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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곡성군, 영화는 '곡성(哭聲)' 실제 지명은 곡성(谷城)
전남 곡성군, 영화는 '곡성(哭聲)' 실제 지명은 곡성(谷城)
(출처: 영화 곡성 포스터, 곡성군 이미지를 고려해 한자를 표기했다. 곡성군 주민들은 영화 '곡성(哭聲)'때문에 한 때 지역 이미지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했다고 한다. 실제로 영화도 전남 곡성군에서 촬영해 마을이름 진짜 곡성(哭聲)인가하는 오해를 살만했다. '울음(곡) 소리'라는 뜻의 영화 '곡성(哭聲)'을 '깊은 골자기와 높은 산의 고개'라는 한자 뜻의 '곡성(谷城)' 지역에서 촬영한 것은 당시 감독의 의도적인 중의적 전략이었다고 한다. 아무튼 영화로 주목을 받아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사진: 곡성군 보도자료, 곡성 증기 미니열차) 곡성군(谷城郡)은 전라남도 동북부에 있는 군이다. 동쪽으로 구례군, 서쪽으로 담양군, 북쪽으로 전라북도 남원시, 순창군과 접하며 남쪽으로는 전라남도 순천시, 화순군과 경계를 이룬다. 곡성읍은 섬진강 곡성분지의 중앙부에 위치해 있으며 군청 소재지이다. 곡성은 농업 위주의 1차 산업구조로 취약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었고 인구도 이농 현상과 노령화가 가속화되는 대표적 농촌 지역이다. 볼거리·놀거리·특산품이 없고 바다와도 멀리 떨어진 산간지역으로 정부의 광역개발권역 또는 여타 개발 축에도 포함되지 않은 배후지로 곡성이라는 지명조차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이후 폐철길 구간 중 섬진강을 따라가는 13.2km를 관광자원으로 재활용하고 철로 자전거가 인기를 끌었고 영화 곡성의 촬영지로서 구 곡성역 등이 입소문 나면서 많은 관광객이 곡성을 찾기 시작했다. 전남 곡성군은 삼국시대 백제 문주왕 때(서기 475)에 군명을 욕내(欲乃, 浴川)라 칭했다고 한다. 이후 통일신라시대 때인 고려초 승평군(昇平郡, 현 순천시)에 속하였다가 현종 9년(서기 1018)에 나주목의 속군으로 이속 되었다. 조선시대 태종 13년(서기 1413)에 현으로 개칭하였으나 정유재란(서기 1597) 시 남원 도호부에 합속되었다가 광해군 원년(서기 1609)에 다시 분리 독립해 현재 명칭인 곡성현으로 복설되었다. 근대에는 광무 3년 (서기 1899)에 행정구역 명칭을 곡성군으로 개칭하여 군수를 두었고 갑인년(서기 1914)에 담양, 구례, 순천, 남원 일부를 편입하여 11개면 126리로 개편되었다.
세계 화장실 문화 정립시킨 WTA 초대회장 ‘Mr. Toilet’ 심재덕 11주년 추모식
세계 화장실 문화 정립시킨 WTA 초대회장 ‘Mr. Toilet’ 심재덕 11주년 추모식
눈 감고 코 막고 외면하던 곳, 님의 손길 닿으니 향기나는 세상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미스터 토일렛’ ‘심재덕’ 선생님! (장사익 씀) 화장실을 문화로 승화시킨 ‘Mr. Toilet’ 심재덕. 2020년 1월 14일 그의 11주기 추모식이 수원시 이목동 해우제 문화센터에서 열렸다. 평소 그의 인간성을 알 수 있듯이 이목동 배나무골 주민, 수원지역 국회의원, 시의원, 시 관계자, 예술인, 지인 등이 11년이 지난 지금도 예전처럼 모여 그를 추모하고 있는 것이다. 고인과는 남다른 인연이 있어 그의 장례식에서 ‘하늘가는 길’을 불러주었던 노래꾼 장사익씨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더럽다고 외면하던 변소를 향기나는 화장실 문화로 바꾸기 위해 자신의 몸까지 바쳐가면서 평생 화장실을 생각했다. 그래서 스스로를 미스터 화장실이라 불렀다. 화장실 문화운동에 매진하기 위해 자신의 몸도 돌보지 않아 아이러니 하게도 전립선 암으로 돌아갔다. 자신의 몸을 불태워 세계화장실 협회를 살려 낸 것이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 날도 참석해 무반주로 천상병시인의 '귀천'을 불러 주었다) 사실 그는 화장실문화 전도사가 아니다. 국회의원, 수원시장이 그의 본문이었다. 그럼에도 그런 이름보다는 미스터 토일렛으로 불려질 바랐고 사후에도 그렇게 기억되길 원했다. 생전에 그를 만났을 때 비위생적인 화장실로 인해 세계 각국의 후진국들이 각종 전염병 발병으로 고생하고 있다고 하며 화장실 개선만으로도 인간들의 위생이 획기적을 개선될 수 있디면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수만의 아이들을 살릴 수 있다고 역설하던 모습이 기억이 난다. 실제로 그는 자기 집을 세계 최초, 최대 변기 모양으로 만들어 살 정도로 화장실 문화에 대한 집념이 대단했다. ‘근심을 덜어내는 집’이라는 이름의 ‘해우재(解憂齋)’(지하 1층, 지상 2층)는 원래 심 전 시장이 30여 년간 살아왔던 집을 2007년 변기모양으로 지었는데 2009년 세상을 떠나면서 수원시에 기증했다. 수원시는 해우재를 화장실문화 전시관으로 만들고 일대를 화장실문화 공원으로 만드는 등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며 수원시 화장실 문화 전시관으로 운영 중이다. (사진: 해우재문화센터) 뒷간, 변소로 불리며 냄새나고 지저분한 공간이던 공중화장실을 민선 초대 수원시장, 심재덕 미스터 토일렛의 노력으로 오늘날에 이르렀다. 2002 한·일 월드컵 경기 유치를 위해 시·군간의 경쟁이 치열하던 1996년 당시 심재덕 수원시장은 화장실 TF팀을 만들었다. 또한 1999년에는 한국화장실협회를 만들어 국내 화장실 문화 개혁을 이끌었다. 오늘날 고속도로와 주요 관광지의 모습이 그의 노력이 시발점이 되었다. 이후 2007년 11월에는 화장실 전문 국제기구인 세계화장실협회(WTA)를 창립해 초대 회장으로 취임하고 세계로 화장실 문화 확산을 해 나가 결실을 맺었다. 현재는 염태영 수원시장이 고인의 유지를 따라 2014년 세계화장실협회 회장을 맡아 심 전 시장이 수원시에 뿌린 화장실 문화를 확산시키고 있다. . WTA는 위생이 열악한 개도국에 ‘희망의 화장실 프로젝트’를 통해 16개국에 33개 공중화장실 설치를 지원했다. 또한 세계화장실 기술표준 제정과 UN, KOICA 등 국내외 국제기구·민간기구와 협력사업 등으로 세계 화장실 문화 확산에 우리나라가 자랑스런 리더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노력의 결실로 고인이 그토록 원했던 ‘유엔 경제사회이사회(ECOSOC)’의 ‘특별 협의 지위(Special consultative status)’를 획득하며 글로벌 비정부기구로서의 위상을 갖췄다. '영원한 수원시장'으로 수원시민에게 아직도 기억되고 있는 심재덕 전 시장을 기리기 위해 심재덕기념사업회(회장 선정선)는 수원 곳곳에 남아 있는 ‘심재덕의 발자취를 찾아서'라는 프로그램으로 심 전 시장이 복원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킨 화성행궁을 시작으로 화홍문, 방화수류정, 연무대, 광교산 반딧불이 화장실, 수원 월드컵 경기장, 해우재를 둘러보는 행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특히 반딧불이 화장실은 수원시가 세계화장실문화의 메카라는 호칭을 얻은 상징적인 건물이다. 매년 1월 14일이면 수원시 이목동 배나무골에서는 Mr. Toilet을 기리는 추모제가 계속 열릴 것이다. 그는 ‘영원한 수원시장 심재덕’이다. (사진: 심재덕기념사업회)
저승가는 하늘 도우미, 대통령 염장이로 유명
저승가는 하늘 도우미, 대통령 염장이로 유명
(사진: 연화회 제공) 명장을 찾아서(1) 염장이 유재철 스스로를 ‘하늘 가는 도우미‘ 라고 부르는 염장이 유재철.지금은 장례 명장의 반열에 올랐지만 가업을 이어받은 것도 아니고 하고 싶어 이 길을 온 것도 아니었다. 그저 먹고살기 위해 친구따라 하다가 나이 서른다섯에 장의사를 차리며 본격적인 염장이의 소명을 따르기 시작한 것이다. 2006년 10월 22일 최규하 대통령이 서거 때 모신 것이 계기가 되어 노무현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을 연이어 모시면서 대통령 염장이로 불리기 시작해 법정스님 등 큰 스님들의 다비를 모시며 다비식 전문가로도 불린다. (사진: 연화회 제공) 유재철명장은 늦깍이 염장이이다. 사회생활 이것 저것 실패를 맞보고 패배의식에서 나이가 들어서 비로소 제 손에 맞는 일을 찾은 것이다. 그러니 절실했고 최선을 다하는 일이 될 수 있었다. 명장에게 염장이란 무엇일까? 망자를 마지막으로 고이 단장해 저승으로 보내 드리는 숭고한 예식을 집전하는 사람이 유명장이다. 즉 염습(殮襲)을 해주는 이다. 염은 소렴과 대렴으로 나뉘는데 소렴은 시신을 옷과 홑이불로 싸서 묶는 것이고 대렴은 시신을 묶어서 관에 넣는 것이다. 습(襲)은 시신을 목욕시켜 모든 의복을 입히는 것을 말한다. 명장이 대통령 염장이로 불리게 된 계기는 2006년 최규하 대통령 국민장을 모신 이후로 2009년 노무현 대통령 국민장, 2009년 김대중 대통령 국장, 2015년 김영삼 대통령 국가장을 진행하는 등 네 분의 대통령을 모셨기 때문이다. 또한 1996년 일붕 서경보 스님을 시작으로 광덕 스님. 정대 스님, 법정 스님, 대행 선사 등과 최근에는 송광사에서 활안대종사와 봉암사에서 적명스님의 다비식를 봉행해 불교 다비식의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하룻밤을 꼬박 걸리던 다비를 4시간 정도에 해결한 이도 유명장이다. (‘연화 다비’, 기존 다비보다 비용도 저렴하며 석유를 사용하지 않고24시간에서4시간으로 단축됐다) 중요무형문화재 111호 사직대제 이수자이기도 한 유명장은 염장이라는 업을 최초로 학문으로 쳬계화한 장본이기도 하다. 과거 어느 동네에 있었던 장의사 시절에는 염장이에 대한 거부감도 컸고 개인 교습처럼 도제화 되었었다. 그러던 장례를 유명장이 동국대에 석사 과정인 장례문화학과 개설을 요청해 수학했고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에서 ‘한국의 국가장’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기도 한다. 또한 미국에서‘시신약품처리보존기법(Embalming)’도 배워와 전수하고 있다. 유명장은 죽음을 아름다운 이생과의 이별이 되어야 한다며 생전에 자신의 장례에 대해 기록을 남길 것을 권한다. 배우자와 자녀에게 하고픈 말, 유언 및 유언 공증, 보유 자산, 채권 및 채무, 소장품 등도 기록으로 남겨 망자에 대한 추억 모으기를 하라고 한다. 추억이 많을수록 회고의 의미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또 이야기가 있는 장례를 권한다. 유명장의 장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가족 중 한 사람인 시인이 시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를 낭송했다고 한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기독교 신자인 큰처남은 “천국에 잘 도착했으니 울지 말고 잘 놀다 가시라는 어머니의 전화를 방금 받았다”고 가족을 대표해 인사했다고 한다. 그의 꿈은 우리나라 장례문화를 바꾸는 것이다. 현재 한국의 장례문화는 개선돼야 할 부분이 너무 많다고 한다. 상주가 왼팔에 검은 완장을 차는 것은 일제강점기의 잔재며 장례식에서 의장대 운구병이 흰색 마스크를 쓰는 것도 본래 예법에는 없던 것들이다. 영정에 검은 띠를 두르는 것도 마찬가지다. 가장 시급히 개선되어야 하는 문제는 장례 의식의 주인공이 고인이 아니라는 점이라고 한다. 장례식장에 가서 절하고 방명록에 이름 적고 돌아오는 추모의 의미는 하루빨리 사라졌으면 했다. 죽음을 제대로 준비하고 이해하면 삶을 더 열심히 살 수 있다는 유명장은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살면 세상은 좀 더 아름다워질 거라며 이 세상 마지막 길이 의미있고 기억되는 하늘 도우미로 기억되고 싶은 염쟁이로서의 철학을 조곤조곤 이야기 해주었다. 약 두 시간에 걸쳐 유명장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을 들어본다. 송귀(松龜) 유재철(兪載喆) (주) 대한민국장례문화원 대표 국가무형문화재 제111호 사직대제 이수자 (2013~)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장례지도사교육원 교육원장 동국대학교 대학원 장례문화학과 석사 동방대학원대학교 문화정보학과 (상・장례전공) 박사 논문 ‘한국 단체장(團體葬)에 관한 연구’ ‘한국 국가장(國家葬)에 관한 연구' 1994 장례토탈서비스회사 설립 2003 이경해 열사 세계 농민장 (올림픽공원 3만명) 2003 동국대학교이사장 학교장 /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 엠바밍 2005 (주) 대한민국 장례문화원 설립 2006 동국대학교대학원 장례문화학과, F.B.A.과정 강의 2006 최규하 대통령 국민장 2008 김형배 한진 부사장 회사장 / 2009 김건배 한진 고문 회사장 2009 노무현 대통령 국민장 2009 김대중 대통령 국장 2010 법정스님 다비진행 2013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장례지도사 강의. 전임교수 2015 이맹희 CJ 명예회장 그룹장 / 2016, 2017 1, 2주기 추모식 2015 김영삼 대통령 국가장 2017 대한민국 전통장례 명장 1호 2020~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장례지도사 과정 교육원장 현재 맞춤장례, 단체장 및 산소작업 등 진행
95년 역사, 국내 첫 민간 백운산장 3대에서 막 내리다
95년 역사, 국내 첫 민간 백운산장 3대에서 막 내리다
(사진:백운산장 보존대책위원회) 1924년 지어진 국내 첫 민간 산장, 백운산장이 우여곡절 끝에 2019년 12월로 95년 역사를 마감했다. 산악인은 물론이고 주말이면 서울 북한산을 찾았던 일반인들도 백운대에 오르려면 누구나 한 번쯤 막걸리 한 잔과 국수로 힘든 산행을 쉬어가게 해 주던 보금자리였다. 그러던 백운산장이 국립공단과의 오랜 소송 끝에 패소하고 현판을 내린 것이다. 공단 측은 향후 새 단장을 하고 백운대피소로 산악 안내와 특수산악구조대의 근무 공간으로 운영할 예정이다. 백운대와 인수봉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는 백운산장은 1924년 이해문씨가 작은 움막으로 시작한 것이 그 출발이었다. 그 후 이영구씨가 1946년 산장에 들어왔으며 2018년 3일 이영구씨가 87세를 일기로 별세하면서 이인덕씨가 이어 받았다. (사진:이승용) 백운산장이 공단과 소송이 시작된 것은 1992년 등산객 실화로 화재가 발생했고 1998년 기부채납(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 무상으로 재산을 증여하는 것)을 조건으로 국립공원관리공단으로부터 신축 허가를 받은 것에서부터 기인한다. 그 후 무상사용기간으로 정한 20년 경과 후 2017년이 되자 공단은 기부채납 이행을 요구했고 산장 측은 민간이 계속 운영하도록 산악인들의 유지 서명으로 맞서자 공단 측이 2017년 7월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법원이 2019년 5월 공단 승소 판결을 내리면서 2019년 12월 2일 민간인 산장의 역사는 막을 내린 것이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2014년 제 12회 소중한 문화유산상으로 북한산 백운산장을 선정한 바 있다. 그리고 백운산장을 사랑하는 산악인들은 서명을 통해 문화재로 남기자고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사진:백운산장 보존대책위원회) 백운산장에는 많은 이야기가 숨어있다. 백제시대 백운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는데 이 암자터에 이해문씨와 산악인들이 의기투합해 1933년 경성영림소의 묵인하에 지은 것이 역사의 시작이다. 그후 산악인들이 의기투합으로 4년간의 공사 끝에 1960년에 번듯한 백운산장(白雲山莊)으로 완공한다. 이렇게 30년을 지켜왔는데 불행하게도 화재사고를 당한다. 1992년 6월 등산객의 부주의로 화재가 발생해 산장지붕이 전소되었다. 이로 인해 한동안 지중에 천막을 치고 운영을 하게 된다. 그러다 지붕보수를 위해 공단 측과 합의를 통해 국립공단 국유지에 건축을 허기하는 조건을 20년 기부채납 약속을 하게 된다. 사실 백운산장은 국내 국립공원 내 유일한 민간산장이고 최초의 민간산장이어서 산악인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유지에 마음을 모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지난 1971년 11월 뉴스에도 보도된 인수봉 조난사고는 아직도 산악인들의 기억 속에 있다. 71년 11월 28일 일요일 많은 암벽등반인들이 올해의 마지막 암벽등반에 나섰다. 변덕스런 산 날씨는 오후 2시부터 갑자기 급강하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많은 바위꾼이 한꺼번에 하강을 하다 보니 일대 혼란이 일어 났고 급기야 자일이 강풍에 서로 엉키면서 참사가 예고되고 있었다. 인수봉아래 유일한 쉼터 백운산장지기였던 이영구씨는 인수봉 조난소식을 접하자 즉시 달려가 구조를 시작한다. 50여명에 이르는 조난객들은 강풍과 추위로부터 지키기 위해 불을 피고 뜨거운 물을 주고 구조 활동을 시작한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휴대폰이나 전화가 없어 조난 시 구조와 신고는 오로지 발로 해야 했기에 시간이 오래 걸릴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산장지기의 구조가 이루지는 시간 하산객이 파출소에 도착해 조난신고를 하면서 방송에 조난 사실이 알려지고 오후 9시경이 되어서야 구조대가 구조를 했건만 하강도중 자일이 엉켜 동사한 5명은 끝내 구조하지 못했다. 이처럼 산장지기는 늘 조난에 가장 최전선에 있을 수 밖에 없었다. 1984년 산악구조대가 결성되기 전까지 그는 언제나 백운대 인수종 조난의 든든한 파수꾼이었다. 1965년 4월 25일 백운산장에서 결혼식을 올린 이영구씨는 2018년 9월 3일 887새로 백운산장의 지키는 영원한 혼령이 되었고 민간인 백운산장의 현판은 201년 12월 2일 그렇게 내려졌다. (사진:백운산장 보존대책위원회, 고 이영구씨, 부인 김금자)
‘얼씨구’, ‘좋구나’ 경기도 파주 ‘헤이리’
‘얼씨구’, ‘좋구나’ 경기도 파주 ‘헤이리’
헤이리? 헤이里? 이름이 참 예쁘다. 예술인들의 거주 공간 및 문화 공간을 유명한 헤이리마을은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통일동산지구에 있다. 헤이리라는 이름은 무슨 뜻일까? 헤이리는 경기 파주 지역에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전래농요 '헤이리 소리'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헤이리 소리는 파주형 이듬매기 소리로 후반에 ‘헤(이)리’라는 어휘가 나오는 논매는 소리이다. 한강 이북에서 논을 매거나 회방아 때 부르는 메기고 받는 방식의 일노래 중에 홀호리류가 있다. 홀호리류는 받음구가 주로 입말로 엮어지는데 후반에 ‘호(로)리’, ‘훠러리’, ‘놀노리’, ‘허리’, ‘헤(이)리’ 등의 어휘가 붙는다. (헤이리소리:한국민속문학사전) “에헤 어이 헤이리 어허어 어허야, 에헤 어이 헤이리 어허어 어허야” '헤이리 소리'의 후렴구에서 유래된 것으로 '얼씨구', '좋구나' 등의 기쁨을 나타내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도 알려져 있다... 헤이리마을은 1997년부터 현재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는데 행정동명으로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이다. 초기에는 법흥 4리에 속했지만 지금은 법흥 6리도 독립되었다. ‘헤이리'라는 이름이 사용된 것은 1998년 10월부터라고 알려지고 있는데 이 전에는 '서화촌(書畵村)'으로 불렸다고 한다. 서화촌이라는 이름은 이 일대가 1991년 통일동산 개발촉진지구로 지정되어 땅의 용도를 구획하기 위한 이름으로 한국토지개발공사에서 붙인 이름이다. 헤이리는 마을 면적이 15만 평으로 매우 넓은 데 미술, 음악, 작가, 건축가 수 백 명의 예술인들이 회원으로 참여해 집과 작업실, 미술관, 박물관, 갤러리, 공연장 등 다양한 문화예술공간으로 보고 체험할 수 있는 주제도 많다. (헤이리 식물감각 풍경) 마을 건물들은 자연환경을 최대한 살려 설계해 건물을 감상하면서 시간을 보내도 된다. 단 모든 건축물이 개방하고 있지는 않다. 상당수가 일반 사무실이나 개인 주택이라는 점도 유의할 점이다. 이곳 마을은 생태친화적으로 많은 녹지 공간에 파주 자생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A~H구역까지 많은 건축물들이 있어 길을 잃기 쉬우니 지도를 미리 익히고 가는 게 좋다. . (헤이리 블로그) 동영상 재생 http://blog.naver.com/heyriart/401657424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