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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문시장(2) 인천 소래포구 젓갈시장
한국의 전문시장(2) 인천 소래포구 젓갈시장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에 있는 강경 젓갈시장, 충청남도 홍성군 광천읍 옹암포에 있는 광천 젓갈시장,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에 있는 곰소 젓갈시장과 함께 인천광역시 남동구 논현동 소래포구에 있는 소래포구 젓갈시장은 국내 4대 젓갈시장으로 유명하다. 그 중 소래포구 젓갈시장은 수도권을 대표하는 젓갈시장이다. 이곳에서는 1년 내내 젓갈을 구할 수 있으며 특히 김장철이 되면 더욱 많은 젓갈이 나와 서울, 인천 등 수도권 일대 사람들로 활기를 띤다. 소래의 수협 위탁판매장 주변 일대에는 젓갈가게들이 밀집되어 있어 오젓, 육젓, 추젓 등의 새우젓과 명란젓, 창란젓, 오징어젓 등 대부분의 젓갈류를 판매하고 있다. 특히 소래의 젓갈시장을 대표하는 것은 새우젓으로 숙성된 새우젓은 물론이고 배에서 바로 잡아 내린 새우에 소금을 한 웅큼씩 뿌려주는 생새우젓도 큰 인기가 있다. 서해안 일대에서 잡힌 새우는 바로 젓갈로 담아 토굴 속에 저장되는데 대부분은 충남의 광천 독배마을에서, 나머지는 인근의 부평, 안산 등의 토굴에서 여름을 보내고 김장철에 다시 이곳으로 운반된다. 소래는 이러한 젓갈 외에도 길가에 늘어선 횟집, 튀김집, 그리고 꽃게•바닷가재•산낙지 등 각종 해물들을 파는 상점과 장꾼들로 분주하다. 소래포구는 오랫동안 황량하고 한적한 어촌이었으나 1933년 염전이 생기면서 소금이 생산되자 일제는 소금을 얻기 위해 수원과 인천을 잇는 폭이 좁은 협궤열차를 부설해 소래역을 만들면서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북에서 내려온 월남민들이 정착하면서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이들은 작은 배로 새우를 비롯한 수산물을 잡아 수인선을 타고 인천이나 수원 등지에서 새우젓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다가 내항이 건설되면서 새우잡이 배들이 소래포구로 몰려들면서 더욱 번성했다. 1970년대에는 새우 파시가 형성되면서 수인선을 타고 수원과 인천에서 관광객들이 찾기 시작하면서 수도권의 대표 어시장이 되었다. 2011년 기존의 소래어시장 주변에 소래포구 종합어시장이 새로운 건물을 짓고 주차시설 등을 완비하고 재개장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소래(蘇萊)라는 말의 유래는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이 군대를 이끌고 출발한 곳이 내주(萊州)였고 그들이 도착한 곳이 지금의 소래포구였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소정방의 성과 내주에서 한 글자씩 따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한 가지이고 또 소래포구 지역의 냇가에 예부터 소나무 숲이 울창했기 때문에 솔내(松川)라고 불리다가 발음이 소래로 변했다는 설도 있다. 소래포구에서 많이 잡혔던 해산물은 꽃게와 주꾸미, 전어, 광어, 놀래기, 새우, 소라, 어패류 등이있지만 주변의 공업단지가 들어서고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서는 등 수질 오염이 심해지면서 해산물은 과거처럼 소래 앞바다에서 잡은 것이 아니라 양식이나 수입한 것으로 바뀌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소래어시장은 젓갈과 어패류, 건어물류를 주로 파는 어시장으로 변모했다. 1990년대부터 소래어시장은 수도권의 젓갈시장으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래어시장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전통의 새우젓이다. 한편 2012년 6월 30일에 과거 수인선을 따라 송도와 오이도 사이에 전철이 개통되었다. 2016년 3월부터는 수원까지 전철로 연결되면서 과거 수인선이 완전히 복원되어 소래포구 접근이 더욱 용이해졌다.
(남파랑길 4)걷는 내내 눈이 행복한 서부산 절경 바닷길
(남파랑길 4)걷는 내내 눈이 행복한 서부산 절경 바닷길
오늘은 남파랑길 90개 구간 중 ①영화와 한류의 도시, 대도시와 자연의 반전 매력을 보유한 ‘한류길’(부산∼경남 창원)의 4구간을 걷는다. 코스: 감천사거리~물운대~다대포해수욕장~아미산 전망대~부네치아 장림포구~신평사거리 걷는 날: 2020년 2월 2일, 일요일 맑음, 바람 햇살 좋음거리: 24Km, 난이도 중. 60%포장도로 시간: 아침 8시 출발, 14시 50분 도착. 어제와 동일한 아침으로 게스트 하우스에서 해결하고 부산역에서 67번 버스를 타고 감천사거리로 왔다. 버스타는 시간은 30분 정도 소요. 부산구간 겯기는 눈이 즐거운 걷기 여행이다.아름다운 바다와 사람의 사는 향기 가득한 곳이기도 하고 자연에 오랜 시간 지켜온 박물관 같기도 하다. 감천 사거리를 출발 하면 1시간 정도 공단을 지난다.길은 아스팔트길이다. 그래도 행복하다.이런 열심히 사는 대한민국에 뿌리가 튼튼하다는 자부심도 느낀다. 다대포 항구에 도착하니 항구에 진한 향기가 좋다.사람에 사는 모습에 활기가 있다.그런데 공통적으로 느끼는 모습이 하나 있다.젊은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다. 바다 일이 힘들어서 젊은 사람이 없다고 한다.배를 타기 위해서는 젊음이 필요한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물운대에 왔다. 작은 숲으로 이루어진 멋진 산책로다. 몰운대(沒雲臺)는 원래 섬이었다. '몰운도(沒雲島)'라고 불렸다고 하는데 낙동강 하구의 모래톱이 확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육지와 연결됐다. 낙동정맥 종주 시 1300리 낙동강의 동쪽 큰 산줄기를 잇는 마지막 구간 종착점이기도 하다. 기회가 되면 낙동정맥도 도전하고 싶다. 몰운대가 아직도 섬이었다면 낙동정맥의 마지막은 아미산(234.1m)이었을 것이다. 아미산과 몰운대는 다대포 해수욕장 서쪽 가덕도 연대봉 너머로 떨어지는 부산 최고의 낙조 감상 포인트이다. 몰운대(혹자는 침운대라고 부르기도 했다) 전망대 주변 풍광은 그야말로 비경이다. 먼 바다의 크고 작은 섬들이 해무에 휩싸인 채 모습을 보였다 숨었다 하여, 몰운대-구름 속에 빠져 보이지 않는 섬-라는 이야기가 상상이 되는 명장면이다. 다대포 해수욕장에서 아미산 전망대로 오르는 길에 보이는 낙동강 하구 모래톱과 남해 바다, 그리고 가덕도 연대봉의 풍광이 압권이다. 나중에 다시 와보고 싶은 좋은 산책로를 빠져나오면 말로만 듣던 다대포 해수욕장이다.넓고 풍경이 너무 멋지고 평화로운 바다이야기다. 다대포(多大浦)는 ’크고 넓은 포구’라는 말이다. 부산의 대표적 해수욕장들인 해운대해수욕장, 광안리해수욕장, 송정해수욕장, 송도해수욕장 등과 다르게 동해안처럼 백사장이 상당히 넓고 서해안처럼 갯벌에 소라와 게도 많이 살고 있다. 그러나 낙동강 하구 둑이 생기면서 수질은 갈수록 나빠졌고 과거 해수욕장으로서의 명성은 이미 잃었다. 최근에는 물놀이보다 다대포 꿈의 낙조분수, 일몰, 수변공원 산책, 사진촬영, 몰운대 트레킹이 더 유명한 곳이다. 다대포 해수욕장과 습지를 지나면 지옥(?)의 아미산 올라가는 계단이 펼쳐진다. 다리가 풀리는 것 같다. 두 다리에 힘을 주고 계단을 오른다. 다대포 해수욕장에서 아미산 전망대로 오르는 길에 보이는 낙동강 하구 모래톱과 남해 바다, 그리고 가덕도 연대봉의 풍광이 압권이다. 아래로 대선조선 모습도 보인다. 바다를 보고 눈을 돌리니 아파트 숲이다. 한참을 지나야 아미산 둘레길을 간다. 아미산 둘레길도 평온한 산책하기 좋은 나지막한 둘레길 참 좋다. 숲에 들어오면 마음이 안정이 되고 몸이 가벼워 진다. 한 시간 정도 걷고 나면 다시 바닷가. 이탈리아 베네치아를 닮은 부산 사하구 장림포구가 ‘부네치아’로 불린다. 어촌 특유의 분위기를 풍기는 선박들과 형형색색의 건물들이 꼭 베네치아 부라노섬과 닮았다. (사진 자료: 부산 사하구청) 부네치아, 장림포구의 일몰이 장관인데 못 보고 지나는 게 아쉽다. 부네치아 선셋 전망대에 오르면 낙동강과 을숙도, 장림포구가 한눈에 들어온다. 걷는 내내 눈이 호강을 했다. 을숙도 하구 뚝 신평역 근처에서 4구간 여정을 마무리한다.
한국의 전문시장(1) 강화 화문석시장
한국의 전문시장(1) 강화 화문석시장
'장(場)' 또는 '저자'라고도 불리는 시장은 우리 생활에 필요한 온갖 물품과 이와 관련된 정보들이 함께 교류되는 곳이다. 또한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친척•이웃주민들과 정을 나누는 만남의 장소이자 혼담이 오가고 여론이 형성되는 대중집회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더구나 지금처럼 7일을 일주일로 여기지 않았던 전통사회에서는 장날이 사람들의 휴일이고 씨름판•놀이판까지 어우러진 자연스런 축제날이기도 했다.. 한국의 전문시장은 일정한 품목만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시장이다. 5일장같이 정기적으로 열리는 각 지방의 향시(鄕市)와 함께 장이 열리거나 상설적으로 어물•해산물•공산품•곡물•과일•약재 등 특정한 물품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규모나 명성에 있어 전국적으로 알려진 독특한 우리네 전문시장들을 시리즈로 연재한다. (사진:덕담 박승우) 화문석은 강화의 유명한 특산물로 강화 화문석시장은 끝자리가 2•7일인 날 남문 밖 토산품센터를 중심으로 시장이 선다. 화문석은 말 그대로 꽃무늬가 있는 자리로 한국 화문석의 우수함은 이미 12세기 북송(北宋)의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정교한 것은 침상과 평상에 깔고 거친 것은 땅에 까는데 매우 부드러워서 접거나 굽혀도 상하지 않는다. …더구나 침상에 까는 자리는 매우 우수하여 놀랍기만 하다…”라고 나타나 있다. 특히 강화의 화문석은 서유구(徐有구)가 쓴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를 통해 볼 때 19세기 전후에 널리 알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중엽부터 만들기 시작했다는 일명 발석이라 불리는 화문석은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명산물로 다른 지방에서는 거의 생산되지 않는 순백색의 왕골(완초)을 재료로 해서 한올 한올 고드레돌을 이용 부녀자들의 손가락 하나 하나로 엮어낸 우리 조상의 멋과 우아함이 가득 서려 있는 아름답기로 유명한 강화군의 토산품이며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민예품이다. 땀 흡수에 좋고 통풍이 잘돼 여름철이면 강화도는 화문석을 사려는 이들의 방문이 이어진다. 화문석은 직접 손으로 짜는데 큰 돗자리 말고도 꽃삼합, 화방석 등 앙증맞은 제품들은 외국관광객들에게 특히 인기를 끈다. 특성과 용도화문석의 유래는 문헌에 기록된 것이 없어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으나 고려 중엽부터 가내 수공업으로 발전되어 90여 년전 이조 왕실로부터 화문석의 도안을 특색 있게 제작하라는 하명을 받고 백색자리 생산지인 강화군 송해면 양오리 한충교가 연구결과 도안에 의한 화문석 제작에 성공해 다양한 도안과 제작기술 개발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화문석은 화려하고 소박한 무늬와 더불어 우아하고 정교하며 섬세해 실내장식 등 활용가치가 높고 실용성 또한 뛰어나며 왕골자체가 시원해 땀을 잘 흡수하고 겨울에 냉기를 방지하는 습성이 있어 오래 사용해도 윤기가 강하고 부스러짐이 없이 질긴 것이 특징이다. 화방석은 여느 방석과 달리 여름철에 완초가 지닌 성분으로 습기를 흡수하여 주므로 오래 앉아도 피로감을 느끼지 않으며 완자, 봉황, 태극 등 고전적 무늬를 수놓아 장식용으로 품위가 뛰어나다.화방석은 주로 의자에 많이 이용되며, 고전적 무늬를 수놓은 장식용품으로 활용가치가 매우 높다. 꽃삼합은 세 개의 단합을 크기별로 차등을 둬 한 세트로 제작되고 있으며 완자, 꽃, 태극, 봉황 등의 무늬를 수 놓은 제품으로 실내장식이나 귀금속 보관용으로 가치가 높다. 전에는 여인들의 바느질 광주리로 사용되거나 한식, 과자 등의 음식을 담는 그릇으로 사용되어 왔으나, 현재는 여인들의 귀금속 보관이나 장식용으로 효용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다. 화문석의 품질은 솜씨, 크기, 문양, 마디의 촘촘한 정도 등에 따라 다른데 홍학무늬에 마디가 촘촘하며 약간 누런 색을 띤 자연 그대로의 왕골로 만들어진 것의 가격이 비싸다. 화문석 하나를 매는 데에는 60만 번 이상의 손길이 갈 정도로 시간과 정성이 많이 든다. 그래서 요즘에는 점차 화문석을 매는 농가가 줄어들고 있어 이를 우려한 강화군에서는 6명을 기능보유자로 정해 옛 솜씨를 이어가게 하고 있다. 강화 화문석시장은 성수기인 6∼7월에는 새벽 4시경에, 겨울철에는 아침 6∼7시경에 장이 선다. 강화읍장 개설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조선시대 이후로 예측하고 있다. 강화읍내의 동락천을 중심으로 하여 열리며 판매 물품에 따라 3개의 시장으로 나눴다. 곡식과 옷감을 판매하는 남쪽에 열리는 시장은 ‘웃거리장’이라 불렸고 채소와 의류 등을 판매하는 북쪽에 열리는 시장은 ‘아랫거리장’이라 불렀다. 그리고 화문석을 주로 판매하던 ‘화문석장’은 서쪽에 열렸다.
청춘(靑春)들이여, ‘맨발의 청춘’을 기억하라
청춘(靑春)들이여, ‘맨발의 청춘’을 기억하라
우리나라 영화사에서 대박의 계보를 이룬 영화 가운데 '맨발의 청춘'을 빼놓을 수는 없다. 1964년작으로 주인공은 ‘고 신성일과 엄앵란’이고 '송승헌의 친아버지'였다는 소문이 있기도 했던 ‘트위스트킴’(김한섭)이 주요 조연이었다. 그리고 배우 이덕화의 아버지였던 고 이예춘선생도 조폭보스로 출연해 멋진 성격배우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당시 이 영화의 총제작비가 500만원이었다고 한다. 물가를 감안해서 상상하시길... 눈물도 한숨도 나 혼자 씹어 삼키며~ 밤거리에 뒷 골목을 누비고 다녀도~사랑만은 단 하나로 목숨을 걸었다~ 거리에 자식이라 욕하지 말라~그대를 태양처럼 우러러 보는~ 사나이 이 가슴을 알아줄 날 있으리라.~ 스윙 템포의 이 노래는 ‘하숙생’을 부른 ‘고 최희준’선생의 ‘맨발의 청춘’인데 '무인도' '꽃밭에서' 등의 작품을 남긴 故이봉조'선생 작품이다. 그리고 세월은 흘러 IMF시절 '맨발의 청춘'은 '벅'의 댄스뮤직 버전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았 는데 청년취업이 어려웠던 시기에 딱 맞아떨어지는 노래이기도 했다. 나는 지금 맨발의 청춘, 나 하지만 여기서 멈추진 않을거야 간다 와다다다다 그저 넌 내 곁에 머문 채 나를 지켜보면 돼 나 언젠간 너의 앞에 이 세상을 전부 가져다 줄거야, 기죽지는 않아 남들보다 못해도~ 반항적인 눈매에 가죽잠바와 가죽장갑, 불의를 참지 못하는 정의파 그리고 사랑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순정 등등. 당대를 대표하는 멋진 남성상으로 꼽혔던 신성일은 이 영화를 통해 많은 여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신성일과 엄앵란'은 나란히 청룡영화상 인기상을 수상했고 또한 이 커플은 이 영화를 찍는 동안 실제 연인(戀人)사이 였으며 이후 결혼식을 올리는데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광장동의 워커힐 호텔에서 주최측 추산 4,000명의 엄청난 인파가가 장사진을 이루기도 했다. (자료: 한국영화박물관) 거리의 깡패가 되어 주먹만을 믿으며 사는 주인공 '두수'(신성일)는 밀수한 시계를 운반하던 어느날, 불량배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안나' (엄앵란)를 구해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안나와 두수는 서로에게 관심을 갖게된다. 안나는 대사의 딸로 부유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여대생, 그러나 두수는 창녀들이 사는 허름한 방에서 쪽잠을 자는 처지. 두사람은 서로에 대한 관심 을 끌기위해 두수는 안나를 레슬링 경기장으로... 안나는 두수를 오케스트라 연주장으로 데리고 간다. 신분의 차이로 인해 사랑은 서로 어긋나는데 두수 의 취직을 알선하려는 자리에서 안나의 가족들로부터 모욕을 당한 두수는 다시 예전의 생활로 돌아가려 하고 밀수 사건의 해결을 위해 죄를 뒤집어 쓰고 감옥에 가기로 한다. 안나의 아버지는 안나를 자신이 대사로 있는 태국으로 보내려하자, 두수를 찾아 가출하고 둘은 경찰과 조직의 눈을 피해 시골로 도망치게 된다. 염전의 움막같은 외딴 창고 안에서 하룻밤 동안 둘만의 행복을 맛본 후 이룰 수 없 는 사랑의 회한을 남긴채 동반자살하고 만다. 영화속의 마지막 장면, 눈 덮 힌 거리에서 두수의 시신을 실은 수레를 끌고 공동묘지로 가는 트위스트킴, 거적 옆으로 두수의 맨발이 보이고 자신의 신발을 벗어 두수의 발에 신겨주 는 장면.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게 해주는 ‘맨발의 청춘’의 명장면이다. 중장년층 대상의 토크 프로그램에 자주 얼굴을 비추는 엄앵란씨는 구수한 입담으로 “내가 방송 나가서 이 사람하고 바람피운 여자들 이름만 얘기만 해도 24시간이 모자랄거야” 라고 얘기한다. 한편으로 팔순을 넘긴 신성일씨 는 구멍난 청바지가 어울릴 정도로 자신의 청춘(靑春) 이미지를 가꾸어 왔고 ‘맨발의 청춘’을 기억하듯 그리고 “사나이 이 가슴을 알아줄 날 있으리라.~”처럼... 그러나 2018년 초겨울 길지않은 81년 동안의 인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두어 달 전인 늦은 여름 ‘맨발의 청춘’을 불렀던 최희준 선생이 8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으나 1937년생인 고 신성일 선생에게는 동갑내기 영화배우들이 참으로 많다. 안소니 홉킨스, 잭 니콜슨, 더스틴 호프만, 모건 프리먼, 워렌 비티, 빌 코스비 그리고 여배우 제인 폰다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