립공원 내 유일한 민간산장이고 최초의 민간산장이어서 산악인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유지에 마음을 모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지난 1971년 11월 뉴스에도 보도된 인수봉 조난사고는 아직도 산악인들의 기억 속에 있다. 71년 11월 28일 일요일 많은 암벽등반인들이 올해의 마지막 암벽등반에 나섰다. 변덕스런 산 날씨는 오후 2시부터 갑자기 급강하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많은 바위꾼이 한꺼번에 하강을 하다 보니 일대 혼란이 일어 났고 급기야 자일이 강풍에 서로 엉키면서 참사가 예고되고 있었다. 인수봉아래 유일한 쉼터 백운산장지기였던 이영구씨는 인수봉 조난소식을 접하자 즉시 달려가 구조를 시작한다. 50여명에 이르는 조난객들은 강풍과 추위로부터 지키기 위해 불을 피고 뜨거운 물을 주고 구조 활동을 시작한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휴대폰이나 전화가 없어 조난 시 구조와 신고는 오로지 발로 해야 했기에 시간이 오래 걸릴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산장지기의 구조가 이루지는 시간 하산객이 파출소에 도착해 조난신고를 하면서 방송에 조난 사실이 알려지고 오후 9시경이 되어서야 구조대가 구조를 했건만 하강도중 자일이 엉켜 동사한 5명은 끝내 구조하지 못했다. 이처럼 산장지기는 늘 조난에 가장 최전선에 있을 수 밖에 없었다. 1984년 산악구조대가 결성되기 전까지 그는 언제나 백운대 인수종 조난의 든든한 파수꾼이었다. 1965년 4월 25일 백운산장에서 결혼식을 올린 이영구씨는 2018년 9월 3일 887새로 백운산장의 지키는 영원한 혼령이 되었고 민간인 백운산장의 현판은 201년 12월 2일 그렇게 내려졌다. (사진:백운산장 보존대책위원회, 고 이영구씨, 부인 김금자)
옛 그림 원형을 살려내다
옛 그림 원형을 살려내다
지금 국립고궁박물관 1층 전시실에서는 ‘우리 손에서 되살아난 옛 그림’이라는 주제로 전시회를 10월 13일까지 열고 있다. ‘우리 손에서 되살아났다’는 의미는 해외 기관이 소장한 우리 유물들을 국내로 들여와 보존처리하고 복원하여 원형을 되살리는 작업을 마쳤다는 뜻이다. 오랜 세월 여러 소장자를 거치며 전해진 그림들은 때를 타거나 찢기는가 하면 보수하는 과정에서 처음 그린 때의 원형을 잃기도 한다. 따라서 이런 옛 유물들을 어떻게 보존처리를 하는지? 그 과정들을 도표와 영상을 통해 친절하게 보여준다.. 되살리다, 어루만지다, 드러내다의 3단계로 나누어 그림으로 설명해 준다. [출처]국립고궁박물관 1.되살리다(Restoratio) 여러 소장자를 거치면서 본래의 형태를 잃게 된 유물은 과학적 분석과 역사적 맥락을 철저히 조사하여 제작 당시의 모습에 가깝게 복원하였다. <산시청람도> 처리 전후> Before and After the Treatment of Dwelling by a Mountain Stream 전 Before/ 후 After 2.어루만지다(Preservation) 손상이 있지만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유물은 기존의 형태를 최대한 유지하되 훼손된 부분을 보수하여 안정적인 상태로 보존할 수 있도록 하였다. <백동자도 병풍> 처리 전후> Before and After the Preservation Treatment of One Hundred Children 3.드러내다(Examination) 보존처리 과정에서 새로운 정보가 밝혀지기도 한다. 스웨덴 동아시아박물관의 <난초도>는 사전 분석 과정에서 구리 성분의 안료를 사용했음이 밝혀졌다. 영국 빅토리아앨버트박물관 소장 <자수 화초길상문 병풍>은 배접지를 교체하면서 퇴색되기 전 직물의 본래 색상과 정교한 자수기법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난초도> 성분 분석 Scientific Analysis of Orchids <자수 화초길상문 병풍>의 앞, 뒷면 영상물을 통해서는 ①작품을 분리하고, 건식, 습식 클리닝 단계를 거쳐 먼지를 털어내고 오염된 곳을 지우는 과정과 ②X선 형광분석기(XRF)를 통한 안료조사, ③구배접지 제거, ④여과수룰 사용한 습식클리닝, ⑤결손부 메움, ⑥건조 후 아교 더하기, ⑦꺾임 방지띠 부착, ⑧배접(褙接, 탱화를 그릴 때, 밑초가 그려진 종이를 천 위에 포개어 붙이는 일), ⑨ 장황(裝潢, 책을 꾸미고 단장하는 기술행위) 등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된 작품들은 독일의 로텐바움박물관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선교박물관 등 4개국 6개 기관이 소장하고 있는 한국의 회화와 자수 병풍 총 12점으로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국내로 들여와 2017년부터 보존·복원한 작품들이다. 한편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2013년부터 현재까지 모두 8개국 21개 기관 36건의 국외문화재 보존ㆍ복원 및 활용 사업을 지원해 오고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문화재청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의 지원으로 보존처리를 완료한 유물을 2015년과 2016년, 2017년에도 전시를 통해 공개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