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 아래 도시빈민과 노동자들의 정주공간, 창신동(昌信洞)

숭신방(崇信坊)과 인창방(仁昌坊)의 '창(昌)'자와 '신(信)'자를 따서 붙인 이름
기사입력 2020.09.09 09:12 조회수 156

위 URL을 길게 누르면 복사하실 수 있습니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카오스토리로 보내기
  • URL 복사하기
  • 기사내용 프린트
  • 기사 스크랩
  • 기사 내용 글자 크게
  • 기사 내용 글자 작게

종로구 흥인지문 앞 낙산 아래 동네 창신동.
한양도성으로 진입하는 흥인지문과 인접해 있어 조선 전기부터 도성을 오가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면서 형성되었다.

 

창신동5.jpg

 

조선초(태조5년 1396년)부터 있었던 한성부의 5부 52방 가운데 동부의 인창방(仁昌坊)과 숭신방(崇信坊)의 한 글자씩 따서 1914년부터 창신동이라 칭했고 1943년 구제도가 실시됨에 따라 경성부 동부출장소 관할에서 동대문구로 편입되었다가 1975년 10월에 동대문구에서 종로구로 편입되었다.

 

당시 종로구 지역은 한성부의 중심으로 한성부 ①중부의 서린방(瑞麟坊)•견평방(堅平坊)•경행방(慶幸坊)•징청방(澄淸坊)•수진방(壽進坊)•관인방(寬仁坊)•장통방(長通坊)•정선방(貞善坊), ②동부의 연화방(蓮花坊)•창선방(昌善坊)•건덕방(建德坊)•숭신방(崇信坊)•숭교방(崇敎坊), ③서부의 인달방(仁達坊)•여경방(餘慶坊)•적선방(積善坊), ④북부의 순화방(順化坊)•준수방(俊秀坊)•의통방(義通坊)•관광방(觀光坊)•안국방(安國坊)•진장방(鎭長坊)•가회방(嘉會坊)•양덕방(陽德坊) 등의 지역이 청계천 북쪽지역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창신동.jpg

 

영조 27년(1751)에 ‘도성 삼군문 분계총록’에 보면 숭신방(성외) 밑에 숭신방계와 인창방(성외) 밑에 인창방계에 걸쳐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정조 13년(1789)에 간행된 ‘호구총수’를 보면 숭신방계가 숭신동계로, 인창방계가 인창동계로 바뀌어 있다.

 

갑오개혁(1894) 때 한성부 동서(東署) 숭신방(성외) 밑에 동문외계의 홍수동ㆍ복거교ㆍ남교ㆍ대정동ㆍ정자동ㆍ신리와 인창방(성외) 밑에 동문외계의 부정동ㆍ복거교 등으로 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에는 경기도령 제 3호에 의해 이 지역은 숭신면과 인창면이 되었다가 1914년 조선총독부령 제 111호 '부ㆍ군의 명칭ㆍ위치 및 관할구역의 개정'으로 경성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다시 경성부 동부에 편입되었으며 이어 경기도고시 제 7호에 의해 이 지역은 숭신면 자지동ㆍ정자동ㆍ성저동ㆍ신촌ㆍ당현동ㆍ인수동ㆍ복거교ㆍ홍수동ㆍ대정동ㆍ남교와 인창면 부어정동ㆍ복거교 등을 합하여 창신동이라 하였다.

 

1936년 경기도고시 제 32호에 의해 일제식 명칭으로 변경함에 따라 창신정이 되었다. 1943년 조선총독부령 제 163호에 의해 구제가 실시됨에 따라 동대문구가 설치되어 이에 속하였고 광복 후 1946년 일제식 동명을 모두 없앨 때 창신동으로 되었다. 1975년 대통령령 제 7816호에 의해 동대문구로부터 이관, 종로구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서울시 종로구 지명 유래)

 

옛 지명인 자지동(紫芝洞)은 단종의 비 정순왕후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옷에 보랏빛 물을 들여 내다 팔 때 그 물을 들이던 샘의 이름에서 유래되었고, 홍수동(紅樹洞, 홍숫골)은 조선 시대에 빨간 열매가 열리는 나무가 무성하였다 하여 붙은 이름이고, 돌산밑은 창신2동과 3동 사이의 절개지 서쪽 아래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이 절개지는 일제 강점기에 조선 총독부에서 지어진 건물들의 석재의 공급처이기도 했다.

 

창신동은 경성부의 인구 집중 과정에서 낙산 기슭 산비탈이나 청계천 변의 공유지들은 도시빈민의 중요한 생활 거점이 된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서울 도심 근접 비공식 주거 밀집지로 낙산 일대의 산 중턱과 산 정상까지 전후 재해민과 지방 이주민들의 주거 공간이 되기도 했다.

 

1961년에 만들어진 평화시장의 번성으로 동대문 의류산업 노동자들의 주거지대로 의류 생산 공장들이 몰려들면서 오늘날의 동대문 의류산업의 배후 생산기지의 메카가 되었다.

 

창신동은 봉제공장, 문구완구거리, 달동네, 채석장 등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지만 한양도성 등 문화재와 박수근, 백남준 등 예술가의 동네이기도 하다. 이 지역의 문화재들이다.

 

창신동1.jpg

 

창신동2.jpg

 

창신동3.jpg

 

창신동4.jpg

 

1. 안양암(安養庵): 1926년에 창건된 절로, 창신동 130-1에 위치한다. 불교 문화재가 많아 한국미술박물관의 별관 기능도 하고 있다.
2. 비우당(庇雨堂): 하정 류관이 지어 살다가 조선 중기에 지봉 이수광이 기거하던 초가집으로 이수광은 이 집에서 지봉유설을 집필하였다. 이름의 뜻은, 우산 없이 지내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집 안으로 새는 비를, 지붕을 고쳐 막지 않고 우산으로 피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원래 위치는 창신동 7-26번지였으며, 현재는 낙산공원 조성과 함께 창신동 9-471로 옮겨 복원되었다.
3. 자주동천(紫芝洞泉): 단종의 비 정순왕후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팔던 천을 자주색으로 물들이던 샘이다.
4. 좌룡정(左龍亭) 터: 조선 시대 한양에 있던 5대 활쏘기터[射亭] 중 하나였다. 현재 한양도성에 각석이 남아 있다.
5. 원흥사(元興寺) 터: 1902년(광무 6년)에 창건된 대한제국 황실의 보리사로 전국의 사원을 총괄하는 절이었다. 현재 이 위치에 서울창신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6. 박수근 집터: 창신동 393-16에 위치하였던 집으로 화가 박수근이 1952년부터 1963년까지 거주하였다.
7. 백남준 생가 터: 창신동 197에 위치하였던 9917m2 규모의 한옥으로, 현재는 철거되어 여러 필지로 분할되었다. 2017년 3월 10일 집터의 일부인 창신동 197-33에 백남준기념관이 개관하였다.
8. 김광석 집터: 1975년부터 1990년까지 김광석이 거주한 창신동 130-54의 양옥으로 사후 2013년까지 부모에 의하여 관리되다가 2015년 11월 2일 매각되었다.
9. 창신궁(昌信宮): 일명 ‘창신궁’은 임종상의 저택으로 대지 7천평 건평 4백평의 면적을 지니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 당시에 30만원의 거금을 들여, 궁궐과 같이 단청을 하여 건축한 곳이다. 창신동 641 일대에 있었던 한옥의 대지가 약 7천평으로 이곳이 창신궁으로 추정된다.

위 URL을 길게 누르면 복사하실 수 있습니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카오스토리로 보내기
  • URL 복사하기
<저작권자ⓒ코리아인사이트 & koreainsights.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댓글0
이름
비밀번호
 
회사소개 | 광고안내 | 제휴·광고문의 | 기사제보 | 다이렉트결제 | 고객센터 | 저작권정책 | 개인정보취급방침 | 청소년보호정책 | 독자권익보호위원회 |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 RSS top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