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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春川)의 원래 지명은 ‘봄내’? 원래 이름은 ‘소머리’
춘천(春川)의 원래 지명은 ‘봄내’? 원래 이름은 ‘소머리’
춘천(春川)의 원래 지명은 ‘봄내’?, 봄내는 예로부터 내려온 순 우리말식 표기가 아닌 오늘날 기준으로 한자를 보고 역으로 뜻풀이를 한 것이다. 춘천의 정확한 원래 땅 이름은 ‘소머리’이다. 춘천의 우두산(牛頭山)을 소머리산, 쇠머리산, 솟을 모이, 솟을 뫼라고 부르는 이름의 뿌리에서 연유했다. 백두산을 머리산(頭嶽)이라고 불렀고 강화도 마니산을 머리산으로 부른 것도 동일하다. 이익의 ‘성호사설’ ‘천지문’(천문과 지리에 대해 정리)에 보면 춘천을 ‘금탕불발지형(金湯不拔之形, 공격하기 어렵고 무너뜨리기 어려운 상대를 지칭. 비슷한 의미로 철옹성)’으로 표시기했다. 지금의 제2 군단사령부가 있는 군사요충지로 과거에도 요새 같은 도시가 춘천이다. 춘천은 강원도 중서부에 위치해 강원도청을 포함하여 여러 지역본부 공공기관이 소재한 강원도의 수부도시이며 강원 북서부권의 거점 도시이다. 춘천의 과거 이름을 한자(漢字)로 표기하면 우곡(牛谷), 우곡성(牛谷城)이다. 우곡성은 ‘삼국사기’에 백제 시조 온조왕 34년(16)에 처음 사용되었다. 온조왕이 군사 5천명을 거느리고 우곡성을 쳤다고 나온다. 우곡성은 우곡(牛谷)으로 불렀으며 소머리골, 소머리고장, 소모리성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우수주(牛首州)의 지명은 신라 선덕왕 6년(637)에 한자로 표기한 이름이다. 소머리고을을 우수주로, 한자식의 표기는 우두주(牛頭州)라고 부르기도 했다. 고려 태조 23년(904)에 춘주(春州)라고도 불렀는데 오늘날에도 춘주는 봄(春), 고을(州)의 의미로 봄이 머리, 처음, 시작으로 연상되기도 한다. 춘천이라는 지명이 처음 불린 것은 조선왕조 태종 13년(1413)이었다. 처음에는 춘천군(郡)으로 정했으며 태종 15년, 춘천군을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춘천이 도호부의 작은 고을에서 도읍으로 각광을 받게 된 것은 고종 25년(1885)에 유수군(留守郡)을 설치하면서 부터라고 알려지고 있다. 당시에 외세의 위협을 받았던 때로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 열강 속에서 미국, 프랑스, 일본 등 함대를 몰고 와서 개항(開港)을 강요하던 시기이다. 이 싸움에 대비하기 위해서 내륙지방에 임시수도 또는 피난수도를 조성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는데 이렇게 하여 정해진 피난궁(避難宮)이 춘천유수부였다. 한편 춘천을 봉산(鳳山)•수춘(壽春) 등으로 부르는 것은 춘천의 진산인 봉산(봉의산)을 그대로 별칭으로 정한 것과 삭주, 광해주, 춘주, 안양, 춘천 등의 지명이 머리, 봄, 시작 등의 뜻을 생명과 연계해서 별칭으로 정한 것이다. 고려 태조 때는 '봄이 빨리 오는 고을'이라는 뜻으로 '춘주(春州)'로 고쳤다. 조선 태종 때 고을 '주(州)'가 들어가는 일부 지명에서 '주(州)'를 '천(川)'으로 바꿀 때 춘주 역시 포함되어 이때 '춘천'으로 바뀌었다. 결국 우리 식 표기(향찰, 이두)가 지배적이던 경덕왕 이전 시기에 춘천을 가리키는 지명은 '소머리골'뿐이다. 춘천시는 수도권 전철 경춘선이 연결되어 있고 ITX-청춘도 운행하여 서울까지 1시간 정도면 갈 수 있기 때문에 매일 평균 2만 명 이상이 경춘선을 이용한다. 국토부 기준으로 철원군, 화천군, 양구군, 홍천군이 춘천권에 포함되며 실질적으로는 구 김화군, 화천군, 양구군, 내면을 제외한 홍천군, 인제군 남면, 기린면, 상남면, 가평군 가평읍, 북면이 춘천권으로 분류된다. 더 범위를 넓히자면 철원군, 화천군, 양구군, 인제군, 가평군, 홍천군 정도이다. 우리나라에서 인물 이름을 철도역 이름으로 삼은 첫 번째 사례인 김유정역이 춘천에 있는데 1939년 개업 당시에는 역 소재지가 춘천시 신남면이어서 원래는 신남역이라는 이름이었다. 이후에 강원도 춘천 출신의 소설가 김유정을 기념하기 위해 2004년 12월 1일에 역명을 변경했다. 역 근방에 김유정문학촌도 있다. 소설가 김유정의 사상과 문학을 기리기 위해 생가를 복원하고 전시관을 지어 2002년 8월 6일에 설립한 문학관이다. 김유정문학촌은 한국의 대표적인 단편문학작가 김유정의 사상과 문학을 기리며 그 기념 및 연구사업 등을 추진하고 있는 춘천시가 2002년 8월 일반 시민들에게 김유정의 삶과 문학을 좀더 가까이 소개하기 위해 설립했다. 김유정(金裕貞, 1908년 1월 11일~1937년 3월 29일) 일제 강점기 조선의 소설가로 강원도 춘천군 신남면 증리에서 출생하여 지난날 한때 대한제국 한성부 종로방 돈녕계 니동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으며 1937년 3월 29일을 기하여 일제 강점기 조선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상산곡리에서 폐결핵으로 요절했다. 대표작으로 단편 ‘산골 나그네’ (제일선 2월), 단편 ‘총각과 맹꽁이’ (신여성 9월), '봄.봄'(조광 12월), 단편집 ‘동백꽃’ 등.
낙산 아래 도시빈민과 노동자들의 정주공간, 창신동(昌信洞)
낙산 아래 도시빈민과 노동자들의 정주공간, 창신동(昌信洞)
종로구 흥인지문 앞 낙산 아래 동네 창신동.한양도성으로 진입하는 흥인지문과 인접해 있어 조선 전기부터 도성을 오가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면서 형성되었다. 조선초(태조5년 1396년)부터 있었던 한성부의 5부 52방 가운데 동부의 인창방(仁昌坊)과 숭신방(崇信坊)의 한 글자씩 따서 1914년부터 창신동이라 칭했고 1943년 구제도가 실시됨에 따라 경성부 동부출장소 관할에서 동대문구로 편입되었다가 1975년 10월에 동대문구에서 종로구로 편입되었다. 당시 종로구 지역은 한성부의 중심으로 한성부 ①중부의 서린방(瑞麟坊)•견평방(堅平坊)•경행방(慶幸坊)•징청방(澄淸坊)•수진방(壽進坊)•관인방(寬仁坊)•장통방(長通坊)•정선방(貞善坊), ②동부의 연화방(蓮花坊)•창선방(昌善坊)•건덕방(建德坊)•숭신방(崇信坊)•숭교방(崇敎坊), ③서부의 인달방(仁達坊)•여경방(餘慶坊)•적선방(積善坊), ④북부의 순화방(順化坊)•준수방(俊秀坊)•의통방(義通坊)•관광방(觀光坊)•안국방(安國坊)•진장방(鎭長坊)•가회방(嘉會坊)•양덕방(陽德坊) 등의 지역이 청계천 북쪽지역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영조 27년(1751)에 ‘도성 삼군문 분계총록’에 보면 숭신방(성외) 밑에 숭신방계와 인창방(성외) 밑에 인창방계에 걸쳐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정조 13년(1789)에 간행된 ‘호구총수’를 보면 숭신방계가 숭신동계로, 인창방계가 인창동계로 바뀌어 있다. 갑오개혁(1894) 때 한성부 동서(東署) 숭신방(성외) 밑에 동문외계의 홍수동ㆍ복거교ㆍ남교ㆍ대정동ㆍ정자동ㆍ신리와 인창방(성외) 밑에 동문외계의 부정동ㆍ복거교 등으로 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에는 경기도령 제 3호에 의해 이 지역은 숭신면과 인창면이 되었다가 1914년 조선총독부령 제 111호 '부ㆍ군의 명칭ㆍ위치 및 관할구역의 개정'으로 경성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다시 경성부 동부에 편입되었으며 이어 경기도고시 제 7호에 의해 이 지역은 숭신면 자지동ㆍ정자동ㆍ성저동ㆍ신촌ㆍ당현동ㆍ인수동ㆍ복거교ㆍ홍수동ㆍ대정동ㆍ남교와 인창면 부어정동ㆍ복거교 등을 합하여 창신동이라 하였다. 1936년 경기도고시 제 32호에 의해 일제식 명칭으로 변경함에 따라 창신정이 되었다. 1943년 조선총독부령 제 163호에 의해 구제가 실시됨에 따라 동대문구가 설치되어 이에 속하였고 광복 후 1946년 일제식 동명을 모두 없앨 때 창신동으로 되었다. 1975년 대통령령 제 7816호에 의해 동대문구로부터 이관, 종로구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서울시 종로구 지명 유래) 옛 지명인 자지동(紫芝洞)은 단종의 비 정순왕후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옷에 보랏빛 물을 들여 내다 팔 때 그 물을 들이던 샘의 이름에서 유래되었고, 홍수동(紅樹洞, 홍숫골)은 조선 시대에 빨간 열매가 열리는 나무가 무성하였다 하여 붙은 이름이고, 돌산밑은 창신2동과 3동 사이의 절개지 서쪽 아래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이 절개지는 일제 강점기에 조선 총독부에서 지어진 건물들의 석재의 공급처이기도 했다. 창신동은 경성부의 인구 집중 과정에서 낙산 기슭 산비탈이나 청계천 변의 공유지들은 도시빈민의 중요한 생활 거점이 된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서울 도심 근접 비공식 주거 밀집지로 낙산 일대의 산 중턱과 산 정상까지 전후 재해민과 지방 이주민들의 주거 공간이 되기도 했다. 1961년에 만들어진 평화시장의 번성으로 동대문 의류산업 노동자들의 주거지대로 의류 생산 공장들이 몰려들면서 오늘날의 동대문 의류산업의 배후 생산기지의 메카가 되었다. 창신동은 봉제공장, 문구완구거리, 달동네, 채석장 등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지만 한양도성 등 문화재와 박수근, 백남준 등 예술가의 동네이기도 하다. 이 지역의 문화재들이다. 1. 안양암(安養庵): 1926년에 창건된 절로, 창신동 130-1에 위치한다. 불교 문화재가 많아 한국미술박물관의 별관 기능도 하고 있다.2. 비우당(庇雨堂): 하정 류관이 지어 살다가 조선 중기에 지봉 이수광이 기거하던 초가집으로 이수광은 이 집에서 지봉유설을 집필하였다. 이름의 뜻은, 우산 없이 지내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집 안으로 새는 비를, 지붕을 고쳐 막지 않고 우산으로 피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원래 위치는 창신동 7-26번지였으며, 현재는 낙산공원 조성과 함께 창신동 9-471로 옮겨 복원되었다.3. 자주동천(紫芝洞泉): 단종의 비 정순왕후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팔던 천을 자주색으로 물들이던 샘이다.4. 좌룡정(左龍亭) 터: 조선 시대 한양에 있던 5대 활쏘기터[射亭] 중 하나였다. 현재 한양도성에 각석이 남아 있다.5. 원흥사(元興寺) 터: 1902년(광무 6년)에 창건된 대한제국 황실의 보리사로 전국의 사원을 총괄하는 절이었다. 현재 이 위치에 서울창신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6. 박수근 집터: 창신동 393-16에 위치하였던 집으로 화가 박수근이 1952년부터 1963년까지 거주하였다.7. 백남준 생가 터: 창신동 197에 위치하였던 9917m2 규모의 한옥으로, 현재는 철거되어 여러 필지로 분할되었다. 2017년 3월 10일 집터의 일부인 창신동 197-33에 백남준기념관이 개관하였다.8. 김광석 집터: 1975년부터 1990년까지 김광석이 거주한 창신동 130-54의 양옥으로 사후 2013년까지 부모에 의하여 관리되다가 2015년 11월 2일 매각되었다.9. 창신궁(昌信宮): 일명 ‘창신궁’은 임종상의 저택으로 대지 7천평 건평 4백평의 면적을 지니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 당시에 30만원의 거금을 들여, 궁궐과 같이 단청을 하여 건축한 곳이다. 창신동 641 일대에 있었던 한옥의 대지가 약 7천평으로 이곳이 창신궁으로 추정된다.
한자음도 똑 같은 인천 논현동(論峴洞)과 서울 논현동(論峴洞)
한자음도 똑 같은 인천 논현동(論峴洞)과 서울 논현동(論峴洞)
(사진:개인블로그) 인천광역시 남동구 남쪽에 위치한 논현동(論峴洞)은 동쪽으로는 경기도 시흥시 월곶동, 서쪽으로는 연수구 동춘동과 연수동, 남쪽으로는 연수구 송도동, 북쪽으로는 남촌도림동에 접해 있다. 논현동의 옛 이름은 논고개 마을로 구한말까지 인천부 남촌면에 속해 있었다. 주변에 많은 자연부락이 있었지만 이중 논고개 마을과 모래 마을이 중심으로 1903년 인천부가 동네 이름을 확정할 때 논현리 사리동(沙里洞)이 됐다가 1906년 논현동으로 바뀌었다. ‘이 마을에 있는 논들이 고개[峴] 위에 있다’고 해서 ‘논고개’라고 불렸다는 것이다. ‘고개’는 한자 그대로의 뜻을 갖지만 ‘논(論)’은 한자의 소리만 빌린 음이다. 또 다른 설로는 옛날 이곳의 논현 포구에서 중국으로 배가 다녔는데 가족이 중국으로 떠날 때 배웅 나온 식구들과 ‘이것저것 의논(論)하며 넘은 고개’라는 뜻에서 논현이라고 불렸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해석으로 이 마을에 중요한 일이 생겼을 때 사람들이 마을 뒷산의 넓은 공터에 모여 의논했기 때문에 얻은 이름이라는 명도 있다. 반면 이와는 전혀 다르게 논고개가 우리말의 ‘늘어진 고개’, 곧 ‘는 고개’에서 발음이 바뀐 것으로 보는 해석이 있다. 이곳의 땅이 바다 쪽으로 길게 늘어져 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는 것으로 ‘는골’ 또는 ‘는 고개’가 ‘능골(능고개)’을 거쳐 ‘논골(논고개)’이 됐다는 것이다. 논현동은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대단위 지구가 형성된 것은 아니었다. 정말 보잘 것 없는 동네였다. 인천과 경기도의 시계에 속한 곳으로서 교통의 오지였고 주변에 남동공단과 소래포구 그리고 야산 외에는 사람 살만한 동네가 아니었다. 지금은 인천의 다른 대형 동네 부럽지 않을 정도로 발전했다. (사진:페이스북)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옛날에 논현동(論峴洞)동 인천 논현동과 같이 논고개(논현論峴)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논밭이 펼쳐져 있다 하여 이 지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현(峴)이 '고개 현'이고, 논(論)은 '의논한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말 논을 소리만 빌린 한자음이다. 논고개는 지금도 있는데 논현로에서 언주역과 학동역 사이에 있는 고개가 바로 논고개이다. 이 고개는 강남대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금의 논현성당 근처이며 특히 강남우체국 위에서 반포아파트까지의 산골짜기 좌우 벌판이 논과 밭으로 연결되어 있어 논고개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원래 명칭은 논고개였지만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명칭이 논현이라는 한자명으로 바뀌었다는 설도 있다. 편입전 논현리와 학리였던 곳이며 1963년 서울특별시 성동구에 편입되면서 행정동 신사동 관할이 되었고 서울 편입 이후 압구정동의 일부가 논현동으로 이관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논현리이기도 했다.
'아이고개', ‘애고개'의 한자 표기 ‘아현동(阿峴)’
'아이고개', ‘애고개'의 한자 표기 ‘아현동(阿峴)’
충정로에서 마포로 넘어가는 곳의 본래 지명은 ‘애오개’이다. 지금은 지하철 5호선의 역 이름로만 불리고 있는데 ‘고개가 아이처럼 작다’는 뜻으로 아이고개, 애고개라고 했다. 이 ‘아이고개’ ‘애고개’를 한자로 옮겨 쓴 것이 오늘날 아이현(阿耳峴), 아현(阿峴)동이다. (사진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지명의 유래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데 첫 번째가 인근 지형을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이다. 교통이 발달하기 전 도성 중심에서 마포나루, 인천 강화를 오가기 위해서는 남쪽의 만리재나 서북쪽의 애오개를 걸어 넘어야 했다. 남쪽의 만리재는 높고 길어서 고개를 넘는 데 반나절 이상 걸리지만 서북쪽의 고개는 훨씬 작아 넘기 수월했다. 서북쪽에 있는 고개는 아이처럼 작다는 의미에서 아이고개, 애고개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두 번째는 풍수와 관련된 이야기로 한성의 주산(主山)인 북한산의 봉우리는 아이가 업혀 있는 형태라 하여 부아악(負兒岳)이라 하는데 그 아이가 달아나는 형세라 이를 막기 위해 서쪽에 있는 산을 모악(母岳), 남쪽 산을 벌아령(伐兒嶺)이라 했다. 그리고 서남쪽의 산은 떡으로 아이를 달랜다는 의미로 병시현(餠市峴), 떡전고개라 불렀다. 달아나려는 아이를 떡으로 달래는 고개인 병시현이 아현(兒峴)이 되었고 그 한글 이름인 애오개로 불리게 된 것이라는 설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사대문 안팎 생활 문화를 보여 주는 이야기로 옛날 한성부에서는 서소문을 통하여 시체를 나가게 하였는데 아이 시체는 이 고개를 넘어 묻게 했다. 아이들의 시체를 매장한 고개라는 이름으로 애오개라고 부르게 되었는 설로 과거 애오개 인근(아현동 산7번지 인근) 곳곳에 아이 무덤이 실제로 있었다고 전해진다.
전남 곡성군, 영화는 '곡성(哭聲)' 실제 지명은 곡성(谷城)
전남 곡성군, 영화는 '곡성(哭聲)' 실제 지명은 곡성(谷城)
(출처: 영화 곡성 포스터, 곡성군 이미지를 고려해 한자를 표기했다. 곡성군 주민들은 영화 '곡성(哭聲)'때문에 한 때 지역 이미지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했다고 한다. 실제로 영화도 전남 곡성군에서 촬영해 마을이름 진짜 곡성(哭聲)인가하는 오해를 살만했다. '울음(곡) 소리'라는 뜻의 영화 '곡성(哭聲)'을 '깊은 골자기와 높은 산의 고개'라는 한자 뜻의 '곡성(谷城)' 지역에서 촬영한 것은 당시 감독의 의도적인 중의적 전략이었다고 한다. 아무튼 영화로 주목을 받아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사진: 곡성군 보도자료, 곡성 증기 미니열차) 곡성군(谷城郡)은 전라남도 동북부에 있는 군이다. 동쪽으로 구례군, 서쪽으로 담양군, 북쪽으로 전라북도 남원시, 순창군과 접하며 남쪽으로는 전라남도 순천시, 화순군과 경계를 이룬다. 곡성읍은 섬진강 곡성분지의 중앙부에 위치해 있으며 군청 소재지이다. 곡성은 농업 위주의 1차 산업구조로 취약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었고 인구도 이농 현상과 노령화가 가속화되는 대표적 농촌 지역이다. 볼거리·놀거리·특산품이 없고 바다와도 멀리 떨어진 산간지역으로 정부의 광역개발권역 또는 여타 개발 축에도 포함되지 않은 배후지로 곡성이라는 지명조차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이후 폐철길 구간 중 섬진강을 따라가는 13.2km를 관광자원으로 재활용하고 철로 자전거가 인기를 끌었고 영화 곡성의 촬영지로서 구 곡성역 등이 입소문 나면서 많은 관광객이 곡성을 찾기 시작했다. 전남 곡성군은 삼국시대 백제 문주왕 때(서기 475)에 군명을 욕내(欲乃, 浴川)라 칭했다고 한다. 이후 통일신라시대 때인 고려초 승평군(昇平郡, 현 순천시)에 속하였다가 현종 9년(서기 1018)에 나주목의 속군으로 이속 되었다. 조선시대 태종 13년(서기 1413)에 현으로 개칭하였으나 정유재란(서기 1597) 시 남원 도호부에 합속되었다가 광해군 원년(서기 1609)에 다시 분리 독립해 현재 명칭인 곡성현으로 복설되었다. 근대에는 광무 3년 (서기 1899)에 행정구역 명칭을 곡성군으로 개칭하여 군수를 두었고 갑인년(서기 1914)에 담양, 구례, 순천, 남원 일부를 편입하여 11개면 126리로 개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