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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엔 추자도에 가자(2-하추자도)
가을엔 추자도에 가자(2-하추자도)
추자도4개의 유인도와 38개의 무인도가 모여 섬 제주 속의 섬이다~♡제주와는 또 다른 제주, 단 1도 제주스럽지 않은 섬. 반드시1박 이상을 해야만 아주 쬐끔 추자도를 알 수 있다는 거.1박2일로는 완전정복이 되질 않는다. 하지만 시간 관계상 늘 1박일수 밖에.몇 년 전 크리스마스 이브 때 들어가 풍랑특보로 4박5일이 되었던 건 차라리 행운이었지(학꽁치 낚시해 회 실컷 ㅋ) 마음 같아선 민박집 옆 길로 올라가면 일출을 제대로 볼수 있을테지만 아무도 일어나지 않고 관심이 없어해 숙소 앞 바당으로 내려가 햇님을 기다렸다. 몽돌과 파도 그리고 바람의 하모니.기온이 낮아 꾀나 쌀쌀 했지만 기분좋은 차가움이였단 7시30분삿갓조개(배말)죽을 먹고8시30분에 숙소에서 가볍게 출발 민박집 사장님 자가용인 트럭을 타고 대왕산에 올라갔다가을이 내려와 바위에 붙었다ㅋ와... 이 곳 또한 절경이었다.번외코스이니 다음에 꼭 내려가 걷기로 하고. 이렇게 짧은 시간에 모델놀이도 하면서~ㅎㅎ추가로 제주 올레코스가 될 거라는데...길 닦기가 한창임. 트럭 자가용으로 이동해 다음으론 여길...방파제 끝에 가면 커피를 파는 여자가 있다더니... 요정의 마법에 걸려 저기 저 바다위에 사자바위로 굳어버린 바다왕자...인간세상의 인연을 잃고 바위섬이 된 왕자의 저주를 풀수 있는 방법은 과연 뭘까?ㅎㅎ 왜 난 이 요정을 보는 순간 셀위댄스~~~가 떠오른겨?ㅎ재밌는 발상이였고... 사자 바위에 왕관을 씌워주었다 주술을 풀 수 없음에~ㅎ그냥 왕자님은 한라산 뷰를 한층 빛낼 사자바위로 그대로 있게...ㅎㅎ 이렇게...남아주...왕자님~♡ 아름답지만 요정의 가시는 왕자님을 콕콕콕 찌른겨?ㅎ그냥 갈수 없잖아 예의없이~ㅋㅋㅋ우린 또 이렇게 느림보쟁이들만 맨 꼴찌가 되었단. 방파제부터 걸어서 모진이해변으로 이동했다.그.런.데.이게 왠 행운이래?한라산이 선명하게 보였지. 오마이갓!!몇 년째 왔지만 이렇게 한라산이 보이는 건 처음이었단. 그러나우리들이 걷던 바닷가로 걷기 중에 만난 처절한 삶이 있더란(사진 찍는 것도 조심스럽던 소소한 즐거움은 곳곳에 있었고.석화(石花)가 정말 많이 피어있던보물창고 바당...ㅎㅎ카사노바가 좋아 했다는 바다의 우유인 석화를 돌로 깨서 맛보니 짭쪼름하고 고소했다 끝맛이.그리고 소금… 또한 짰지만 뒷맛이 달던.소확행은 이런 게 아닐까? 바다 달팽이 군소가 어찌나 많던지.이건 보여주기 위해서 미안하지만 살짝 건드러봤단.먹물처럼 보랏빛을 쏴서 모두들 놀라워했지~ㅎㅎ 윤슬그리고사자바위그 너머로 길게 누운 제주 본섬 흠뻑 취하라춤춰라 추자야 억새도 춤추니 덩달아 우리들도 얼쑤~ㅎㅎㅎ 기정길을 걷다다시 김병만도 웃고갈 정글의 법칙을 찍고도착한 황경한의 묘 공사중이더니 완공을 해 요즘 순례길이 되었단다. 잠시 기도를 올리고 추자십경과연 1박2일에 가능하겠니?아니 아니지... 수월봉 근처에 녹고의 눈물이 있다면(설화)추자도엔 실화인 정난주 마리아의 아들 황경한의 눈물이 아직도 똑, 똑, 똑흐른다... 네발로 기고 또 기어눈물의 십자가 그 아래 아기 황경한을 만났다.예전에 처음 왔을 땐 모두들 눈물을 왈칵 쏟으며 각자의 방식대로 기도를 했었는데 다시 봐도 뭉클~ㅠㅠ 이렇게 풍경좋은 곳에 있으니 그 슬픔은 거두고 기쁨이 되길 기도했다. 세상에...아무리 보고 또 봐도 신기하기만 했던 본섬인한라산 우린 너나 할것 없이날씨요정 서로에게 칭찬하며 예초리 기정길을 걷는다. 내가 참 좋아라하는 예초리 기정길~♡ 이렇게짧게 추자도 구석구석 걷기를 마무리해야 했다. 다시어느 멋진 봄날춘자도?를 만나러 가련다 그땐하추자도 완전정복하러...날씨만 도와 준다면 캠핑으로.
한국의 전통시장 (8) 상주곶감 장
한국의 전통시장 (8) 상주곶감 장
경상북도 상주지역은 조선시대부터 낙동강의 수운으로 상업활동이 활발했던 곳이나 현재 5일장의 쇠퇴 속에서 곶감장만이 상주장의 명맥을 잇고 있다. 낙동강 상류가 흐르는 상주는 옛부터 '삼백(三白)'이라 하여 쌀, 누에고치, 곶감이 유명한데 특히 한서차(寒暑差)가 심한 지역적 특성 덕분에 감의 당도가 높아 집집마다 감나무를 재배하여 곶감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산물이 되었다. 상주는 곶감의 본향으로서 상주에서도 화북면, 화서면, 모동면, 모서면, 내서면은 200년 이상의 둥시 감의 생산량이 많으며 연시로 팔리기도 하지만 대부분 곶감으로 만들어져 팔린다. 감이 익어 단맛이 드는 10월경에는 온 마을이 감을 깎아 한 달간 햇볕에 건조시켜 곶감을 만든다. 장날이 따로 없을 정도로 매일 서는 곶감장에는 12개의 도매상들이 한 곳에 밀집되어 있으며 명절 때에는 곶감을 사려는 상인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우리나라에서 감이 언제부터 재배되었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고려인종(1138년)때 ‘고욤나무’(열매의 모양이 대추를 닮은 고욤이라고 하는 열매가 열리며 감나무의 접붙이기용 나무로 쓰인다, 아래 사진) 에 대한 기록이 있고 고려원종(1284-1354년)때 농상집요에 감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우리나라에서 감나무 재배가 시작된 것은 고려시대 때라고 추정할 수 있다. 상주둥시(‘둥枾’로 둥글다에서 둥과 감나무의 한자어 ‘柿’의 합성어로 과실이 둥근 데서 유래된 이름) 재배는 상주시 외남면 소은리 750년생 감나무의 수령 등으로 보아 상주에서 약 1,000년 전부터 재배되어 온 것 추측된다. 상주는 토지가 비옥하고 배수가 양호하며 기후가 온화해 떫은감 재배의 최적지이다. 상주장의 곶감골목은 전국 최대규의 곶감상가인데 도매상회인 ‘도가’가 10여 개나 몰려있고 도가마다 도매상인들이 소속돼 있어 전문적으로 감 거래를 한다. 상인들 중에는 대를 이어하는 상인도 있고 대부분 단골거래가 주를 이룬다. 한편 예종실록 2권 즉위년(1468년) 11월 13일 기사 편에 임금님 진상을 상주에서 나누어 정하였다(今也乾柿之貢, 分於尙州)라는 기록으로 상주곶감의 최고의 우수성을 확인할 수 있다. 세종실록 150권 지리지 경상도편에는 상주 지역의 주요 공물로 곶감(乾柿)이 있다는 기록도 있다. 상주곶감은 매년 4,500여 가구에서 10,000톤 정도를 생산하고 있으며 연 매출 3,000억에 이르는 매출을 올리고 있다. 또한 전국 곶감시장의 60%를 차지하고 있는 곶감의 본향으로 상주 전통 곶감 농업은 국가중요농업유산 제15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상주곶감공원(감락원)을 조성돼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곶감’ 창작 동화의 이야기를 주 테마로 하여 지상 3층의 전시체험관과 곶감에 대한 다양한 스토리가 있는 야외 휴식공원으로 있다.
 제주에 가면 꼭 봐야 하는 몰입형 미디어아트, 빈센트 반 고흐전 '별이 빛나는 밤'
제주에 가면 꼭 봐야 하는 몰입형 미디어아트, 빈센트 반 고흐전 '별이 빛나는 밤'
지금 제주 성산에서는 빈센트 반 고흐전 '별의 빛나는 밤'이 열리고 있는데 이름도 생소한 ‘프랑스 몰입형 미디어아트’ 전시라고 한다. 지난 제주 여행 중 도민 친구가 꼭 보라는 권유로 별 생각없이 갔다가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도 미리 내용을 알고 보았으면 좀 더 몰입했을거란 아쉬움에 감상할 분들에게는 사전 지식을, 본 분들은 리뷰를 통해 그 날의 감동을 나누었으면 하는 생각 때문이다. 원래 전시 일정은 올해 작년 10월 25일까지였으나 반응이 뜨거워 오는 2021년 2월 28일(일)까지 연장 전시한다. 전시가 열리는 ‘빛의 벙커’라는 공간도 흥미로웠다. 빛의 벙커는 제주 서귀포 성산에 옛 국가기간 통신시설(한•일 해저 광케이블 통신망을 운영하기 위해 설치된 시설)이었는데 오랜 기간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비밀 공간이었다. 축구장 절반 정도 크기의 대형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을 오름 안에 건설해 흙과 나무로 덮어 산자락처럼 보이도록 위장했고 군인들이 보초로 서서 출입을 통제하던 구역이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예전 제주 올레 2코스를 걸을 때 옛날 봉수대가 있던 큰물뫼오름(대수산봉)이 2코스가 통과하는 곳이었다.(빛의 벙커와 올레길이 교차하는 곳으로 올레길을 걷다가 관람해도 좋을 듯 했다) 이런 목적으로 설계된 벙커의 특성은 프랑스 몰입형 미디어아트를 구현하는 전시공간으로는 최적의 공간이다. 외부의 빛과 소리가 완전히 차단된 내부 공간은 방음효과가 완벽하고 미로와 같은 진입은 관람객들에게 최고의 몰입감을 느낄 수 있다. 지난 2018년 개관 기념으로 클림트전을 열어 5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을 기록했고 이번이 그 두 번째 전시인데 이 역시 50만 관객를 넘을 것 같다. 이번 전시는 우리 국민들이 가장 사랑한다는 태양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의 37년 생애, 800점 이상의 회화와 1,000여 점의 드로잉 작품 그리고 고흐가 존경했던 2개월간의 동거인이자 운명의 애증관계로 강력한 영향을 주고받았던 고갱의 세계 최초로 공개되는 명작들로 구성되었다. 반 고흐의 강렬한 삶의 여정 '별의 빛나는 밤’을 32분간, 폴 고갱의 명작들 '섬의 부름’이 10분간 미디어아트로 상영된다. 빛의 벙커에 들어서면 90여 대의 빔 프로젝터에서 쏟아내는 고흐 특유의 풍부한 색채와 붓질까지 동영상의 압도적 시각적 몰입은 몰론 고성능 스피커가 서라운드로 뿜어내는 귀에 익숙한 명곡들이 청각까지 사로잡아 오감을 흠뻑 적시기에 충분하다. 몰입형 미디어아트가 무엇인지 진수를 체험하는 순간이다. 어두운 벙커 벽면과 바닥 전체에 흩뿌려지는 명작 황홀경에 온 몸을 감싸는 명곡에 온통 젖어 전시장 곳곳을 여유롭게 돌아 다니며 작품을 터치할 수도 있고 때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살아 움직이는 듯한 명작들을 즐길 수도 있다. ‘빛의 벙커’, ‘고흐와 고갱의 명작들’ 그리고 ‘내’가 삼위 몰아일체가 되는 듯한 감동에 50여분 간 넋을 잃고 즐기게 된다. 프랑스 Culturespaces사의 새로운 장르의 전시회, ‘CULTURESPACES DIGITAL®’ 시스템을 통해 재 탄생된 반 고흐의 위대한 걸작들, 고갱의 명작들이 빛의 벙커 벽과 바닥 입체적으로 정신없이 휘몰아친다. 이 미디어아트의 주인공은 분명 빈센트 반 고흐이다. 하지만 그가 존경했고 애증의 동료였던 폴 고갱도 반 고흐전을 빛나게 하는 훌륭한 조연 역할을 한다. 고흐(1853년 3월 30일~1890년 7월 29일)에게 있어 고갱(1848년 6월 7일~1903년 5월 8일)은 서른일곱 고흐의 짧은 생애 있어 매우 굵고 중요한 한 획을 그리고 떠나간다. 나이가 다섯 살이나 더 많은 고갱을 고흐는 좋아하는 정도를 넘어 존경하고 흠모하기까지도 했다. 그런 고갱을 고흐와 한 집에서 함께하게 만들어 준 사람은 바로 고흐의 동생 테호였다. 아를의 노란 집에서 화가들의 공동체를 꿈꾸었던 고흐에게 테호는 그 당시 예술가들은 누구나 그러했듯이 늘 돈 때문에 시달리던 고갱에게 생활비를 대주며 함께하게 했다. 고갱 입장에서도 테호의 제안이 나쁠 게 없었기에 받아들였다. 고갱이 온다는 소식에 함께할 기쁨으로 그를 기다리며 그린 작품이 ‘해바라기’와 ‘아를의 침실’이다. 1888년 10월 23일 고갱이 반 고흐를 처음 만나러 아를에 왔을 때 그가 그린 해바라기를 보고 그의 천재성에 감탄했다고 한다. 이토록 고갱을 원했것만 고흐와 고갱의 동거생활은 불과 두 달이라는 짧은 시간으로 파탄이 난다. 고흐와 고갱은 미술적 취향도, 기질도, 그 밖에도 추구하는 바도 다 달랐다. 어찌 보면 처음부터 같이 하지 말아야 할 존재들이었는지도 모른다. 음울하고 이성적이지 못했던 고흐, 자기중심적이고 이성적이었던 고갱은 그럼에도 60일간 동안 서로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정을 나누었다. 하지만 서로에게 초상화를 그려주기로 하고 고갱이 고흐를 술에 취한 것 같은 모습으로 그린 자화상은 모독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 그들의 갈등은 더욱 심해졌고 불화는 극에 달한다. 예술적 우정은 증오로 바뀌고 날로 논쟁은 심해져 급기야 고흐가 왼쪽 귀를 자른 광기어린 행동을 한 후에는 둘은 한 번도 다시 만나지 못했다. 둘이 함께한 시간은 어쩜 운명적 만남이었고 그들 삶에 있어서 상극인 걸 말면서도 서로의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훗날 고갱의 작품에서 고흐의 영향을 받은 듯한 노란색도 작품에 들어있었으며 둘이 함께할 때 명작이 많이 탄생했다고 한다. 고흐의 자살소식을 동생 테오에게 전해 들은 고갱은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그는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예술가였고 그의 그림 속에서 그의 눈과 마음을 볼 것"이라며 고갱을 무시하는 듯 했지만 속 마음은 그렇지 않았음을 보여준다.(냉철한 고갱의 솔직환 표현이다) 미디어아트 전의 총괄 디렉터, 지안프랑코 이안누치(Gianfranco Iannuzzi)는 “반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The Potato Eaters, 1885), 별이 빛나는 밤(Starry Night, 1889), 해바라기(Sunflowers, 1888)에서부터 아를의 반 고흐의 방(The Bedroom at Arles, 1889)에 이르기까지 격변을 거친 반 고흐의 다양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대담한 색의 사용으로 그림에 독창성을 더한 반 고흐의 표현력과 강렬한 붓 터치를 벙커 벽면과 바닥을 통해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빛의 벙커의 이번 몰입형 전시에서는 반 고흐의 감성적이고 혼란에 가득 찬 시적인 내면세계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빛과 그림자의 끊임없는 소용돌이를 감상할 수 있다”고 가이드 한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컬러리스트, 태양의 화가, 37년의 짧은 생애, 의문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 편의 대 서사시인 이 미디어아트는 고흐의 ①뉘넨(Neunen, 1885년 이전), ②아를(Arles, 1886~1888), ③파리(Paris, 1888년 2월~1889년 5월), ④생레미 드 프로방스(Saint Rémy de Provence, 1889년 5월~1890년 5월), ⑤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sur-Oise, 1890년 5월~7월)시절 등으로 주제별 여정을 따라간다. 고흐의 초기 작품에서부터 전성기에 완성된 작품까지, 그리고 풍경화와 야경에서부터 자화상과 정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반 고흐의 모든 것을 접할 수 있다. 제니스 죠플린의 코즈믹 블루스 밴드 음악이 흐르면서 초기시절들 작품이 보여진다. 평소 고흐가 따르고 싶었던 밀레의 작품들이 오마주 된 듯한 ‘씨뿌리는 사람’, ‘땀 흘리는 농부’, ‘일출 아래 수확하는 농부’ 등이 보여지는데 이런 작품들은 평소 고흐의 순례자의 삶의 단면들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어두운 램프 아래 회색조의 '감자먹는 사람들'이 그리그의 페르귄트 조곡 중 솔베이지의 노래가 무겁게 깔리면서 나타난다. 고흐는 스스로가 이 작품이 첫 번째 작품이라고 할 정도로 애정을 가졌다. 목사이던 아버지가 뉘넨에 정착해 힘들게 살던 시절 농부들에서 느낀 동질감의 표현이라고 한다. 그 힘든 시절을 그린 그림들로는 ‘베를 짜는 직조공’, ‘난로 옆의 농부’들이 있다. 스메타나 교향시 나의 조국 중 몰다우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 유명한, 걍렬한 노란색채의 ‘해바라기’가 화면에 나타난다. 앞서 설명했듯 이 작품은 애증의 동료 고갱을 맞이하기 위한 그림이었다. 고흐가 태양의 화가로 불리게 하는 해바라기는 고흐의 상징색된 강한 크롬 옐로를 썼는데 이후에도 적어도 시리즈로 열한 점 이상의 해바라기를 그린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시베리아의 금광에서 발견된 진홍색 수정 홍연석에서 추출되는 크롬 옐로는 시간이 흐를수록 갈색으로 변하는 단점이 있어 오늘날의 작품은 당시의 강렬한 본래의 색이 아니다. 그러나 미디어아트에서는 고흐의 노란색채를 해석해 재현해 표현헀다고 한다. 19세기 가장 번성했던 예술촌, 파리 북부의 몽마르뜨(Montmartre) 언덕에서의 고흐 작품들이 푸치니 토스카 중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선율로 보여진다. 피카소, 모딜리아니 등이 활동하던 몽마르뜨 클리치가의 아파트에서 살면서 그리기 시작한 몽마르뜨 풍경화 시리즈 속에는 몽마르뜨의 길, 언덕, 풍차, 채석장 등이 있다. 고흐는 처음에는 어두운 회색의 풍경화를 그렸고 1886년 가을부터 점차 밝아지기 시작하더니 1887년에는 더욱 밝아졌다. 아를에서의 고흐는 희로애락이 집대성되는 시기였다. 노란집에 고갱이 들어오면서 환희도 잠시, 고갱이 그려 준 약에 취한 사람처럼 그린 초상화로 충격을 받았으며 쇠락하고 기괴하게 변해 가는 고흐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림으로 자신을 모욕하는 고갱과의 불화는 깊어간다. 결국에는 귀까지 절단하며 둘은 파멸되고 애증의 관계로 종결된다. 마일즈 데이비스의 사형대의 엘리베이터라는 끈적한 째즈 선율을 배경으로 ‘밤의 카페 테라스’, ‘아를의 밤의 카페’, ‘고흐의 방’ 등이 보여진다. 이 14개월 동안 200여 점을 그린 고흐의 예술혼이 뿜어지는 전성기였다. 또 하나의 대표작 ‘별이 빛나는 밤’ (뉴욕 현대미술관 MOMA 소장)과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파리 오르세미술관 Musée d'Orsay 소장)이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이 울려 펴지는 가운데 화면을 채운다. 밤하늘은 별빛으로 요동치고 땅에서는 사이프러스나무가 마치 불꽃처럼 소용돌이치는 별이 빛나는 밤은 고흐가 1889년 정신병원에서 나와 기억을(고통을) 떠올려 그렸다.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은 '별이 빛나는 밤'을 그리게 영감을 준 작품으로 미디어아트에서는 별빛에 반짝이는 강 물결을 영상으로 재현해 멋지게 보여준다. 고흐가 생레미병원에서 그린 여러 소나무 그림도 화면에 등장한다. 고흐의 분방함과 자기만의 색채로 소나무를 그렸으며 올리브나무 그림도 14점이나 그렸다. 고흐는 자연 속 나무를 보면 감정과 표정이 보인다고 말할 정도로 자연과 교감해 나무를 그린 그림이 많다. 도나시모의 Don't Let Me Be Misunderstood가 배경음악으로 흐르는 가운데 고흐가 입원했던 프랑스 남부 도시 생 레미 드 프로방스(Saint Remy de Provence) 생 폴 무솔 정신병원의 복도, 자화상 등이 나타난다. 이 때가 고흐에게는 가장 힘든 시기로 귀 절단 사건 등 정신적 충격과 우울증에 빠져 자발적 정신병원에 1년여 투병 기간을 갖는다. 정말 좋아했고 존경했던 고갱과의 불화가 큰 원인이었는데 그는 투병 생활 중에도 붓을 놓지 않았는데 고흐에게 그림은 치유였다. 이제 고흐전의 37세 마지막 대미를 장식할 오베르시의 작품 ‘오베르의 평원’이 브람스 피아노협주곡 2번과 함께 화면 가득 흐른다. 정신병원에서 나온 후 그는 오베르시 오하즈에 입성해 다시 열정적으로 작업을 한다. ‘오하즈의 교회’, ‘오베르의 계단’ 등 말년기의 작품들이 보여지며 까마귀떼가 밀밭 가득 날아드는 ‘까마귀가 나는 밀밭’ 그림으로 미디어아트 고흐전은 끝이 난다. 설에 의하면 고흐는 이 밀밭에서 슬픔과 고독을 모두 안고 권총으로 자살했다고 한다. 다른 미디어아트 폴 고갱의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는 안개가 자욱한 깊은 밤, 낯설고 웅장한 열대 숲에서 여인네들의 얼굴이 드러나면서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 잡는다. 고갱의 고향인 브르타뉴(Brittany)로의 회상에서 시골풍경과 마을 사람들, 여성 농민들이 계절의 변화에 맞춰 등장하고 그들은 고갱의 그림 속을 거닐며 작가의 기억에 리듬을 타고 모였다가 흩어진다. 고갱의 걸작들은 고갱의 자화상으로 10여 분간의 영상은 끝이 난다. 이번 미디어아트는 음악과 미술을 모르는 관람객들에게도 독특한 예술적 경험을 느끼게 하고 몰입감을 가질 수 있다. 또한 어디선가 한 번은 본듯한 고흐, 고갱의 명작들과 유명 음악가들의 명곡이 어우러지는 시청각으로 50여 분간을 편안하게 감상할 수도 있다. 2월 28일까지 서귀포 성산 빛의 벙커에서 열리는 ‘고흐와 고갱 명작들의 대 서사시’ 향연을 놓치면 분명 후회할 것이다. 꼭 한 번 다녀오시라고 권하고 싶다.(글:단무원심)
송구영신 (送舊迎新), 이 또한 지나가리라
송구영신 (送舊迎新), 이 또한 지나가리라
(사진:유튜브) 2020 : 누가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줄까...2021 : 그리고 어서 빨리 한해가 지나갔으면... 흑사병이 창궐했던 14세기의 유럽에서는 약 2,500만 명이 이 전염병으로 사망한다. 이 흑사병(페스트)은 수백 년 동안 수십 번 발병 되었는데 어느 학자는 흑사병으로 사망한 사람들을 모두 더하면 2억 명은 족히 될 거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흑사병은 유럽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한국에서도 유행했었다. 1930년대 유럽에서 유행했던 ’스페인 독감‘의 사망자는 5,000만 명이 이르렸다고 한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의 사망자수는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학자나 조사기관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약 4,000~ 6,000만 명 정도로 파악된다. 2020년 한해를 쑥대밭으로 만든 코로나19의 사망자를 과거의 전염병 사망자수와 비교하는 것은 잔인하지만 12월 30일 밤 기준으로 약 170만 명 이 사망했고 미국의 경우는 누적 사망자수는 약 35만 명, 하루 평균 사망자 수 약1,000 명 정도다. 100세 수명을 꿈꾸는 현대의학의 기술 앞에서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한다는 것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들려온다. 2001년으로 돌아가 본다. 미국 뉴욕에서 9.11 테러가 발생한다. 뉴스시간에 수십 번 반복해서 본 영상 그대로다. 모두 2,997명이 사망한 전대미문의 사건이었고 최근에 개봉된 영화 ’리플레이(American Fork)의 출발점이기도 한 바로 그 사건이다. 이 사건이 일어나고 며칠 동안 어떤 노래가 미국 전역의 라디오 방송을 통해 수도 없이 흘러나왔다. 이 노래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일주일쯤 지나 어느 청취자가 '이 음악은 제발 틀지 마세요' 라고 윤시내의 'DJ에게' 같은 사연을 전하자 모든 방송에서는 자율적으로 이 노래의 방송을 자제했고 한다. 이 노래를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 더 슬픔이 커졌기 때문이었다. 바로 Simon & Garfunkel이 부른 명곡 Bridge over troubled water, 의역해서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 이다. ‘폴 사이먼’과 ‘아트 가펑클’은 초등학교 같은 반 친구로 어린 시절부터 함께 노래를 불러왔다. 대표곡으로는 '더스틴 호프만'이 출연했던 영화 ‘졸업’의 The Sound of Silence와 Mrs. Robinson, 그리고 어느 무명 권투선수의 미국 동부 진출기인 The Boxer 그리고 Duncan, America, El Condor Pasa, I‘m a rock 등을 들 수 있는데 대부분의 노래는 가펑클에 비해 인물도 보잘 것 없고 키도 한참 작은 ’폴 사이먼‘에 의해 만들어 졌다. 특히 1981년 뉴욕 센트럴파크에서의 무료공연에는 약 50만 명의 관객이 운집했는데 역사상 1회 공연으로는 가장 많은 관객이 모인 공연으로 기록 되어 있다. 두 사람의 진정성이 이 무대를 만든 것은 아닐까? 이 멋쟁이 듀엣의 초창기 이름은 재미나게도 '톰과 제리'였다고 한다. 한때 대단한 인기를 얻었었던 3인조 보이밴드 'SG워너비'의 SG는 바로 그들이 닮고 싶어했던 사이먼 가펑클의 이니셜을 빌려온 것이고 또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슷한 듀엣을 찾으면 당연히 송창식과 윤형주다. 두 팀의 공통점은 각자 서로 튀지 않고 환상의 하모니를 위해 ‘양보의 미덕’을 잘 살렸다는데 있다. 이 노래는 예전의 고전적인 포크뮤직과는 차이가 있는 음악이다. 사이먼은 사실 ‘비틀즈’나 ‘밥 딜런’과 비슷한 연배인데 리듬위주의 파퓰러한 음악들은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즈'의 전유물이 되어 버렸고 메시지 중심의 대중 음악은 '밥 딜런'의 벽을 넘기 힘들었다. 바로 그때 이데올로기에 지쳐있는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한 줄기 빛을 선물한다. 나만이 사는 세상이 아니라 함께 사는 세상이라고… 당신이 지치고 스스로 초라하다고 느낄 때당신의 눈에 눈물이 고일 때 내가 그 눈물을 말려 줄게.마치 거친 풍랑 속에서도 버텨내는 다리처럼내 몸을 눕혀 세상 풍파위에 놓인 다리가 될게.네가 잘 살지 못하고 거리를 방황하고견디기 어려운 그런 저녁이 찾아온다면.내가 위로해 줄게. 그리고 너의 편이 되어 줄게. '사이몬'은 이 곡을 목소리가 좀 더 높게 올라가는 초딩친구 '가펑클'의 음높이 에 맞춰 작곡을 했다. 그래서 노래는 '가펑클' 위주로 부르게 되었는데 이 노래가 대박이 나자 '사이몬'은 배가 많이 아팠다고 한다. 그래서 한동안은 4~8소절씩 나눠 부르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노래를 불러 줄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노래가 상처받은 자들에게 위로가 된다면 그것은 가수로서 가장 행복한 삶의 한 순간이 될 것이다. 코로나19로 상처받은 세상. 우리에게는 누가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줄까? 한 해를 보내도 또 새해를 맞이한다. 그런데 올해는 어서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내년이라고 특별히 달라질 것도 없겠지만... 험프리 보가트와 잉그리드 버그만이 출연했던 추억의 명화 ’카사블랑카‘에서 들려오는 감미로운 음악 ’As time goes by‘(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노래를 들으며 세월을 보내면 참 좋긴 할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꼭 기억해야 한다.키스는 여전히 키스이다. 한숨은 여전히 한숨이다.그리고 두 연인이 구애를 할 때그들은 여전히 "사랑해"라고 말한다.그리고 당신은 의지할 수 있다.미래가 어떻게 되든지 간에... 그리고 ’이 또한 지나가리라‘... This too shall pass away. 유대인들이 솔로몬 왕의 우화(탈무드) 에서 인용되면서 널리 알려진 문구로서 중세시대의 어느 시인이 영어로 번역해서 더욱 유명해졌다고 한다. 다윗왕이 세공기술자를 불러 “날 위해 아름다운 반지를 하나 만들되, 내가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환호할 때 교만하지 않게 하고, 내가 큰 절망에 빠져 낙심할 때 결코 좌절 하지 않고, 스스로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는 글귀를 반지에 새겨 넣으라” 라고 명했다. (사진:엔조) 이에 세공기술자는 아름다운 반지를 만들었지만 정작 거기에 새길 글귀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고민 끝에 지혜로운 솔로몬 왕자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이 때 왕자 솔로몬이 세공인에게 일러준 글귀가... “이 또한 지나가리라”(This too shall pass away) 라고 한다. GOOD BYE 2020! WELCOME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