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있는 가족을 그리며 외롭게 사망한 비운의 천재화가 이중섭

기사입력 2020.11.20 08:38 조회수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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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한국적인, 현대적 비운의 천재화가 이중섭(李仲燮, 1916.9.16~1956.9.6)

이중섭2.jpg

(사진:제주특별자치도)

 

호는 대향(大鄕). 1916 년 9 월 16일 평안남도 평원군 생. 외가가 있는 평양의 종로보통학교에서 수학. 오산고등보통학교에서 예일대학교 출신의 미술교사 임용련(任用璉)의 지도로 일본 도쿄문화학원(분카학원, 文化學院) 미술과 입학, 재학 중인 1937년 일본의 자유 미협전에 출품하여 각광을 받으며 1940년에는 미술창작가협회전에서 협회상을 수상하고 1943년에도 역시 같은 협회전에서는 태양상(太陽賞)을 수상했다.

 
분카학원을 졸업하던 무렵 일본인 여성 야마모토[山本方子]와 1945년 원산에서 결혼하여 이 사이에 2남을 두었다.
 
1946년 원산사범학교에 미술 교사 부임. 북한 땅이 공산 치하가 되자 자유로운 창작 활동에 많은 제한을 받았다. 친구인 시인 구상(具常)의 시집 ‘응향(凝香)’의 표지화를 그려 두 사람이 같이 공산주의 당국으로부터 탄압을 받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유엔군이 북진하면서 그는 자유를 찾아 원산을 탈출, 부산을 거쳐 제주도에 도착하였다. 생활고로 인해 다시 제주도에서 부산으로 돌아왔다. 이 무렵 부인과 두 아들은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으며 이중섭은 홀로 남아 부산•통영 등지로 전전하였다.
 
1953년 일본에 가서 가족들을 만났으나 며칠 만에 다시 귀국하였다. 이후 줄곧 가족과의 재회를 염원하다 1956년 정신이상과 영양실조로 그의 나이 40세에 적십자병원 외롭게 사망했다.

이중섭3.jpg

(사진:제주특별자치도)

 

이중섭은 가장 한국적인 작가인 동시에 가장 현대적인 작가로 평가 받는 화가이다.
그의 작풍은 야수파적인 강렬한 색감과 선묘 위주의 독특한 조형 등 서구적인 표현이지만 향토적인 숨소리와 꿈을 표현하여 한국적이면서도 웅장하고 무한한 세계를 내포하고 있다. 그의 작품의 소재는 주로 소, 닭, 어린이, 가족 등 일상성을 띠고 있으면서 시정이 넘치는 것들이다.
 
'소', '흰 소', '투계', '집 떠나는 가족', 그리고 담뱃갑 속의 은지에 눌러 그린 수많은 은지화들이 대표작들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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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소(부분),1955,종이에 유채,29× 41cm,홍익대학교박물관 소장
 
그의 예술세계를 이루는 기반은 철저하게 자신의 삶으로부터 연유하고 있다. 생활고 속에서 처자마저 일본에 보내고 전국을 떠돌며 외롭게 제작한 고통의 산물들이었던 그의 작품은 1970년대에 이르러서 새롭게 조명과 재평가를 받게 된다. 생전의 많은 인간적인 에피소드와 강한 개성이 담긴 작품들로 인해, 그의 삶과 예술은 이제 대중적으로 거의 신화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생전 인간적인 에피소드와 개성 강한 작품으로 1970년대에 이르러 갖가지 회고전과 재평가 작업이 활발하게 일어나 1972년 현대화랑에서의 유작전과 화집 발간, 평전(評傳)의 간행, 일대기를 다룬 영화•연극 등이 상연되었으며 많은 작가론이 발표되었다. 또한 2016년에는 이중섭 탄생 100주년을 맞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중섭 백년의 신화’라는 전시를 통해 그의 작품세계가 재조명 되었다.
 
현재 제주도 서귀포 명동로•이중섭 거리는 서귀포를 소개로 많은 작품을 남긴 비운의 천재 이중섭 화백의 기념 미술관이 있다. 비운의 천재화가 이중섭의 사랑하는 가족들과 짧은 봄날 같은 행복했던 추억이 있는 서귀포 시절을 그린다. 1996년 이중섭거리 지정, 2002년 이중섭 미술관 개관, 2009년 주민자치특성화사업으로 도심 공간 야외갤러리 조성, 2009년 이중섭 미술관 창작스튜디오가 개관되어 상설 전시공간이 있다. 이중섭 예술제, 거리 공연 개최, 서귀포문화예술시장 개최 등 정기 비정기적 문화예술행사가 많은 곳으로 문화예술이 살아 숨쉬는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제주의 핫 스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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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일정(국립현대미술관 자료)
식민지, 전쟁, 분단 등으로 얼룩진 한국의 근대사를 관통하면서도 이중섭은 끈질기게 ‘예술가’로서의 삶을 고집했다. 일제 강점기에도 민족의 상징인 ‘소’를 서슴없이 그렸고 한없이 암울한 현실을 자조하는 그림을 남기기도 했다.
 
가난한 피란시절에도 가족과 행복한 시절을 보내며 순진무구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가 하면 전쟁 후에는 강렬한 의지와 자신감으로 힘찬 황소 작품들을 쏟아내었다. 그는 무엇보다 자신의 감정표현에 충실한 ‘정직한 화공’이 되고자 했고 한국의 전통미감이 발현된 ‘민족의 화가’가 되기를 소원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진 후 사기로 인한 빚에 시달렸고 경제적 생활고 속에서 ‘거식증’을 동반한 정신적 질환으로 불행한 말년을 보내야 했다. 결국 쓸쓸하고 애잔한 작품들을 뒤로 한 채 홀로 세상을 떠났다.
 
1916 – 1950 평원, 평양, 정주, 도쿄, 원산
1936년 일본 도쿄의 제국미술학교를 거쳐 1937년– 1941년 ‘문화학원’에서 유학했는데 문화학원은 당시 일본에서도 가장 자유로운 분위기의 사립학교였다. 문화학원의 선배들도 적극 참여했던 ‘자유미술가협회’에서 작품 발표를 시작해서 일본의 주요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으며 협회의 회원 자격을 얻기도 했다.
 
1943년 태평양전쟁이 극단으로 치달았을 때 가족들이 있던 원산으로 귀국, 1945년 5월 해방 직전 문화학원의 후배였던 야마모토 마사코와 원산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950 – 1953 서귀포, 부산
1950년 12월 원산 폭격을 피해 어머니는 남겨둔 채 아내 및 두 아들과 함께 부산으로 피란 내려온다. 이 때 그 이전까지 제작한 작품을 모두 어머니 품에 남겨놓고 오는 바람에 이중섭의 1950 년 이전 작품은 극히 드물다. 피란지 부산이 너무 비좁았던 관계로 1951 년 제주도로 거처를 옮기는데 여기서 약 1년간 가족들과 가난하지만 행복한 피란생활을 한다.
 
1951년 12월 부산으로 돌아와 피란촌을 전전하며 가난한 생활을 이어간다. 1952년 7월 아내와 두 아들이 일본으로 돌아가서 홀로 남은 가운데 작품 활동과 전시회 참가, 잡지 삽화나 도서 표지화 그리기 등을 계속한다. 그러나 부산에서 제작된 수많은 작품이 대 화재로 불타서 대부분 없어진 것으로 전한다.
 
이중섭의 은지화
은지화는 이중섭이 창안한 새로운 기법의 작품이다. 양담배를 싸는 종이에 입혀진 은박을 새기거나 긁고 그 위에 물감을 바른 후 닦아내면 긁힌 부분에만 물감자국이 남게 된다. 그렇게 해서 깊이 패인 선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드로잉이 완성되는데, 평면이면서도 층위가 생길 뿐 아니라 반짝이는 표면효과도 특징적이어서 매우 매력적인 작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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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국립현대미술관)

 

이러한 기법은 고려청자의 상감기법이나 철제은입사 기법을 연상시킨다.
이중섭은 상당히 오랜 기간 약 300 점의 은지화를 제작했다는 증언이 있는데 그 중 일부가 전시장에 진열되었다. 제주도 서귀포 시절 행복했던 가족들의 모습을 추억하는 것에서부터 비극적인 사회 상황과 자신의 처참한 현실을 암시하는 내용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장면들이 예리한 칼로 새겨져 있다. 이중섭은 이 은지화들이 후에 ‘벽화’를 그리는 밑그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거대한 벽화를 그려서 예술이 공공장소에서 많은 이에게 향유되는 꿈에 부풀곤 했다.
 
1953 – 54 통영
전쟁이 끝날 무렵부터 전쟁 직후 1954년 6월경까지 월남한 공예가 유강렬(1920~76)의 주선으로 통영 나전칠기전습소에서 강사로 재직하면서 비교적 안정적인 환경에서 의욕적인 작품활동을 계속했다. 아름다운 통영의 풍경을 그린 유화작품이나 유명한 ‘소’ 연작들이 이 때 제작되었다.
이중섭의 개인전이 최초로 열리기도 했고 ‘4인전’에 참여하는 등 본격적으로 화가의 경력을 쌓아갔다
 
1955 대구
1955년 1월 있었던 서울 전시에 이어 5월 대구의 미국공보원 화랑에서도 개인전을 개최한다. 절친했던 시인 구상(1919 – 2004)의 도움으로 마련된 이 전시회는 서울에서보다 더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가장의 역할을 해내지 못한 채 예술을 한답시고 공밥을 얻어먹고 무슨 대단한 예술가가 될 것처럼 세상을 속였다고 자책하며 거식증을 동반한 정신적인 질환에 시달렸다. 대구 외곽 왜관에 있던 구상의 집에서 머무르며 요양생활과 작품제작을 계속했다.
 
가족들과는 떨어진 가운데 홀로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다. 누상동, 상수동 등 지인의 집에서 기숙하며 1955년 1월에 미도파화랑에서 열리는 개인전을 준비하는데 몰두했다. 일본의 아내가 일본에서 책을 사다 한국에 판매하여 그 차익으로 수익을 내는 사업을 했으나 중간 업자가 돈을 떼먹는 바람에 극심한 빚에 시달리게 된다. 이 빚을 갚고 일본에 있는 가족들과 만나기 위해 개인전으로 통해 작품을 팔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이 전시에서 작품은 약 20 점이나 팔렸으나 수금이 되지 않아 곤경에 빠지기 시작한다.
 
1956 서울(정릉)
병원을 전전하던 이중섭은 1955년 12월경부터 서울의 정릉에서 화가 한묵(1914 – ), 소설가
박연희(1918 – 2008), 시인 조영암(1920 – ?) 등과 함께 생활했다. 이 때 문예지의 삽화를 그리기도 하고 ‘돌아오지 않는 강’ 연작을 포함한 마지막 작품들을 남겼다. 그러나 거식증으로 인한 영양실조, 간장염 등으로 인해 다시 병원생활을 하다가 1956년 9월 6일 적십자병원에서 무연고자로 생을 마감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서울 망우리공원에 묘소와 묘비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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