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기행(2) 침략의 아픔이 숨어있는 용산역 둘레길

용산역~철도회관(연복사탑 중창비) ~ 용산역사박물관(철도병원터) ~ 아모레퍼시픽 사옥~ 용
기사입력 2022.11.23 11:43 조회수 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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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내부의 중추 지역, 도시 핵심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지역을 도심(都心)이라 부른다.


이 도심에는 우리가 알지 못했거나 잊혀진 이야기가 곳곳에 배어있다. 도심기행은 과거의 삶의 기록이고 역사이다. 이 숨은 이야기를 찾아가는 시간 여행은 길도 편해서 누구나 부담없이 즐길 수 있고 배울 수 있어 좋다. 오늘은 그 두 번째로 침략의 아픔이 숨어있는 용산역에서 시작해 삼각지까지 속속들이 걷어 본다.용산길.jpg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보면 오늘 날 용산(龍山)이라 부르는 지역하고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도에서 보면 현재 마포구의 우측과 용산구에 걸쳐 있는 긴 산지가 있는데 이 봉우리의 끝이 용산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지금은 그 용산의 흔적조차 없어졌다. 이 지역이 용산으로 불리게 연유는 봉우리가 얼핏 용의 형상을 닮았다고 해서 용산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마포구 아현동과 용산구 효창동 사이에 걸쳐 있는 한강변 주변이다.


고려시대의 학사(고려시대 한림원 정4품 관직) 한언국(韓彦國)은 '용산은 봉우리가 굽이굽이 서려서 형상이 푸른 이무기와 같다.'라고 당시의 용산을 묘사했다. 이런 원래의 용산이 용산역부근의 용산으로 불린 건 일제강점기 당시 용산역 일대를 '신용산'이라 부르기 시작하면서 오늘날의 용산으로 정착이 되었다용산역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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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나무위키)

 

용산역이 개통전인 1900년까지 경인선의 종착역은 노량진이었다. 한강을 건너 한강 이북까지 완전히 개통한 것은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어 용산역이 부산역으로 가는 열차의 출발역이었다. 당시 용산역은 부근에 일본군 주둔지가 있어 이용객과 화물의 이동이 많았다.

1900년 7월 8일 11.5㎡(3.5평)의 작은 목조건물로 시작한 용산역은 경의선 출발역이 되면서 1906년 11월 서양식 역사로 다시 지어진다. 용산 역사는 당시 일본인들이 덕수궁 석조전 등과 함께 조선의 4대 건축물로 꼽았 정도로 아름다운 목조건물이었으나 화재로 소실되어 재 건축되었다. 역이 만들어질 당시 1900년의 행정구역상 한성부 용산방이었기 때문에 용산역이 되었다.


용산역 부근 둘레길의 들머리인 용산역 광장에는 일제강점기 시절 강제 징용으로 고국 땅을 떠나는 조선 노동자들을 기리는 '강제징용 노동자상'이 있다. 광복 72주년인 지난 2017년 세워진 동상은 2.1m로 설명 기둥 4개와 함께 전시되고 있다. 피폐한 모습의 강제징용 노동자는 오른 손에 곡괭이를 들고 애절하게 먼 곳을 바라보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잔혹했던 일제 강제징용 시대의 핍박과 배고픔 그리고 고향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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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상을 뒤로하고 용산역사 바로 우측 골목으로 들어서면 철도회관이 있는데 정문 옆 화단에는 연복사탑 중창비가 있다KakaoTalk_20221102_224046708_02.jpg

연복사(演福寺)는 고려시대 개경에 위치한 절로 안에 천여 칸의 건물과 세 개의 연못, 아홉 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대규모 사찰이었다.


연복사탑 중창비(演福寺塔重創碑)는 1563년(명종 18년)에 소실되었다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공덕으로 다시 세워진 연복사 오층불탑(목탑)의 건립내력을 담은 비석으로 일제 국권침탈이 본격화하던 100여 년 전 무렵에 개성역(開城驛)에서 경의선과 관련해 이곳 용산 철도구락부 자리로 이전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철도구락부는 현 용산공업고등학교를 중심으로 옛 철도병원(현 용산역사박물관) 쪽에 걸쳐 있는 구역에 자리했다)KakaoTalk_20221102_224046708_0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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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회관에서 건널목을 건너면 대로변에 중앙대학교 용산병원(구 철도병원)이었던 건물이 최근에 용산역사박물관을 바뀌어 개관했다.

용산역사박물관은 94년 역사의 용산철도병원을 리모델링해 2022년 3월 23일 개관한 근대건축물로써의 가치를 인정받아 2008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외벽의 붉은색 벽돌은 옛 용산철도병원의 모습을 훼손하지 않고 최대한 보존하는 방식으로 리모델링했다. 건물 입구 안쪽 상부는 스테인드글라스로 꾸며져 있는데 용산철도병원 본관 출입구에 있었던 스테인드글라스를 그대로 복원한 것이다.


1층과 2층 상설전시실과 옥상 정원으로 꾸며진 용산역사박물관 1층 상설전시실에는 ①프롤로그/천의 얼굴, 용산 ②용산에 모이다/한양의 길목 용산, 조선을 움직인 거상, 경강상인 ③용산에 흩어지다/군사기지로 새로운 지형을 그리게 된 용산, 냉전 속에서도 뜨겁기만 했던 용산 ④인터섹션/용산으로 떠난 시간여행자 ⑤용산으로 이어지다/철도 교통의 중심이 된 용산,철도의료의 본거지, 용산철도병원 등의 테마로 꾸며져 있다. 이어 2층 상설전시실은 ⑥ 용산에서 하나되다/다양성이 조화를 이루는 터전, 용산, 경계를 풀고 공존의 시대로 나아가는 용산 ⑦에필로그/공간을 넘어 공감으로 등의 테마로 꾸며져 과거 역사 속의 용산부터 현재 발전된 용산까지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다양한 디지털 자료들을 모아 둔 ‘아카이브미디어월’과 과거 용산에서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는 현재의 용산까지 압축해 보여주는 ‘천의 얼굴’ 애니메이션 영상도 시청할 수 있다.용산기지둘레길5.jpg용산역사박물관을 나와 우측으로 건널목을 건너면 신용산역 방면에 현대식 건물들이 줄지어 있는데 유독 특징적인 건물이 눈에 띈다. 아모레퍼시픽미술관(APMA, Amorepacific Museum of Art)이 있는 아모레퍼시픽 본사이다. 이 건축물은 2018년 한국건축문화대상 대통령상, 2018년 한국건축가협회상 건축가협회장상, 세계초고층도시건축학회(CTBUH)의 ’2019 CTBUH 어워즈' 대상(Winner) 등을 수상해 국내외 학계, 업계의 큰 호평을 받은 바 있다.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는 ‘백자 달항아리’에서 영감을 얻어 절제된 아름다움과 편안하고 풍부한 느낌을 주겠다는 의도로 설계했다. 달항아리를 표현하기 위해 수직적으로 높은 건물을 짓지 않았고 건물을 여러 동으로 나누지도 않았으며 단아하고 간결한 형태를 갖춘 하나의 커다란 볼륨을 가진 건축물로 완성했다. 또 한옥의 중정을 연상시키는 건물 속 정원을 만드는 등 우리 전통 가옥 요소를 곳곳에 넣어 한국적 고유미를 더했다.


이 건축물을 뒤로하고 우측 골목으로 올라가면 평택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주한미군이 주둔했던 용산미군기지 14번 게이트가 있던 출입문이 나온다.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군사령부의 출입문이 있었던 곳이다. 용산기지 자리는 1595년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후방병참기지가 있었고 1882년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선에 파병된 청군 3천명이 주둔했으며 1884년 갑신정변 때는 다시 일본군이 주둔한 했던 제국주의와 냉전이 이어졌던 상징적 땅이기도 하다.KakaoTalk_20221102_224046708_05.jpg1945년 용산기지를 접수한 미군은 이곳을 ‘캠프 서빙고 (Camp Seobinggo)’라 부르고 1978년에는 한미연합사령부(CFC)가 창설되면서 용산기지는 한미 군사동맹의 상징적인 장소로 평택 이전 전까지 주둔한다.


14번 게이트 앞 길에는 주한미군이 이용하던 보세 옷 가게 골목으로 유명했다. 이전 이후 지금도 보세가게 건물들이 영업 중이다.

보세골묵에서 오른쪽 길로 돌아서면 음식점들이 늘어서 있는데 요즘 ‘핫’하다는 맛집과 카페가 즐비한 용리단길이다.KakaoTalk_20221102_224046708_14.jpg이 길 왼편 골목에 '왜고개 성지'가 있다. 원래 이곳은 기와와 벽돌을 구워 공급하던 와서(瓦署, 조선시대 기와와 벽돌 제작을 맡던 관청)가 있었던 곳으로 와현(瓦峴), 와서현(瓦署峴) 또는 왜고개로 불린 데서 유래한다. 서울 명동 주교좌성당과 중림동 약현성당을 지을 때도 이곳 벽돌이 공급돼 사용되었다고 한다.KakaoTalk_20221102_224046708_06.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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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고개는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일곱 분의 순교자가 33년간,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두 분의 순교자가 43년간 묻혔던 유서 깊은 교회의 사적지로 열 분의 순교자 중 여덟 분이 1984년 5월 6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또 1846년 9월 16일 병오박해 때 순교한 한국인 첫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시신이 잠시 모셔졌던 곳이다.


이러한 교회사적 중요성으로 2013년에 순교자 현양비, 대형 십자가상, 십자가의 길, 기도처 등을 새 단장한 후 축복식을 가졌다.

왜고개성지를 나와 왼편 길로 가다 보면 코너에 일본식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간조 경성지점 건물인데 일제 강정기때 건축과 토목을 도맡아 하던 기업으로 용산중학교, 철도학교, 경부선, 한강철교, 수풍댐 등을 건설했다고 한다. 원래는 목조 단층건물이었으나 1925년 대홍수로 철근 콘크리트조 2층으로 개축, 타일 외관이 오늘날까지 생생히 남아 있다.KakaoTalk_20221102_224046708_10.jpg이제 마지막 날머리인 삼각지역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다 보면 울타리로 가려진 높은 담장 뒤로 쓰러질 것 같은 건물이 살짝 보인다. 제대로 보기위해 정면으로 돌아가니 노란색 6층 아파트, 삼각맨션(Mansion)이란다. 1970년에 준공되었으니 52년이나 지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었다. 70년대 당시만 해도 고급 아파트들은 보통 맨션이라고 불렀으니 부촌 아파트가 현재 낡고 초라한 모습은 시절 아이러니라고나 해야 하나… 아직도 서울 곳곳에는 저리 낡은 맨션들이 남아있는 곳이 몇몇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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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지맨션 앞 대로 변에는 미군기지가 호황을 받던 시절의 보세 가게들과 더불어 미군들이 원하는그림을 그려주던 화랑거리가 유명했다. 지금도 갤러리와 표구사 등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여기서 유명한 소설가 박완서씨와 박수근 화백의 일화가 만들어 졌다.


두 사람은 1951년 겨울, 미군 PX에서 우연히 만난다. 한국전쟁으로 부산 피란시절이어서 서울에서 돈 벌 수 있는 일자리라고는 거의 없던 때 박완서는 미군 PX 기념품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박수근도 돈을 벌기 위해 이곳에서 미군들의 가족 그림이나 초상화 등을 그려주고 돈을 벌었다. 박수근은 이렇게 번 돈으로 창신동에 방 두 개, 마루 하나가 딸린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도심기행 1편에 박수근의 집터 등장편 참조) 미군에게 그림 그리는 일을 알선한 사람이 박완서였고 그 주문받은 그림을 그린 사람이 박수근이었던 것이다. 둘은 이렇게 인연을 맺으면서 박완서는 박화백의 작품과 인품에 호감을 느끼며 가까워지고 존경하게 된다.


이때 박수근과의 추억을 바탕으로 쓴 자서전적 소설이 ‘나목(裸木)’이고 이 소설이 여성동아 공모전에 당선되어 박완서는 문단에 등단해 본격적인 소설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KakaoTalk_20221102_224046708_11.jpg

오늘의 날머리인 삼각지역에는 29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가수 배호(본명 배만금, 1942년 4월 24일 ~ 1971년 11월 7일)의 최고 히트곡 중 하나인 '돌아가는 삼각지' 노래비가 서있다. 그는 1966년 신장염에 걸렸는데 1971년 10월 라디오 이종환의 ‘별이 빛나는 밤에’ 출연 후 비를 맞고 귀가하면서 감기에 걸려 신장염이 재발했고 병원에 입원한지 한 달 만인 1971년 11월 7일 숨을 거뒀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신세계 공원묘지에 있다.


삼각지는 '세모꼴로 생긴 땅'이란 뜻인데 1967년 한강과 서울역, 이태원으로 향하는 세 갈래, 우리나라 최초의 타원형식 입체교차로가 들어섰다가 1994년 철거됐다.


용산역에서 시작한 도심기행은 이렇게 삼각지역에서 끝냈다. 이 길은 용산역사박물관에 전시되었 듯 오랜 세월 침략과 전쟁 그리고 상처가 새겨져 있는 아픈 역사의 터였다. 다양한 에피소드가 묻어 있는 용산 둘레길은 천천히 의미들을 씹으며 다시 걸어야 할 소중한 길이라는 생각이다.용산길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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